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구 벨기에 영사관] 01

드무2 2023. 4. 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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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벨기에 영사관] 01

 

 

 

 

 

 

구 벨기에 영사관

 

지정번호 : 사적 제254호 / 시대 : 1905년 (광무 9)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059ㅡ13번지

 

이 건물은 1901년 한국과 벨기에 사이에 수호통상조약 (韓 · 白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후 세워진 벨기에 영사관이다. 1903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됐다.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2가 78번지 (현 우리은행 본점 사옥 위치)에 있었는데 1970년 도심재개발 사업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충무로 1가로 이전한 뒤 요코하마 (橫濱)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武官部) 관저 (官邸)로 쓰였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이 건물을 사들여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상업은행 (우리은행 전신) 사료관으로 사용하였다. 2004년 9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조 절충식 건물이다. 일본인 건축가 고다마 (小玉)가 설계하였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지었고, 건물의 외관은 당시의 일반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비대칭형이다. 현관 앞에 있는 두 개의 돌기둥과 발코니에 길게 늘어서 있는 돌기둥들은 고전주의적이다. 전면의 창 부분은 르네상스식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1, 2층에 설치된 베란다의 기둥들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 있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남서울미술관 건축 아카이브 상설전시

미술관이 된 舊벨기에영사관

 

구벨기에영사관, 잃어버린 근대사 복원의 열쇠

 

벨기에는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와 인연을 맺은 국가다. 그리고 116년이 흘렀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였던 시절, 우리는 주권을 지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우리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세계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찾은 해법이 중립국이었다. 그리고 중립국으로 가는 길에 동반자로 삼은 나라가 벨기에였다. 구벨기에영사관이 탄생한 이유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앞두고 중립국을 선언했음에도 대한제국의 중립국 정책은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짓밟혔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통해 주권을 지키려했던 광무황제 (고종)의 시도는 실패로 끝냇고, 중립국을 향한 노력도 역사 속에 묻혔다. 동시에 벨기에의 존재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사라졌다.

 

1977년 작지만 아름다웠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이 한국은행, 서울역 등 일인에 의해 건축된 식민지배의 증거물과 함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격동의 우리 근대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근대유산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구벨기에영사관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구벨기에영사관의 가치는 아름다운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국화'를 매개로 한 대한제국과 벨기에의 외교적 연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무지는 구벨기에영사관이 도심재개발사업으로 한강 남쪽 멀리 남현동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묻혔던 구벨기에영사관은 우리의 눈앞에서도 사라졌다.

 

1년전 화이트큐브에 갇혀 있던 구벨기에영사관의 역사적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남서울미술관의 기획전시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오늘의 상설전시로 이어졌다. 올해는 대한제국 출범한 지 120년을 맞이하는 해다.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제국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고, 나라를 빼앗기며 묻혔던 역사적 진실이 하나 둘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구벨기에영사관도 그 중 하나다. 우리는 남서울미술관으로 거듭난 구벨기에영사관을 통해서 잊혔던 역사의 연결고리를 되찾고, 되살아난 구벨기에영사관의 모습에서 우리 근대사의 현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안창모 (공동기획, 근대건축사)

 

 

 

 

 

 

이축 전 촬영된 벽난로의 원 모습 일부.

고전주의 건축의 양식적 특징이 간략하게 표현된 벽난로 장식 (mantel)의 특징을 갖고 있다.

 

 

 

 

 

 

6 · 25전쟁 직후에 구벨기에영사관이 담긴 서울시 전경과 1930년대 회현동의 도시적 맥락 속에서 재현된 영사관의 모습이 담김 3D 영상 (10분 14초)

 

 

 

 

 

 

 

 

 

1층 주 거실에 위치한 원형 기둥의 주두 (柱頭, 기둥머리) 부분이다. 로마시대부터 사용된 터스칸식 기둥 (Tuscan Order)으로 만들어졌다. 주두의 중심이 비었는데, 이는 실내 기둥이 구조적 기능이 없는 장식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잘려진 부재의 아래에는 장식적 효과와 착시방지를 위해 만들어졌던 세로 홈의 골줄이 보인다.

 

 

 

 

 

 

연혁 : 외교타운 정동과 벨기에영사관

 

 

 

 

 

 

벨기에를 모델로 중립국을 지향했던 대한제국의 역사는 정동과 덕수궁에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1883년 미국을 시작으로 벨기에에 이르기까지 각국 공관들이 위치하면서 정동은 외교타운이 되었으며 경운궁 (현 덕수궁)과 함께 근대한국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 늦게 정동에 합류했던 벨기에는 1905년 회현동에 공관을 새로 지어 이사했다. 영사관 신축은 양국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징적 건축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몰락으로 역사 속에 묻혔고, 1949년 벨기에와 국교가 회복되었음에도 공관의 존재는 복권되지 못했다. 본 연혁에서는 정동에서 회현동 그리고 남현동의 벨기에영사관이 담긴 역사를 정리했다.

 

 

 

 

 

 

벨기에영사관 건축

1901. 10.

벨기에, 서대문 안 여관 (旅館, 호텔)에 영사관 최초

설치 : 서울시 중구 정동 16ㅡ1

1901. 12.

벨기에, 서대문 밖 팔각정 근처에 영사관 임시 설치

1902. 11.

벨기에, 미국인 헐버트 [H. B. Hulbert, 訖法]씨 집을 비롯한 주변

가옥 매입 : 서울시 중구 회현동2가 78일대

1903. 9.

벨기에영사관, 토공사 시작

1904. 6. 16.

뱅카르 영사, 동대문 밖 창신동 영풍정 (暎楓亭)

뒷산에서 건축용 석재의 채굴권 요청 : 외부, 불가 통보 (1904. 6. 20.)

1904. 10. 12.

대한매일신보 광고에서 북륙토목회사 (北陸土木會社)의

벨기에영사관 공사수주 확인

 

 

 

정동에 처음 설치된 벨기에영사관 1901

 

 

 

1905.

벨기에영사관 준공

 

 

 

외교 · 역사

1876

1876. 12.

조선ㅡ일본, 조일수호조규 (朝日修好條規) 체결 : 개항

1882. 5.

조선ㅡ미국,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1883. 11.

조선ㅡ영국, 조영수호통상조약 (朝英修好通商條約) 체결

조선ㅡ독일, 조독수호통상조약 (朝獨修好通商條約) 체결

1884. 6.

조선ㅡ이탈리아, 조이수호통상조약 (朝伊修好通商條約) 체결

1884. 7.

조선ㅡ러시아,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체결

 

 

 

서대문 밖 청수관 (淸水館)의 일본 공사관, 1876 (수교)

 

 

 

정동의 미국 공사관, 1882 (수교)

 

 

 

정동의 영국 공사관, 1883 (수교)

 

 

 

남창동의 독일 공사관, 1883 (수교)

 

 

 

서소문동의 이탈리아 공사관, 1884 (수교)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 1884 (수교)

 

 

 

1885

1886. 5.

조선ㅡ러시아, 조로수호통상조약 (朝露修好通商條約) 체결

 

 

 

정동의 프랑스 공사관, 1886 (수교)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 1858 ㅡ 1916

 

 

 

 

1895

1900. 6.

일본 주재 벨기에 외교관, 대한제국에 통상조약 체결 제안

1900. 11.

벨기에 전권대신 (全權大臣) 레옹 뱅카르 [Léon Vincart, 方葛], 프랑스공사관을 통해

외부 (外部, 현 외교통상부)에 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외교문서 제출

외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한비통상조약을 위한

전권대신으로 임명

1901. 3. 23.

대한제국ㅡ벨기에, 한비수호통상조약 (韓比修好通商條約) 체결

1901. 10. 17.

한미수호통상조약 비준 (批准)

1903. 4. 2.

벨기에인 아데마르 델쿠안뉴 (Adhémar Delcoigne, 戴日匡), 내부 (內部, 현 행정자치부) 고문관으로 임명

 

 

 

벨기에 제2대 국왕 레오폴 2세 (Léopold II)

재위 : 1865 ~ 1909

 

 

 

대한제국 고종황제

재위 : 1863 ~ 1907

 

 

 

1905.

벨기에영사관 준공

 

 

 

벨기에영사관 머릿돌

총영사 L. 뱅카르

북륙토목회사 공사감독 M. 니시무라

기사 D. 고다마

1903 ㅡ 1905

출처 : 우리은행, 사당동 복구 후 사진첩

1905

 

 

 

1905

1909. 9.

뱅카르총영사 퇴임

1909. 8. 20.

제2대 총영사, 요세 브리보시아 (José Bribosia, 부레보쟈) 부임

 

 

 

미국 공사관에서 각국 공사들과 함께한 뱅카르총영사 (왼쪽에서 5번째)

1905

 

 

 

1915

1919. 10.

요코하마생명보험, 구 벨기에영사관으로 이전

1918.

벨기에 정부, 벨기에영사관 폐쇄

 

 

1935

1937 (추정).

본권번 (本券番, '권번'은 일제강점기 때 기생조합의 명칭),

구 벨기에영사관으로 이전

1944. 2. 13.

일본 해군무관부 (海軍武官府), 구 벨기에영사관

건물로 이전

 

 

 

1945

1949.

해군군악학교, 구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교사 (校舍)로 사용

1949. 12. 16.

공군본부, 구 벨기에영사관을 청사로 사용

1953.

해군, 구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헌병감실 등으로 사용

 

1949. 8. 16.

벨기에, 대한민국정부 공식 승인 : 미국 워싱턴 주재

벨기에 대사가 장면 (張勉) 주미대사에게 메시지 전달

1951. 1.

벨기에, 한국전쟁 참전

1961. 5. 2.

한국ㅡ벨기에 수교 (修交) : 비상주 (非常駐) 대사 교환 합의

 

 

1965

1968. 8. 14.

대창흥업 (한국상업은행의 방계기업),

구 벨기에영사관 일대 1,700평 매입

1965. 11. 1.

한국 정부, 주 벨기에 상주대사관 개설 :

주 유럽경제공동체 (EEC : European Economic Community) 대표부 겸임

1970. 2.

벨기에 정부, 주한 벨기에 대사관 설치 :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737ㅡ10

 

 

 

1975

1976. 12. 15.

문화재위원회, '현대여명기 양식 건물' 문화재 지정 심의

(구 벨기에영사관 등 8건) : 보류

1977. 2. 26.

문화재위원회, '현대여명기 양삭 건물' 문화재 지정 심의

(구 벨기에영사관 등 7건) : 가결

1977. 4.

한국상업은행, 문화재 지정에 따른 문제점 제기,

이전 (移轉) 3개안 건의

1977. 5. 12.

문화재위원회, 구 벨기에영사관 이전 결정 : 상업은행 건의안

중 제3안 [은행 소유의 타 공지 (空地)로 이전, 소유권은 상업은행] 채택

1977. 6. 29.

구 벨기에영사관, 사적 제254호로 지정

1979. 7.

문화재위원회, 이전 후보지 9개소 현지조사 :

신영훈 전문위원

 

 

1978. 6.

벨기에 알베르 왕자 [제6대 국왕 알베르 2세 (Albert II, 재위 : 1993ㅡ2013)], 1차 한국 방문

 

 

1979. 7.

문화재위원회, 이전장소 심의 : 서울시 관악구 사당동 541ㅡ1

(현 남현동 1059ㅡ13)로 결정

1979. 9. 27.

문화재관리국, 이전복원에 따른 지도위원 선정 :

최희순, 김수근, 최영희, 윤장섭, 김정기

1979. 10. 23.

문화재위원회, 이전 설계도면 [설계 : 삼성건축 (장기인)] 현장 검토

1980. 3. 13.

문화재위원회, 이전설계 심의

1980. 3. 19.

이전복원 공사 착공 [시공 : (주)신성]

1982. 3. 24.

구벨기에영사관 이전변경 및 동 보호구역 지정

1982. 8. 31.

이전복원공사 준공

 

 

 

 

 

 

 

 

 

1985

1986. 4. 16ㅡ18.

전두환 대통령, 유럽 4개국 순방 중 벨기에 방문

1989. 2.

한국 정부, 주벨기에대사관과 주유럽공동체 (EC : European

Community) 대표부 분리

1989. 6.

벨기에 알베르 왕세자, 2차 한국 방문

1992. 10. 12.ㅡ19.

벨기에 제5대 국왕 보두엠 1세 (Baudouin I, 재위 :

1951ㅡ1993)] 내외, 한국 방문

1992. 10. 31ㅡ11. 6.

벨기에 필리프 왕세자 [제7대 현 국왕 (Phillipe, 재위 : 2013~)]

1차 한국 방문 : 대전엑스포 '벨기에의 날' 행사 참석

 

 

 

1995

1993. 6.

주한 벨기에대사관, 구 영사관 내부 보수 후 대사관저

및 사무실로 사용계획

1995. 6. 30.

문화재위원회, 보수공사 심의 : 가결

1995. 8. 30.

지붕 및 창호 일부 보수공사 착공 [시공 : 삼환기업 (주)]

1995. 11. 17.

지붕 및 창호 일부 보수공사 준공

1999. 9.

주한 벨기에대사관, 구 영사관 건물 매입 및 이전계획

2001. 4.

한빛은행, 구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안성연수원 부지로

이전계획 : 문화재위원회 부결

2004. 2ㅡ3.

문화재위원회, 구 벨기에영사관 내부 리모델링 심의 :

조건부 가결

 

 

 

1995. 3. 13ㅡ14.

김영삼 대통령, 유럽 5개국 순방 중 벨기에 방문

1998. 9. 1.

주 벨기에대사관 및 주 유럽연합 (EU, European Union)

대표부 재통합

2000. 12. 11ㅡ16.

벨기에 필리프 왕세자 내외, 2차 방문 방문

2001. 3. 23.

한국ㅡ벨기에 수교 100주면

2009. 5. 9ㅡ14.

벨기에 필리프 왕세자, 3차 한국 방문

2010. 10. 3ㅡ6.

이명박 대통령,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AsiaㅡEurope Meeting) 참석차 벨기에 방문

2013. 11. 7ㅡ8.

박근혜 대통령, 서유럽 순방 중 벨기에 및

유럽연합 방문

 

 

 

벨기에 국왕 보두엥 1세 방한 기념 책자

1992

 

 

 

2004. 5.

우리은행, 서울시에 구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무상 임대

2004. 9. 2.

구 벨기에영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현 남서울생활미술관)으로 개관

2013. 3. 5.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을 삶의 양식에

접근하는 생활미술관 (Living Arts Museum)으로 전환

 

 

2015

2015. 12. 15.ㅡ2016. 2. 21.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생활미술관,

SeMA 근현대사프로젝트 I

미술관이 된 舊 벨기에영사관전 개최

 

 

 

개관 당시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위)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2004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개관기념 (아래)

한국 현대작가 초대전 도록

2004

 

 

 

 

 

 

舊벨기에영사관의 이축과 재탄생

Rebirth, The former Belgian Consulate

 

 

 

남산에서 바라본 구벨기에영사관과 시가지 전경

1920년대

ⓒ 안창모

 

 

 

구 벨기에영사관은 100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지만, 오랫동안 우리의 삶 밖에 있었다. 그 사이에 구 벨기에영사관은 자신의 터를 내주고 멀리 이사했고,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오늘의 전시는 상처뿐인 구 벨기에영사관 자체를 드러내고 있지만, 드러난 상처를 살피고 보듬으면서 구 벨기에영사관이 담고 있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함께 기억하고 치유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시작이다.

 

 

 

 

 

 

 

 

 

이축 전 현황 (1905 ~ 1979)

1905년에 준공된 구 벨기에영사관은 1918년 폐쇄된 이후 요코하마생명보험 (1919과 기생조합인 '본권번 (本券番)'을 거쳐 1944년 일본 해군무관부 건물로 사용 중 해방되었다. 해방 후 구 벨기에영사관은 해군군악학교, 공군본부, 해군 헌병감실을 거쳐 1968년 구 한국상업은행의 방계기업인 대창흥업에 불하되었으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방치되었다가 1977년 사적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해체 (1980)

1977년 5월 12일 국가사적으로 지정 직전에 이전이 결정되었으며, 구 벨기에영사관 터를 포함하는 일대가 재개발사업지구로 지정되었다. 1979년 현 남현동 1059ㅡ13으로 이전이 확정되었고, 삼성건축의 장기인과 장순용에 의해 실측설계와 이축을 위한 설계가 이루어진 후 벽돌과 석재 그리고 나무 하나하나가 모두 해체되었다.

 

 

 

 

 

 

 

 

 

이축 (1981 ~ 1982. 08)

회현동에서 남현동으로 옮겨진 구 벨기에영사관은 실측된 설계도면에 따라 복원되었다. 원모습대로의 이축 복원이 원칙이나, 활용도를 고려하여 2층 일부실이 통폐합되었다.

 

 

 

 

 

 

 

 

 

 

 

 

이축 후 현황 (1982. 09 ~ 현재)

1980년 3월 19일 이전복원 공사가 (주)신성에 의해 시작되어 1982년 8월 31일에 준공되었고 1982년 3월 24일에는 구 벨기에영사관에 대한 보호구역이 지정되었으나 남서울미술관으로 태어나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제 구 벨기에영사관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으로 역사를 증언하고, 오늘의 삶과 소통하는 미술관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도면

이축된 구 벨기에영사관은, 외관은 원모습이 유지되었으나 내부공간 중 2층은 활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일부 평면변경이 필요하다는 김수근의 의견에 따라 작은 실이 통폐합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2층 평면도 (변경 후 ) / 2층 평면도 (변경 전) / 1층 평면도 / 정면도 (위로부터)

 

 

 

 

 

 

 

 

 

 

 

 

 

 

 

 

 

 

 

 

 

 

 

 

 

 

 

모형, 2017

TM 새한 제작

 

현관과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자른

구 벨기에영사관의 내부가 펼쳐진 1 : 50 축소 모형

 

 

 

 

 

 

최신경성전도, 1907

1907년 발행된 지도로 1905년 회현동에 건축된 벨기에 (白耳義, 구 比利斯)영사관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신고전주의양식의 구 벨기에영사관은 목조건축으로 둘러싸였던 도심에서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이미지에는 영사관이 소개된 여러 매체의 자료가 담겨 있다.

 

 

 

'가사 (家舍)에 관 (關)한 조복문서 (照覆文書)'에 수록된 정동 (貞洞) 약도, 1908

 

정동의 건축현황에 대한 문의에 답하는 조복문서 (照覆文書)에 포함된 가장 오래된 정동 약도이다. 회현동에 영사관을 신축하기 전, 정동에 있응 당시 벨기에 (比利斯)영사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축 사진, 1979 ~ 1982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에 수록된

한비수호통상조약 (韓比修好通商條約), 1901

 

 

 

 

 

 

 

 

 

 

 

 

 

 

 

 

 

 

 

 

 

1901년 중립국을 지향했던 대한제국이 모델로 삼았던 중립국 벨기에와 체결한 수호통상조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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