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1

드무2 2023. 8. 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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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1

 

 

 

 

 

 

 

 

 

조전비 탁본

 

조전비는 조전 (曹全)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이다. 조전은 돈황의 명문가 출신으로, 한나라 합양 (郃陽)의 현령 (縣令) 벼슬을 지냈다. 그래서 본래 명칭은 '한합양령조전비 (漢郃陽令曹全碑)' 라고도 한다. 명나라 (明, 1368 ~ 1644) 때 섬서성 (陝西省) 합양현 (郃陽縣, 오늘날 허양현 (合陽縣))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서안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전비는 한나라 비석 중 보존 상태가 제일 완벽하다. 비문의 자간과 행간이 균형감있게 배치되고 글꼴이 수려하여 역대 서예가들이 예기비와 함께 대표적인 예서 (隸書) 글씨본으로 삼는다.

청나라의 만경 (萬經)은 조전비에 대해서, "수려한 아름다움과 날아오를 듯한 생동ㄱ감이 있어 속박되지 않으며 분방하지도 않아 진실로 신품 (神品)의 경지이다. (秀美飛動, 不束縛, 不馳驟, 洵神品也.)" 라고 극찬하였다.

 

[김은희]

 

 

 

 

 

 

 

 

 

 

 

 

지주중류비

 

지주 (砥柱)는 황하 (黃河)의 중류에 기둥처럼 솟아있는 작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지주산은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의 격류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우뚝하게 솟아나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였다.

지주중류비는 류운룡 (柳雲龍, 1539 ~ 1601)이 인동현감으로 부임한 후, 야은 (冶隱) 길재 (吉再, 1353 ~ 141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길재는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방원 (李芳遠)이 벼슬을 내려 중히 쓰려고 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글을 올리고 사퇴한 후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마침 길재의 묘소에 참배하러 왔던 류운룡이 지주중류 (砥柱中流)의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 절개를 크게 헌양하였다.

비석의 앞면에는 중국 사람 양청천 (楊晴川)이 썼다고 하는 '砥柱中流 (지주중류)' 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어 주변을 압도한다. 또한 비석의 뒷면에는 명재상 류성룡 (柳成龍, 1542 ~ 1607)이 지은 '야은선생지주비음기 (冶隱先生砥柱碑陰記)' 가 새겨져 있어 길재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비석은 1587년에 처음 세웠고, 1789년에 다시 세웠다.

 

[박준호]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 탁본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는 금나라 황제의 동생인 도통경략 낭군의 여행 기록이라는 뜻이며, 보통은 「낭군행기」로 줄여서 부른다.

이 비석은 원래 당나라 측천무후 (則天武后, 624 ? ~ 705)의 비석으로, 글자가 없는 무자비 (無字碑)였다. 금나라 시대에 와서, 거란문자와 한자가 비석에 나란히 새겨졌다. 비액 (碑額)은 3행 4자씩 '大金皇弟 / 都統經略 / 郎君行記' 가 전서체 (篆書體)로 쓰였다. 비문의 앞부분은 먼저 5행 16 ~ 26자씩 96자가 크게 새겨졌고, 이어서 약간 작게 12자가 더 새겨져 모두 108자의 거란 소자가 새겨졌다. 비문의 뒷부분에는 한자 해서체 (楷書體)로 6행의 번역문이 있다.

청나라 금석학자 전대흔 (錢大昕)은 그의 저서 『잠연당금석문발미 (潜研堂金石文跋尾)』에서 금나라 태종 황제의 동생인 완안살리갈 (完顏撒离喝)이라고 고증하였다. 근대에 와서 이 비문과 같은 내용을 새긴 비석 파편이 주위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지인들은 금나라 김올충 (金兀术)의 비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낭군행기」 탁본은 비록 최근의 것이지만, 문자학적으로는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낭군행기」의 거란 소자는 오랫동안 여진 문자로 알려져 왔으나, 후대 연구에서 거란 소자로 밝혀졌다. 또한 비석은 거란 문자 해독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 이유는 비석에 훼손된 글자가 없으면서 문장이 비교적 길고, 내용 중에 인명 · 지명 · 관직명 등 전문용어가 많으며, 당시에 한문 번역문을 같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문 문장과 거란어 문장은 말의 순서가 다르므로 한문을 그대로 번역해서는 거란어 문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최근의 연구는 몽골어 문장으로 비문의 거란 문자를 풀이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성규]

 

 

 

 

 

 

 

 

 

 

 

 

둔황석굴 육자진언비 탁본

 

육자진언 (六字眞言)이 여섯 종류의 문자로 기재된 둔황석굴 (敦煌石窟) 비문 (碑文)의 탁본이다. 육자진언은 '옴마니밧메훔' 의 여섯 글자로 된 불교의 주문을 가리킨다. 이 주문을 외우면 모든 죄악이 사라짐과 동시에 공덕이 생겨난다고 한다. 주문은 티베트와 몽골의 라마교도가 하였던 관세음보살의 진언으로, '아, 연화 (蓮華) 속의 보주 (寶珠)여.' 라는 의미이다.

비석은 중앙에 위치한 보살상을 중심으로 상단과 좌우측에 각각 두 종류씩 모두 여섯 종류의 문자로 구성되었다. 상단의 첫째 행은 란차문자 (Lantsa script), 둘째 행은 티베트문자이다. 우측의 오른쪽 행은 한자, 왼쪽 행은 서하문자이다. 좌측의 오른쪽 행은 파스파문자, 왼쪽 행은 위구르문자이다.

여섯 종류의 문자는 서사 (書寫) 방향에 의해 정리되었다. 상단은 인도계 문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하였다. 우측은 한자계 문자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를 하였다. 좌측은 소그드계 문자 및 그 영향을 받은 문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쓰기를 하였다. 중국 서부의 둔황은 예로부터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비석에 기재된 여섯 문자는 각각 아랍지역, 인도지역, 동아시아지역에서 비롯된 문자이다. 따라서 다민족 문화가 교차되는 지역적 특색을 잘 반영하는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박준호]

 

 

 

 

 

 

 

 

 

 

 

 

경원 여진자비

 

경원 여진자비는 함경북도 경원 (慶源) 동원면 (東原面) 화동 (禾洞)의 옛 절터에 있던 여진문자 비석이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위촉한 고적 조사위원 도리이 류조 (鳥居 龍蔵, 1870 ~ 1953)가 비석을 발견하였고, 191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이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비석은 사면 모두에 여진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관련 자료의 유형으로는 유일하다. 해독 가능한 비문의 여진문자는 대략 575자 정도이며, 전체 비문은 아직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다.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사찰을 건립하는 과정과 그 건립에 공덕을 베푼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글자와 인명 · 지명 · 관직명 · 어휘 등이 비문을 통해 새롭게 소개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연구자들에 따라 1138년, 1141년, 1156년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비석에 사용된 여진문자도 연구자들에 따라 여진 대자, 여진 소자, 여진 대자와 소자의 합용으로 보고 있으며, 이 부분은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김동소]

 

 

 

 

 

 

 

 

 

 

 

 

 

 

 

 

 

 

나라 야쿠시사 불족적가비 탁본

 

불족적가비는 일본 나라시 (奈良市) 야쿠시사에 있는 노래비로, 부처의 족적 (足跡, 발자국)을 기리는 시가 새겨졌다. 이 노래는 부처의 발자국을 돌에 새긴 불족석 (佛足石) 주위를 돌면서 기도를 드릴 때 읊조리던 노래로 추정된다.

부처 열반 이후 무불상 (無佛像) 시대에 부처의 족형 (足形)을 돌에 새긴 불족석을 숭배하였다. 불족석이 일본에 전래된 경위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에 현존하는 불족석은 약 107개가 확인되고 있으며, 야쿠시사의 불족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에도 시대에 제작되었다. 불족적가비는 불족석과 함께 야쿠시지 경내 대강당 (大講堂)에 안치되어 있다. 불족석은 측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753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불족적가비의 성립 시기는 노래의 내용과 문자의 특장 등을 근거로 761년에서 770년 경으로 추정한다.

불족적가비에는 21수의 노래가 만요가나 (萬葉假名)로 새겨졌다. 비석의 상단에 11수, 하단에 10수가 새겨졌으나, 상하단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11번째와 21번째 노래는 마모되어 일부 판독이 불가능하다.

1번째부터 17번째까지의 노래는 부처의 족적을 기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고, 2번째 노래 위 여백에 부처의 족적을 기린다는 의미의 '모불적 (幕佛跡)' 이라는 표제가 새겨졌다. 18번째부터 21번째까지의 노래는 생사로 번뇌하는 세상을 책망하며 무상감을 그렸으며, 18번째와 20번째 노래 위 여백에 각각 '가책생 (呵責生)' 과 '사 (死)' 라는 표제가 적혔다.

불족적가비는 고대 일본의 만요가나 표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통일 시대에 성립한 최고 (最古)의 가집 (歌集)인 『만요슈 (萬葉集)』는 한자의 음을 따서 표기하는 '음가나 (音假名)' 와 뜻을 따서 표기하는 '훈가나 (訓假名)' 가 특별한 규칙 없이 혼재하나, 불족적가비는 '음가나' 로만 표기되었다. 하나의 음을 여러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 특정 한자로 통일된 표기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예시 : あ [a] = 阿, く[ku] = 久, す [su] = 須 등), 청음과 탁음을 구분해서 한자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 (예시 : た [ta] = 多, だ [da] = 太, ふ [hu] = 布, ぶ [bu] = 夫 등)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김미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6세기 중반, 영토를 확장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신하들과 두루 살피고 북한산 비봉에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을 세운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55년 (진흥왕 16) 진흥왕이 북한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에 근거해 그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석은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상단부가 마멸되어 새겨진 내용을 완벽하게 복원하기는 어렵다. 비신 (碑身, 비몸돌) 상단부에 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석 (蓋石, 덮개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다. 비신은 북한산 비봉 자연 암반을 파내고 받침돌 위에 설치되었다.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두 동강난 채 비봉 서쪽 30㎞ 밖에 방치되어 잇었으며, 비석 뒷면의 여러 구멍은 한국전쟁 때 총탄 흔적이다. 현재 비석은 보존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관리되고 있으며, 원래 자리에는 복제품이 설치되었다.

비석 오른쪽 측면에는 조선시대 추사 (秋史) 김정희 (金正喜, 1786 ~ 1856)가 두 번에 걸쳐 비석을 실사하고 새긴 먕문이 있다.

 

(1) 이는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 (1816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보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2) 정축년 (1817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겨진 68자를 해독하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비록 마멸이 심하지만, 비석의 내용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순수비와 남아있는 글자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비문은 제목, 순수하게 된 경위, 왕을 수행한 관리들의 명단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6세기 신라 영토 팽창 시기인 진흥왕시대 정치 상황과 당시 신라의 문자 생활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용현]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성주사 (聖住寺)에 주석했던 낭혜화상 (朗慧和尙) 무염 (無染, 801 ~ 888)이 입적하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전체 높이가 486.6㎝에 달하는 신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 (崔致遠, 857 ~ ?)이 비문을 지었고, 최인연 (崔仁兗, ? ~ ?)이 썼다. 낭혜화상이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 (진성여왕 4)에 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비석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924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문을 지은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7년 만에 당나라의 빈공과 (賓貢科)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하였다. 특히 황소의 난 때 지은 『격황소서 (擊黃巢書)』는 명문으로 알려졌다. 29세 때 신라에 돌아와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골품제에 기반한 신분 체제의 한계와 문란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결국 은둔의 길을 택하였고, 908년 이후 세상을 떠났다.

최치원이 지은 대표적인 비문을 사산비명 (四山碑銘)이라고 한다. 4개의 비석은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쌍계사 (雙磎寺) 진감선사탑비 (眞鑑禪師塔碑), 초월산 (初月山) 대숭복사비 (大崇福寺碑), 봉암사 (鳳巖寺) 지증대사탑비 (智證大師塔碑)이다. 이 중 진감선사탑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글씨도 썼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신라 석비의 전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한자가 유입된 이후, 우리 땅에서 완벽하게 채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박준호]

 

 

 

 

 

 

 

 

 

 

 

 

 

 

 

 

 

 

 

 

 

 

 

 

 

 

 

 

 

 

지주중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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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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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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