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8
민주주의의 시련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여 국민은 4 · 19혁명으로 민주주의를 지켰다. 그러나 일 년 뒤 일어난 박정희의 5 · 16군사정변으로 민주주의의 시련이 다시 시작되엇다. 박정희 정부는 민주화 세력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고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였다. 반공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졌다. 남북의 심각한 군사적 긴장상태 이후에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1959
쿠바 사회주의 혁명
1964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면전 시작, 세계 곳곳에서 반전운동 일어남
1966
중국 마오쩌둥 주도로 문화대혁명 시작
1968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의 주도로 68혁명 일어나 서구에 확산
1968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1969
미국 닉슨 독트린 선언으로 아시아에 군사적 개입 피하고 핵우산 제공
1972
미 · 소 긴장완화 (데탕트)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불 탄표 찾아내고 부정원흉 처벌하라
부정선거 몰아내어 민주정의 바로잡자
3 · 15선거는 불법이다 무효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4 · 19혁명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탄압과 부정선거를 통해 두 차례의 개헌을 강행하며 종신집권을 꾀하였다. 1960년 정 · 부통령 선거에서 정부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더욱 거세어진 국민의 저항은 4 · 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부가 무너졌다. 새로 들어선 장면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경제개발을 계획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언론자유부터 평화통일까지 억압되었던 사회적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되었다.
진보당 공약
1956년 3대 대통령선거 당시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공약 10가지를 홍보하는 전단이다. 통일 · 외교 · 경제 · 행정 · 농촌 · 의료 · 교육 현안에 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
祖國 (조국)과 民族 (민족)이 渴望 (갈망)하는 改憲要旨 (개헌요지)는 이렇다!!
一. 大統領 (대통령), 副統領 (부통령)의 任期 (임기)는 四年 (사년)으로하되 再選 (재선)에 依 (의)하여 一次 (일차) 重任 (중임)할 수 있다
二. 憲法改正 (헌법개정) 및 國家構成要素 (국가구성요소)의 變革 (변혁)은 有權國民三分之二 (유권국민삼분지이) 以上 (이상)의 決議 (결의)없이는 할 수 없다
三. 選擧民 (선거민)에게 兩院議員 (양원의원)에 對 (대)한 召喚權 (소환권)을 附與 (부여)한다
四. 政府 (정부)에게 民議員 (민의원)에 對 (대)한 解散權 (해산권)을 附與 (부여)한다
五. 憲法第六章經濟條項 (헌법제6장경제조항)을 改正 (개정)할 것 等 (등)을 主張 (주장)한다
改憲推進委員會 (개헌추진위원회)
개헌안 설명 전단
1954년 개헌추진위원회에서 발행한 개헌요지를 설명하는 전단이다.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개헌안은 국회 표결에서 정족수에 1명 미달하였음에도 '사사오입' 논리로 불법적으로 통과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 1960. 6. 1.
4 · 19혁명 학생 시위 1960. 4. 23.
3 · 15부정선거 1960. 3. 21
진보당 사건 1958. 1. 18.
<고바우 영감> 원화
등록문화재 제538ㅡ1호
부정선거를 보여주는 유권자 명부
1960년 정 · 부통령 선거 유권자 명부이다. 유권자를 9명과 3명으로 나누어 조를 만든 뒤 조장을 표시하였다. 이를 통해 투표과정에서 공동투표와 같은 부정행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60년 정 · 부통령선거 자유당 포스터
1956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 것을 의식해서 '이번에는 속지말고 바로뽑자 부통령'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1956년 정 · 부통령선거 민주당 포스터
1956년 정 ·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서하였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에는 민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전교 학생이 아래 신교사 앞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정치인들의 불법정치에 분개, 모두들 교문을 나설 결심들이었다. 50여 명으로 추산되는 순경이 학교 근처에 와 있다. 이때 몇몇 학생이 교문을 나섰다... 경찰은 우리 학생 여러 명을 불법체포 · 연행하였다... 시간이 경과함에따라 학교를 방위하는 경찰의 경비력이 강화하여지기 때문에 빨리 해야만 했다. 때를 같이하여 등사실에서는 결의문과 구호를 프린트 중에, 플랜카드를 쓰는 중에 있었다... 모두들 단단한 스크럼을 짰다. 구호 프린트를 뿌리면서 뒤의 열을 정돈 시키면서 종로 5가로 향했다. 가두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서로들 구호 삐라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4 · 19혁명 일기와 전단
4 · 19혁명 당시 동성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기증자가 시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와 학교 등사기로 직접 제작한 시위 전단이다. 4월 19일 시위 당시 파촐소에 연행된 동성고 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병태 기증
<민주혁명의 기록>
동아일보에서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까지 일련의 과정을 취재하고 촬영한 자료들을 모아 발간한 사진집이다. 표지사진은 하야성명 이후 탱크 위에 올라타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한정석 기증
1960년 4월 25일
플래카드를 하나 만들까 태극기를 하나 만들까 망설이다 태극기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반대하실까봐 말씀도 드리지 않고 장롱을 뒤졌다... 마침 나를 반기듯 광목 자투리가 남아 있었다. 그 중에 자그마한 것을 꺼내어 일부를 잘라 물감을 칠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여자가 차 위에 올라타고 있는 선두 지프차가 광화문 쪽을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며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지프차를 세웠다. 그리고 지붕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태극기를 앞에 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부정선거 다시 해야 합니다!
빼앗긴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찾으러 경무대로 갑시다!
학생들을 향햐 통을 쏘지 마라.
맨주먹인 학생들에게 총이 웬 말이냐?"
고등학생의 일기
4 · 19혁명 당시 명성여고 2학년이었던 기증자의 일기이다. 4월 26일 시위에는 직접 만든 태극기를 들고 참가하였으며, 최선두에 섰던 지프에 올라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재영 기증
부산정치파동, 임시 수도 부산에서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의원들이 탄 버스가 통째로 헌병대에 억류되었다.
1952. 5. 경향신문
초대 대통령의 3선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의결정족수에 미달하여 부결되었으나, '사사오입'의 억지논리로 가결로 번복하였다.
사진은 이기붕의 투표모습이다.
1954. 11. 국가기록원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
1958. 1. 경향신문
조봉암 52년만에 재심에서 대법원 무죄 판결
자유당은 국회 경위를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을 감금한 뒤 여론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958. 12. 경향신문
2 · 28민주운동, 이승만 정부는 일요일인 2월 28일에 대구의 학생들이 민주당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등교조치를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1960. 2. 3 · 15의거기념사업회
3 · 15부정선거의 결과로 총유권자보다 투표자수가 많아지자 투표함을 불태우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1960. 3. 3 · 15의거기념사업회
3 · 15부정선거 항의시위 때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되었고, 마산과 경남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1960. 4. 경향신문
3 ·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고려대생의 대규모 시위 행렬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1960. 4. 정범태
4월 18일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은 정치깡패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 사진이 보도되어 19일 시위의 촉매 역할을 하였다.
1960. 4. 정범태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간격이 좁혀지자 경찰은 발포를 준비하였다.
1960. 4. 정범태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에 발포하는 경찰
1960. 4. 정범태
경무대로 몰려온 시위대와 군경이 대치하고 있다.
1960. 4. 정범태
축첩자 낙선운동
1960. 경향신문
4월 25일 대학교수들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였다. 다음 날인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하였다.
1960. 4. 정범태
서울 시내 초등학생들이 "국군 아저씨,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1960. 4. 정범태
시위대가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타 만세를 부르고 있다.
1960. 4. 정범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이후 시위대는 이기붕의 자택을 파괴하고 관용차를 탈취하였다.
1960. 4. 임응식
4 · 19혁명 이후 한 청년단체에서 제시한 요구사항이 담겨 있다.
4 · 19혁명과업 제시 격문 1960.
4 · 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좌) 윤보선 대통령 (우) 장면 국무총리
1960. 5. 경향신문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1960. 5. 경향신문
4 · 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 · 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 · 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장준하, <사상계> 1961년 6월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그를 따르는 군인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군사정부를 세웠다.
1961. 5. 정범태
2공화국 수립 이후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을 위해 특별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960. 경향신문
5 · 16 이후의 우리 사회는 부정 아닌 것이 없고, 부패 없는 곳이 없으며, 사회정의라고는 찾아 볼 길 조차 없어지지 않았는가. 5 · 16은 의욕이란 헛기침 만을 허공을 남기도 있다. 민족을 배신하고도 말마다 민족을 팔고 민족주체성 운운을 뇌까린다. 이 땅에 또 다른 5 · 16은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같이 민족에게 치명상을 입힌 그 5 · 16은 민족의 이름으로 정죄를 받고 민족의 뇌리에서 사라져야 한다.
장준하, <사상계> 1966년 5월호
제2공화국에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의 내용을 홍보하고 있다.
국토건설사업 홍보 포스터 1961.
군사정변 성공 직후 정도영 육군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
1961. 5. 정범태
군사정부는 과거청산을 명분으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을 체포하였다.
1960. 5. 정범태
군사정부의 사회정화조치로 초창기에는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1961. 7. 정범태
반국가 ·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민족일보 관계자들은 혁명재판소에 회부되었다.
신문은 폐간되었고 사장 조용수는 사형에 처해졌다.
1961. 8. 경향신문
군사정변 1주년을 앞두고 서울시청 앞에서
'전국재건청년회 및 부녀회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1962. 5. 정범태
서울대생의 군정연장 반대시위.
민정이양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군정을 연장하려고 하자
각계에서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1963. 4. 정범태
중앙정보부가 1964년 조작 발표한 '인혁당 사건'의 피고인들.
1965. 5. 경향신문
대법원은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9명에 대한 재심에서
옛 반공법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
서울대생의 6 · 8부정선거 규탄 시위.
6월 8일 제7대 총선에서 많은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1967. 6. 경향신문
경기고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64. 3. 경향신문
고려대 정문에 붙은 무장군인의 교내 난입에 항의하는 격문.
1965. 구와바라 시세이
박정희 정부는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세 번 연임을 가능케하는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하고 국민투표에 부쳤다.
1969. 10. 경향신문
중앙정보부는 서울대 학내 서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
간첩혐의를 씌우고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1967. 경향신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대를 트럭에 실어 연행하고 있다.
1965. 구와바라 시에이
신민당의 삼선개헌 반대 시위
1969. 8. 경향신문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영구집권을 기도하였다.
1972. 12. 국가기록원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더냐?
매국협정 저지시켜 조국수호 이룩하자
6 · 8선거 부정선거 망국선거 다시하라
자유혼은 더욱 절규한다
삼선개헌 결사반대
교련 전면 철폐
군사정변과 장기집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군사정변을 일으켜 민주적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부세력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정치공작에 활용하였으며,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후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민주인사들은 신민당을 창당해 군부세력에 대응하였으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유신헌법을 통해 독재를 강화하고 영구집권을 도모하였다.
5 · 16군사정변 화보
5 · 16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공보부에서 발행한 화보이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발표한 6개 항의 혁명공약과 정변주체들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을 싣고 있다.
5 · 16군사정변 소식이 실린 민족일보
5 · 16군사정변으로 군이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식과 이틀 뒤 전두환이 주도한 육군사관생도들의 정변지지 시위 소식을 보도하였다. 민족일보는 5월 19일을 마지막으로 반국가 ·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계엄사령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중학생의 일기
5 · 16군사정변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기증자가 작성한 일기이다. 정변 당시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김영래 기증
1961년 5월 16일 화요일
역사적인 순간이다. 흉패한 장면 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감이 강한 대한의 국군은 새벽 세 시를 기해 혁명을 일으켜 성공되어 가는 단계에 있다. 나는 처음에 총소리를 들을 때 혹시 이북에서 오지 않앗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으나 대한민국의 국군은 용감하였다. 정의파인 박정희 소장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일어났다... 나는 수업을 두 시간하고 아이들과 중요 관청이 있는 곳을 돌아다녔다. 대체로 시민은 환영하는 뜻을 보이나 의심이 드는 것도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장면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기 바라며 빨리 조속한 시일 안에 질서가 회복되어 정국이 안정되기를 빌며, 무능한 장면은 정권을 내놓아... 국민에게 불안감을 보여주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박정희 민주공화당 입당원서
1963년 8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사정변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제출한 입당원서이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민정이양의 형식을 취했다.
민주공화당 전당대회 포스터
'번영에의 도약'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민주공화당은 1967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당대회를 열어 박정희 대통령을 총재로 다시 추대하였다.
동백림 사건이 실린 독일신문
1967년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공안사건인 동백림 사건 관련 기사가 실려있다. 당시 유학생이던 기증자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기증자는 출소 후 서독으로 돌아가 관련 기사들을 스크랩하였다.
김종대 기증
삼선개헌 저지 결의문
신민당 경북예천지구당 삼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 결성 당시 전단이다. 삼선개헌조지투쟁에 대한 각오와 투쟁의 방향성을 2개 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決 議 文
우리들 新民黨 慶北醴泉地區黨 全体 黨員은 오늘 共和黨의 朴政權이 國民主權에 對한 反民主的 逆謀를 도모 코져 三選改憲을 企劃하는 악날한 政治行却을 분쇄 沮止하기 爲하여 三選改憲沮止鬪爭委員會를 結成하면서 다음과 같이 決議한다.
① 民主歷史에 씻지 못할 反逆的 汚点인 三選改憲을 沮止함은 우리 郡民의 輿望이며 七百黨員의 使命임에 決死的 抗爭을 覺悟하여 鬪爭한다.
② 우리는 三選改憲을 沮止하기 爲하여 鄕土的 指導級 人事을 多數鬪爭隊列 앞에 迎立하여 鬪爭力을 强化하며 中央黨의 指示에 따라 凡國民的 鬪爭隊列을 整備하여 所期의 目的을 達成한다
③ 朴政權이 領導하는 共和黨中에서도 三選改憲 沮止에 앞장서는 良心的이며 歷史的 責任感이 있는 人事가 大多數 임을 同時代의 知性人으로서 환영하면서 그들의 健鬪을 祈願한다.
1969年 8月 19日
三選改憲沮止鬪爭委員會
慶北醴泉地區大會
신민당 선거 홍보물
1967년 야당 세력의 통합으로 창당된 신민당에서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신민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발간하였다. 부록에는 박정희 정부의 주요 부정사건들을 싣고 있다.
<6 · 8 부정선거 백서>
신민당에서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기간에 일어난 부정행위를 정리하여 발간하였다. 당시 막걸리와 고무신 등 금품을 살포하는 행위가 자행되었고 결국 민주공화당이 개헌선을 확보하여 삼선개헌의 기반을 놓았다.
남정현 소설 <분지>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된 단편소설로, 소설의 내용이 반미감정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작가가 연행되는 필화사건이 벌어졌다.
유신 홍보 포스터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각종 선전구호들과 통계자료를 실어 유신헌법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군정연장 발표 1963. 3. 20.
민정이양의 해 1963. 1. 1.
재건운동의 새로운 인사법 1961. 7. 29.
군사정부의 언론 검열 1961. 5. 24.
<고바우 영감> 원화
등록문화재 제538ㅡ1호
유신 요원 운영일지
충북 보은군 마로면 유신 요원의 활동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유신헌법을 홍보하는 사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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