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승만 건국사

[(4) 입헌군주제- 혁명전야의 대격돌]

드무2 2023. 5. 1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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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입헌군주제- 혁명전야의 대격돌]

 

 

 

▲ [윤치호 일기]와 관복입은 윤치호. (자료사진)

 

 

 

"이것이 왕이라니···" 윤치호의 탄식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과 친러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ㅡ5, 1898. 11. 5.)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국왕'ㅡ그는 고종이다.

 

'혁명의 해' 1898년 11월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이런 일기를 쓰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듯 고종 황제를 '배신적인 비겁자'보다 더 천박한 사람이라 막말을 퍼붓는가.

 

일기대로라면 고종은 개화파를 기만하면서 친일파ㅡ친러파에 둘러싸여 일본ㅡ러시아의 이권 사업에 휘말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독립협회의 민권운동 목표는 '입헌 군주제'

 

3월 10일부터 거리정치 '만민공동회'를 시작한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로 국가체제 개혁을 목표로 정한 것은 4월이었다. <의회원을 설립함이 정치상 제일 긴요함>이란 토론회를 열고 <독립신문>에 장문의 논설을 게재, 여론화를 도모하며 개화지지 정부관료들과 은밀히 협상하여 합의까지 거친다.

 

마침내 7월 3일 고종황제에게 의회 창설을 공식적으로 제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중추원이 유명무실하니 이것을 새로운 의회로 만들어 '민의'를 널리 채용하라 주장한 제안이다.

 

그리고 당장 상원ㅡ하원을 두기에는 백성의 교육이 미비하다며 " 우리는 외국과 통상 교제한 후 몇 해 동안 배운 것이 지권연 (紙卷煙) 먹는 것 한가지 밖에 없으니 어찌 하원을 꿈이나 꾸리오···" 그러니 우선 상원부터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 1898. 7. 27.)

 

이 '논설'도 이승만이 쓴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 의회제도 지지자로 변신한 이승만은 그러나 상하 양원제도는 국민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조선의 현상으로서는 백성들이 명망가를 선출할 수준이 못되므로 그 중간단계 '입헌정치 (입헌군주제)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1904)

 

따라서 프랑스 혁명처럼 당장 제왕을 살해 축출하는 폭력혁명보다는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상징적인 왕을 두고 실질적 국가운영은 헌법에 따라 엘리트들이 미국식으로 추진 발전시키는 방향을 당시 개화파들은 선호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고종은 "조정의 일에 직분을 넘어 망령되이 논하지 말라"며 거부하였다.

 

거듭 상소를 올린 독립협회는 외인용병, 황제음독, 7대신 전면 개각 등 농성투쟁을 이어가는 중에 고종이 개화파 박정양 내각을 수용함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급진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고종 같은 황제가 그리 쉽게 권력을 의회에 양보할 리가 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황국협회' (皇國協會)란 단체가 나타나 박정양의 집에 들이닥쳐 사임 요구 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황국협회는 수구파가 보부상 (褓負商 ; 등짐진 행상)들을 소집, 개화파에 대적하려 급조한 시위꾼 조직체로서 경비는 황실이 하사했다고 했다. (<독립신문> 1898. 10. 18.)

 

고종이 독립협회 요구를 들어 수구파 7대신을 해임한 나흘 뒤의 일이다.

 

그때 고종이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한 윤치호 독립협회 회장은 황제를 직접 만나 '관민 합동 국정개혁 집회'의 필요성을 설득, 고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 고종 황제 정복차림 (자료사진)

 

 

 

천민 백정의 애국 연설··· '헌의 6조' 채택

 

10월 28일 오후 3시 종로 만민공동회는 박정양 등 대신들이 참관자로 나타났다.

첫 만민공동회인지라 독립협회는 각종 사회단체, 각 학교 학생들, 상인, 승려, 맹인, 백정, 기생 등을 초청하여 다양한 민의를 황제에게 전하려 하였고, 황국협회 측도 참석하였다.

박정양이 먼저 "성상께서 인민의 방책을 들어오라 하셨으니 협의 끝나고 모두 해산하면 입궐하여 상주하겠다"고 말하자 만세와 박수가 터졌다.

 

이어 등단한 사람은 백정 박성춘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천민이 대신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것이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 (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하나의 장대로 받친 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우리 황제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 (國祚 : 국운)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 (『이승만과 김구』 제1권, 손세일 지음, p460, 조선뉴스프레스, 2015)

 

마침내 '헌의 6조 (獻議六條)'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임금에게 논의를 드리는 6개조는 국정개혁과 의회설립의 기초가 되는 내용이다.

1. 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 체결 등에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이 합동 날인.

3. 전국의 재정과 조세는 탁지부 (度支部)가 관장하고 예산 결산은 인민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공판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형을 집행함.

5. 황제가 임명하는 칙임관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함.

6. 장정 (章程 : 법률 규정)의 실천.

 

요컨대 고종 정부의 부패무능 직무태만을 청산하고 인권 보장 및 민의를 철저히 반영하라는 요구였다. 박정양이 헌의 6조를 상주하여 다음날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10월 31일 새벽 고종은 '헌의 6조'를 공포하였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해산하려 하자 청년 이승만이 나섰다.

 

"매번 황제의 조칙으로 정부가 행하도록 했으나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 따라서 본 회는 경솔하게 해산할 것이 아니라 만약 이번에도 실시하지 않으면 우리가 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줄 아오."

 

이승만의 연설에 군중은 주저앉았다. 궁중에 다시 한번 '실시 촉구' 서한을 보냈고 정부도 화답하였을 때 공동회는 6일간의 밤낮 농성을 풀었다.

 

 

 

▲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 화재전의 모습. 2층대궐은 화재후 단층으로 신축된다. (자료사진)

 
 
 

수구파의 음모··· 고종은 어디까지 변하는가

 
11월 4일 공포된 '중추원의 신관제'는 제1조에 '법률ㅡ칙령의 제정과 폐지, 개정'과 정부의 상주사항 일체를 심사한다고 규정되었다. 이튿날 5일엔 '의원 선거' 실시공고도 했다. 드디어 사상 처음 국회의원 선거와 입법기관 출범을 알리는 혁명적 결정이 나온 날이다.
 
그날 밤, 서울 장안엔 정체불명의 벽보들이 광화문 등 요소마다 붙었다.

 

 
마치 독립협회가 만든 것처럼 꾸민 '익명서' 내용은 "조선왕조가 쇠퇴하였으니 만민이 합심하여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국민이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란 투로 누군가 조작한 것이었다. (윤치호 '독립협회의 시종' ㅡ [신민] 1926년 6월호. 『이승만과 김구』 제1권, 손세일 지음)
 
경찰은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수구파 조병식 등은 고종에게 "날이 밝으면 독립관에서 박정양ㅡ윤치호의 공화정이 나타나 황실을 없앨 것"이라며 우왕좌왕하는 고종을 거짓 선동한다.
 
안 그래도 의회제도에 따른 왕권 상실을 우려하던 고종은 즉각 분기탱천, 사실 확인조차 안한채 즉석에서 독립협회 간부 20명 검거령을 발한다.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한 17명이 체포되고, 중추원 의원선거를 준비하던 윤치호는 배재학당 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한다.
 
고종은 이날 독립협회를 포함한 모든 민간단체의 해산을 명하고 박정양 등 '헌의 6조'에 찬성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 익명벽보 조작의 주역 조병식을 다시 등용하여 수구파 내각이 된다.
 
그날 밤, 고종의 어이없는 배신에 분노한 윤치호의 일기가 글머리 부분에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그 '천박한 거짓말쟁이 국왕'의 조령모개 (朝令暮改) 변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에 이승만은 윤치호에게 달려갔다.

 

 방법은 군중 동원 거리투쟁뿐이다. 윤치호와 합의한 이승만은 청년학도들을 이끌고 경무청앞에서 진을 친다. 술렁이던 상인들 부인회, 시민들이 사방에서 합류해왔다.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아니면 우리도 체포하라."
 

 

구금된 동지 17명을 내놓으라는 시위는 경찰력과 몸 싸움을 벌이며 연설, 또 연설, 밤이 되자 횃불을 피우고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시민들은 장국밥 300그릇을 보내고 성금과 물품을 가져와 성원하므로 농성장은 더 기세를 올렸다.
 
"만민공동회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나의 선친이 오셔서 '너는 6대 독자'라고 강조하셨다. 때로 아펜젤러 교장이 와서 배재의 학도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별의 별 풍문이 나돌았다. 정부가 병정을 보내 총격으로 해산시킬 것이라느니, 또 나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달랠 것이라느니··· 실제로 두 사람이 밤중에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쉬지 않고 연설을 해야 했다. 제일 힘들 때는 동트는 새벽, 사람들이 적어지고 모두들 지쳤으며 춥고 졸렸다···" (『Autobiography of Dr. Syngman Rhee』ㅡ'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권기봉 옮김.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철야시위 닷새 되던 11월 10일, 고종은 또 마음이 변했다.
 
17명을 재판에 회부, 채찍 40대를 선고하자 17명은 '불복'을 외쳤다. 보고 받은 고종은 형을 면하고 석방하라 했다.
 
"17명이 드디어 석방되었다. 그날 밤이야말로 나는 득의충천하였다.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가 달성되었도다···" (이승만 자서전 초록)
 
사기가 충천한 만민공동회는 해산은 커녕 종로로 장소를 옮기고 상소를 올렸다.
 
1) 독립협회를 모함한 조병식 유기환 등 5명을 재판에 회부하라.
2) '헌의 6조' 즉각 실시.
3) 독립협회 부활.
4) 정부대관 임명시 백성의 동의를 얻을 것.

 

5) 조병식 집권시의 외교문서를 공개할 것.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렸음에도 정부는 공포되었던 '중추원 신관제'를 개정, 독립협회의 민선의원 조항을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일찌기 입법기관 (국회) 의원 50명 중 25명은 독립협회가 선출하도록 합의한 것을 고종이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이에 공동회는 시위장소를 다시 황궁 정문 인화문 앞으로 옮긴다. 본격적인 강공태세.
 
수구파 조병식은 또 고종에게 개화파들이 대궐을 포위하고 '프랑스 혁명' 같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부추기면서, 외국공관들의 동조를 막으려 독립협회 명의로 '간섭 말라' 거짓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20대 이승만(오른쪽)과 아버지 이경선 옹. 6대독자 이승만은 열여섯살에 결혼, 아들을 낳았다. (자료사진)

 

 

 

'비겁한 황제'의 급습··· 이승만은 육탄전

 

철야시위 17일째 11월 21일 새벽, 황제측의 보부상패들이 언제 습격할 지 몰라 술렁이는 농성장에 정부대신들이 나타나 '보부상 혁파'와 '피습방지'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2,000여 명은 서대문 고개를 넘어 정동 인화문 앞 시위대를 향해 진격을 개시한다.

공격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연단에 올라 소리 지른다.

"동요하지 마시오. 우리가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 즉 못된 간신배가 보부상패를 불러 우리를 치라해서 목전에 당도하였소. 죽더라도 충애충군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천추에 영광이외다."

 

이때, 함성을 지르며 들이닥친 보부상패가 무차별 공격을 개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금방 3명이 즉사하고 부산자들이 속출, 맨손으로 치고받는 육박전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격분한 이승만은 보부상 단체두목 길영수를 보자 "나부터 죽여라" 머리로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누군가 이승만을 끌어안았다. 온몸을 얻어맞은 이승만은 땅을 치며 통곡하는데, 아들이 걱정되어 나왔던 아버지가 끌어안고 같이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으로 뛰어가 쓰러지고 말았다.

친구 김원근이 뛰어들어와 "이승만이 맞아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날 오후 신문도 이승만이 보부상패에 덤볐다가 맞아죽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만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의 주역, 의회 설립의 국민희망을 한 몸에 받는 청년 스타가 되어있었다.

얼마 후 이승만은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종로로 나아가 만민공동회를 다시 개최한다.

 

한성 (서울) 시내는 혁명전야와 같이 술렁거렸다.

공동회 시민들은 보부상패를 찾아 몰려가고 한편으론 수구파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민영기 등 대관들의 집에 몰려가 때려 부수었다.

학교마다 문을 닫고 학생들은 공동회에 속속 합류한다. 상인도 시민도 음식과 성금을 갖고 몰려 들었다. 경비와 해산을 맡은 병정들과 경찰들도 시위를 지지한다며 일부는 제복을 벗어던지고 대열에 참여하는 상황으로 급변한다.

낭패한 고종은 한성 시장 등을 보내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군중들은 돌팔매로 응수한다.

성난 군중에 쫓긴 보부상패는 마포 쪽까지 밀려나 재공격명령을 기다렸다.

 

겁먹은 고종은 을미사변 (민비피살) 직후처럼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함께 머물자면서 대책을 구한다. 무력진압을 하겠다는 고종의 말에 동조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뒤늦게 윤치호더러 해산을 간청했지만 격분한 이승만의 청년 혁명대를 설득할 묘수는 윤치호 능력 밖이었다. 한마디로 고종 황제 자신이 일구이언 (一口二言) 갈팡질팡 수습불능사태를 만들어 놓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가.

 

고종은 마침내 또 변신, 독립협회를 부활시킨다. 보부상 단체를 합법화 시킨 규칙도 철회한다.

만민공동회는 만세를 불렀을까. 이승만이 이끈 투쟁이 독립협회 해산 후 18일만에 승리했지만 군중은 만세도 부르지 않고 해산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 투쟁세력은 '헌의 6조'와 '의회설립' 약속을 빨리 이행하라며 '종로 투쟁'을 가열시켰다.

 

고종은 해산할 줄 알았던 만민공동회가 더 커지자 직접 수습해보기로 시도한다.

11월 26일 오후 경운궁 밖 군막 주변엔 각국 외교관들과 그 부인들까지 초대되었다. 공동회측의 요구에 따른 것, 믿을 수 없는 고종의 발언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증인' 외국 공사부부들을 입회시키라 했다. 고종이 궁문을 나와 말했다.

입회한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 부활 등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해산하라는 요청이다.

이승만 등은 그제야 황제 만세를 부르고 해산한다.

정상업무로 돌아간 독립협회는 이승만을 부회장 이상재와 동격으로 격상시킨다.

 

 

 

▲ 중추원이 열렸던 독립관(현재 모습).

 

 

 

23세 '국회의원' 이승만··· 한 달 만에 사라진 꿈

 

11월 29일, 고종은 자기방침대로 중추원을 새로 구성한다.

독립협회가 요구한 민선 25명도 황제가 임명해버린 것, 의관 (議官 = 국회의원) 50명 중 독립협회 계열은 17명 뿐이었다. 만 스물 세 살 이승만도 종9품 의관이 된다. 연봉은 360원.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헌의 6조' 실천과 입헌군주제 실시를 위해 원내ㅡ원외 양면 투쟁에 돌입한다.

사흘 후 12월 1일 보부상패에 맞아죽은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새로운 시위투쟁 이벤트로 만들어 거창하게 치른다.

학교별 마을별로 수많은 명정을 준비, '충의 (忠義)에 죽은 대한제국 의사 (義士) 김덕구'라 써서 들고 노래하며 행진하는 광경에 시민들은 '영의정 장례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환호하였다.

이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철야 상소시위를 재개한다.

 

소수당이지만 양면투쟁이 고조되자 긴장한 고종과 수구파는 기회를 엿보았다.

고종은 또 중추원 부의장에 윤치호를 지명, 선출하게 한다. 온건 개혁파 윤치호의 역량에 기대한 것.

그런데, 12월 18일 '임용적임자 추천결의'가 고종에게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다.

황제가 임명할 고관들 명단을 의회가 추천하는 일에 이승만 등 젊은 주동자들은 전면개각에 해당하는 11명이나 개화파를 선정한 것, 거기 박영효와 서재필이 포함되었다.

두 사람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서 특히 박영효는 '민왕후 폐비'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다.

 

고종은 즉각 칼을 빼들었다. 박영효 영입을 주장하는 박영효 측근들을 일제히 체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킨다. 독립협회도 해산령은 없었으나 사실상 해산되었다.

1월 3일 개화파 의관들과 함께 이승만도 파면 당한다. 이승만은 친분이 깊은 의료선교사 에버슨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9일 체포되어 경무청에 갇히고 만다.

 

백일몽의 국회 한 달!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던 급진 개혁운동가 이승만의 꿈은 이대로 허망하게 사라졌는가. 아니다. 배재학당서 미국의 자유를 발견하고 미국같은 의회 민주주의를 신봉한 청년 이승만의 굳센 신념과 불굴의 의지는 한 번도 포기할 줄 모른다.

한성감옥, 미국 유학, 망명, 하와이 독립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까지 결코 멈출 수 없었던 자유민주공화국의 대서사시는 50년 후 마침내 대한민국 건국이란 꽃을 피운다. 우선 한성감옥의 사형수를 찾아가 보자. <계속>

                                                                                                                                                                              인보길 기자
 
                                                                                                                                                                    [출처 : New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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