여행/부산광역시

[부산여행 ㅡ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07)]

드무2 2022. 11. 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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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 ㅡ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07)]

 

 

 

강치야 독도야

 

 

 

한 · 중 해양문명의 교류

 

국립해양박물관 개관 10주년 및

한 · 중 수교 30주년 기념전시

 

2022. 09. 06 ㅡ 11. 06

기획전시실

 

 

 

 

 

 

https://youtu.be/Jl-EGwTnhdE

 

 

 

한 · 중 해양문명의 교류

 

 

 

전시를 열며

배를 통한 교류, 인문人文이 되다.

국가 간의 관계는 정치나 사회, 문화적인 필요성의 상관관계로 맺어집니다. 특히 문명은 다양한 문화가 결합되고 발전해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역사적 산실입니다. 문명은 단독으로 성립 · 발전되는 경우는 드물며, 언제나 주변 여러 나라와 끊임없는 대외 관계와 충돌을 거치면서 성장합니다.

 

전근대 시대 한반도에 있어 중국 문화의 유임은 선진 문물 수용이라는 현실적인 목적과 이를 통한 주체적인 문화 발전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창조된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 역시 중국에 다시 전해지며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해양을 배경으로 인적교류를 통한 정신적 문명과 문물교류를 통한 물질적 문명을 교류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동아시아 사회 속 한국과 중국은 오랜 시간 동안 광활한 대지를 이용한 육로와 변화무쌍한 바다를 이용한 해로 등 다양한 길을 통해 교류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한중 문명교류는 육지 중심으로 주목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지 중심이었던 한국과 중국 교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해양문명 교류 흔적들을 모아 양 국가간 우호적인 미래 가능성에 대해 해양사적 관점으로 다가가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한중 해양교류가 존재하였음을 알림으로써 한중 문명 교류의 공간 범위를 육지에서 해양으로 확장하는 기회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국립해양박물관과 중국항해박물관은 한중 수교 30주년과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해양문명사적으로 동아시아 해양사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 · 중 해양문명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양 국가 발전에 끼친 해양문명교류의 영향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전시가 되길 바랍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친구들

 

 

 

 

 

 

 

 

 

대여도 大輿圖   

59 × 28                                                                         18세기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대여도로 18세기에서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 한국의 주요 지역명이 표기되어 있다. 특히 황해를 사이에 둔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거리를 가깝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출처 : 국립해양박물관]

 

 

 

 

 

 

 

1부

學 학

문명,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다.

 

문화교류가 그다지 원활치 못했던 고대 이전 시대에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화는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다.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새로운 문화는 끊임없이 유입됐다. 해로는 단순한 물품 교역로가 아닌 문화가 오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 특히 불교, 유교, 도교 등과 같이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유입된 종교와 사상은 사회와 학문분야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사상의 발전은 정치부터 예술까지 다방면의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유입된 문명은 한반도에서 재해석되고 발전되어 다시 중국 본토에 전해지기도 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유학자로 중국에서 활동한 유학자들과 입당 구법승들의 구법 및 역장 활동은 중국의 역사서에도 널리 칭송되고 있다. 한편 분서갱유나 왕조 교체를 통해 산실된 학문적 서적들을 한반도에서 다시 역수입해가기도 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우수한 판본 서적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수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양국 교류로 인해 한국과 중국 사이의 문화는 연속성을 지니며 발전 · 계승되어 후대에도 이어졌다.

 

 

 

통일신라 ㅡ 당 시기

최치원, 엔닌의 항로

 

 

 

 

 

 

유학 사상의 발전과 교류

유학사상은 한반도에 한자 문화가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유입됐다. 시대에 따라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 내용과 성격이 발전됐다. 고대 우리나라에 전래된 유학은 삼국이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해 가고, 나아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밑바탕이 됐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힘'이라 일컬을 수 있는 유학은 종교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의 수단으로써, 학술적 이론 체계를 갖추고 사상을 연구하는 교육의 수단으로써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붓의 존재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해 봉황동, 인천 계양산성, 부여 쌍복리에서 발견된 '논어 論語 목간'을 통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유교경전인 『논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유교는 배에 실은 사신들의 서적을 통해, 또 신라시대 유학자, 조선시대 학자들과 중국 사상가들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 붕우朋友로써 오랜시간 함께 해 왔다.

 

 

 

"바다를 건너다 泛海"

 

돛 걸고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나 멀리 불어온다

뗏목 타니 한나라 사신 생각

약초 캐니 진나라 동자 생각

 

세월은 무한의 밖

천지는 태극의 안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고

나는 또 신선 노인을 찾아간다.

 

 

 

 

 

 

진감선사 비명 탁본 眞鑑禪師碑銘 拓本

41.5 × 40                                                      1725년

 

이 비명은 최치원이 찬술한 네 개의 비명 가운데 첫 번째로 완성됐다.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계곡에서 선법을 펼친 기록이 있다.

 

 

 

사산비명

「사산비명 四山碑銘」은 네 곳의 산에 있는 비명 碑銘을 일컫는 말로써, 최치원이 찬술한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 비명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銘」, 「성주사 날혜화상 백월보광탑 비명 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대숭복사 비명 大崇福寺碑銘」, 「봉암사 지증법사 적조탑 비명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이 있다.

「사산비명」은 신라 승려인 진감선사, 낭혜화상, 지증대사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신라 왕실 승복사의 창건 내력을 담고 있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에 머무를 당시 저술한 『계원 필경집』과 더불어 최치원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

26.4 × 19.6               최치원(崔致遠, 857 ~ 908)

 

최치원이 885년 중국 회남 淮南에서 신라로 돌아와 당나라에 있을 때의 시문을 간추려 그 이듬해인 886년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책의 내용 중 당나라 절도사 節度使였던 고병 高騈을 위한 대필과 공식문서가 대부분이며, 중국의 사실들이 적혀 있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명저로서 의의가 있다.

 

 

 

 

 

 

 

 

 

최치원

 

고운 최치원 (崔致遠, 857 ~ ?)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 (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중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유학 · 불교 · 도교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통합사상을 제시했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과거 급제 했으며, 879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에 대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 (羅隱, 833 ~ 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명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 인정한 유학자로 활동했다.

그는 29세에 신라로 귀국한 후, 신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시무책時務策을 제안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생활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유학을 통해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수많은 시문(時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진사오만을 강남으로 떠나 보내며 送吳進士巒歸江南"

 

自識君來幾度別 그대와 알고 나서 멸 번째 작별인가

此回相別恨重重 이번 서로 헤어짐엔 한만 가득 쌓이는구나.

干戈到處方多事 가는 곳마다 전쟁은 나날이 치열한데

詩酒何時得再逢 어느 때에 다시만나 시와 술을 나눠볼까.

遠樹參差江畔路 저 멀리 나무들 강변길에 늘어섰는데

寒雲零落馬前峯 말 앞에 봉우리엔 찬 구름만 떨어지누나.

行行遇景傳新作 가다가 좋은 경치를 보거든 새 작품 전해주고

莫學嵇康盡放慵 게으른 혜강일랑 본받을 생각 마소서.

 

 

 

 

 

 

 

 

 

... 세 번이나 그만 두었으나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옛날 영윤이 하던 정치의 방법을 반드시 새로 부임하는...

... 已□舊令尹之政必以告新 ...

 

... 문이라는 시호를 준것이다. 공자가 자산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산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다. 행동이 공손하며, ...

...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其 ...

 

... "남이 저에게 억지를 가하는 것도 원치 않으며, 저 또한 남에게 억지를 가하고자 원치 않습니다. 공자께서 ...

... 不欲人之加諸吾亦欲加諸人子 ...

 

... "이런 사람은 어떠합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깨끗한 사람이다" 자당이 물었다.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알지 못하겠다" ...

... 已□舊令尹之政必以告新 ...

 

 

 

논어 목간 論語木簡

삼국시대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봉황동유적은 한반도 남부지방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서, 저습지에서 6세기 ~ 7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이 출토됐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은 횡단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네 면에 걸쳐 53 ~ 57자 정도의 묵서가 남아 있다. 묵서 내용은 『논어論語』 제5편 공야장公冶長에 있는 일부 구절로 삼국시대 한국과 중국 간 유학 교류를 추정할 수 있다.

 

 

 

 

 

 

안향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안향은 경상북도 흥주(興州 현 경북 영주)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회헌晦軒이다. 그는 1289년(충렬왕 15)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의 수행원으로 원나라 수도 연경을 방문햇으며, 고려 최초로 유학교육 전반을 관장하는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됐다.

유학제거는 고려의 교육 · 문화를 선도하는 중요한 임무를 원나라 황제가 안향에게 최초로 맡겼다는 사실은 안향의 학문적 역량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안향이 한번도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면서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가 등장했으며, 이는 조선이 건국되는 원동력이 됐다.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

고려                                                                            국립공주박물관

30 × 29.6                                                  안향 (安珦, 1243 ~ 1306)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 안향의 행적을 엮은 것으로 관향사실과 세계 · 진상 등 내용이 있다.

 

 

 

 

 

 

 

 

 

고승의 구법 활동과 불교교류

중국과 서역, 그리고 한반도를 오간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것은 물론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자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다른 나라와의 지적 · 문화적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구법은 주체적으로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외국에 나가 수행하고 순례하는 행위였다. 삼국시대 백제는 384년 동진東晋에서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 스님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한 후 구법을 위해 바닷길을 이용햇으며, 위진남북조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활동을 펼쳐 온 신라는 통일 이후, 당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진행함에 따라 배를 타고 활동하는 구법승들이 늘어났다. 조공사를 따라 양나라를 거쳐 최초로 인도에서 가져온 율서들을 통해 백제불교의 새로운 장을 연 검익謙益 스님이나, 신라 후기 승려인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 고려 낭공대사(朗空大師, 832~916) 등이 대표적인 구법승이다. 혼란한 삼국시대를 거쳐 당나라와의 전쟁이 마무리 된 후 통일신라 시기부터 구법승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당나라를 오간 구법승의 수는 약 150여 명으로 파악된다.

 

특히 입당구법승들은 주로 산동반도山東半島 등주登州의 적산 법화원赤山法華院에 머물며 활동했다. 7세기 초 신라의 입당구법승은 현장법사玄奬法師 주도의 불경 번역사업에 참여했다. 불교 종파의 발전과 교의 전파에 중대한 공헌을 남겼다. 8 ~ 9세기 중국에 온 신라 승려들 중 일부는 당을 중간 기점으로 삼아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으며 경론을 연구한 후 신라로 돌아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중국으로 전래된 인도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역장譯场에는 신라의 고승들이 다수 참여했다. 그 중 『왕오천축국往五天竺国』을 지은 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출신 승려로써 바다를 통해 당나라 황제인 현종을 만난 후, 인도 불교 성지를 순례한 경험을 책으로 남겼다. 혜초는 인도를 다녀온 후 54년 동안 오대산에 머물러 역장활동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고려 시대에도 구법을 위한 승려들의 중국 방문이 이어졌는데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 ~ 1101)과 각훈覺訓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으로 대립이 지속되던 고려 중기에 선종을 통합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태종을 열고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했다. 각훈은 삼국시대에 활약한 승려들의 열전인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지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승려들의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당구법순례기와 적산 법화원

적산 법화원은 해외 포교원布敎院의 구실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본국인 신라와의 연락기관 역할도 했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간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불교 예불인 강경의식과 강경예참 모두가 독특해 당나라와 신라 불교의 특징을 잘 혼합해 놓은 대표적인 예이다.

 

 

 

https://youtu.be/mVxLUq5ObBw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25 × 17                     엔닌(円仁, 794 ~ 864)                               9세기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의 불교 성지를 돌아보고 기록한 여행기이다. 당시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적산 법화원에 머무르면서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의상대사 진영 義相大師眞影

신라                                                                        범어사 성보박물관

 

661년 바닷길을 통해 입당하여 지엄에게 화엄사상을 배우고 귀국한 의상대사의 영정이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왕오천축국전慧超往五天竺國傳箋釋

통일신라                                                                    프랑스국립도서관

혜초(慧超 704~787)

 

통일신라 고승 혜초의 인도 구법여행이다. 8세기 해로를 통해 중국 광저우에서 인도에 도착해 각지를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왕오천축국전은 불교 유적지를 중심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 등 여러 나라의 풍습 · 언어 · 지리적 환경 · 종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석씨원류釋氏源流

신라                33 × 21                      국립중앙박물관

 

석가의 일대기와 불법佛法이 중국에 전례한 이후 원나라까지 유통에 관한 사실을 글로 쓰고 여기에 민중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배치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의상이 배로 중국에서 돌아오는 삽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고려                  29.2 × 20.6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각훈(覺訓)

 

고려의 고승 각훈이 1215년에 지은 한국 최고의 승전이다. 고려 후기 영통사靈通寺의 주지이던 고승 각훈이 왕명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각훈 당대까지의 고승들의 전기를 정리해서 편찬한 불교관련 인물 역사서이다.

 

 

 

 

 

 

 

 

 

납석여래좌상蠟石製如來坐像

고려                 12 × 14 × 17                              국립공주박물관

 

4세기 ~ 5세기 전반기에 걸쳐 중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여래상의 형식인 선정인禪定印의 여래좌상이다. 중국에서는 이른 시기의 돈황석굴이나 운강석굴, 나아가 용문석굴에도 선정인 여래상이 꽤 조성됐으며, 특히 5호 16국시대에는 매우 작은 금동제의 선정인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대각국사 의천 묘지명大覺國師義天墓誌銘

고려                   32 × 43.5 × 2.5                               국립중앙박물관

 

의천은 고려 전기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고 고려 문종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송나라의 상선을 타고 밀항하여 화엄학과 천태학 등 교학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귀국 후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삼국시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의상 편에는 당나라의 구법길에 만난 선묘낭자가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하는 배를 수호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대각국사 의천 진영大覺國師義天眞影

조선                     32 × 43.5 × 2.5                                     선암사 성보박물관

 

 

 

 

 

 

 

 

 

항해를 통한 도래인 유입과 신선사상

우리나라  지역 중 제주도는 해류의 영향으로 뜻밖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예로부터 풍랑으로 표류민의 불시착이 잦았던 제주도에서는 디양한 탐라국耽羅國 건국신화 속의 토착민과 바다를 건너온 강남천자국江南天子國의 만남이 전설처럼 전개되고 있다. 찾아오는 강남천자국의 신들은 불이나 생명에 관한 것들과 비단 · 철 · 오곡 씨앗 등과 같이 고대 문명이 발전하기 위한 물질들을 전해준다고 여겨졌다.

 

한편, 도교는 중국의 토착 종교로 도가 사상의 노자와 옥황상제를 교조 및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도교가 한반도에 언제, 어떻게 유입되었는지 경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미 고대 한반도의 삼국이 도교를 형상화한 문양과 관련된 역사서가 주로 쓰였음을 통해 유입된 역사가 불교보다는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특히 도교에서 중국의 동해이자 한반도의 서해는 예로부터 바다 너머 어떠한 세계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고대 중국인은 동쪽으로부터 해가 뜨는 모습을 보고 동쪽이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생각해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동경大荒東經』 속에 열 개의 태양이 하나씩 떠오른다는 전설로 남겼다. 또한 이 바다에는 봉래逢萊 · 방장方丈 · 영주瀛州로 불리는 삼신산三神山에서 신선이 살며, 이곳의 옥과 진주로 된 나무 열매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전해졌다. 바다에 대한 경외심으로 고대의 해양 신선 사상이 발달됐으며, 이는 한반도의 서해안 지방의 제사 유적에도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조선후기                                  세로 150.3 가로 51.5 가로 48.2

김홍도(金弘道, 1745 ~ 1806 ?)

 

서왕모가 묘자를 개최하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신선들의 각자의 지물을 파도 위에 띄워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그림이다. 특이한 점은 화면 중앙에 소를 타고 『도덕경』을 읽고 있는 노자가 있고, 옆에 윤희가 있어 아마도 노자가 함곡관을 지날 때 윤희가 5,000여 자를 남겨주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이구곡 10폭병풍小痴許鍊筆武夷九曲十幅屛風

510 × 133                                        조선

허련(許鍊 1808~1893)

 

무이구곡은 중국 복건성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굽이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도이다. 그림의 화제는 남송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주희朱熹의 '무이구곡도가'이며, 자연 묘자가 주가 되나 도학道學을 공부하는 단계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소치 나이 77세 되던 해에, 완숙의 경지에 무르익은 필치로 소치의 작품세계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조선후기                                     130 × 200

백은배(白殷培1820-1895 이후?)

 

백은배는 조선후기에 활동한 화가로서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계승해 「대기도對碁圖」, 「강안기려도(江岸騎驢圖)」,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등의 풍속화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남겼다.

 

 

 

 

 

도교와 해상군선도

신선 그림은 인간 본연의 소망인 불로장생 사상이나 현세기복을 추구하는 염원 등과 밀착되어 발전했다. 중국에서 신선도는 남북조시대부터 나타났지만, 군선도群仙圖는 원나라 · 명나라 때에 이르러 경수慶壽를 주제로 한 일련의 희곡과 소설, 신선전神仙傳의 유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선도에 관한 기록과 유품들이 주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집중됐으며, 후기와 말기를 통해 발전했다.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요지연도瑤池宴圖, 군선경수반도회도群仙慶壽蟠桃會圖,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팔선도八仙圖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해상군선도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신선들의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다른 배경은 전혀 없고 파도와 구름만이 표현되거나 혹은 배경이 완전히 생략되기도 한다.

해상군선도는 여러 신선들이 신통한 능력을 발휘해서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와 옷깃을 휘날리는 바람에도 개의치 않는 신선들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여 장수와 행복, 성공을 바랐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소망이 담긴 그림이다.

 

 

 

 

 

 

 

 

 

천비영응지기 탁본天妃靈應之記拓本

중국 명明                     61 × 216                                중국항해박물관

 

1431년 정화가 7번째로 서양 원정을 떠나기 전 복건에 머무를 때 천비인 마조여신을 기리는 비석의 탁본이다. 비문은 총 1,177자로 천비 우호에 대한 내용과 여섯 차례의 원정에 대한 내용이 써져 있다.

 

 

 

 

 

 

마조신앙

중국에서 전래된 해양 신앙으로 마조媽祖가 있다. 마조신은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선원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항해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신들과 다르게 실존했다고 전해진다. 마조는 바다에 나갈 사람에게 큰 파도로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나가지 말라고 예언을 하거나 항해 도중 거친 풍랑을 만나 선박이 위기에 처할 때 술법을 써서 구원해 주는 신통력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마조신앙은 사행단에게도 전파가 돼 명 · 청 교체기에 해로사행을 다녀온 사행단이 해난사고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묘도廟島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마조여신상媽祖瓷像

중국 명明                 6 × 6.5 × 13.5                             중국항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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