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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0

드무2 2023. 8. 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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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0

 

 

 

 

 

 

昔者苍颉作书,而天雨粟,鬼夜哭

옛날에 창힐이 문자를 만들자, 하늘에서 곡식 비가 내리고, 귀신이 밤새 울었다.

 

『회남자 (淮南子)』 중에서

 

 

 

옛날에 임금께서 언문 스물여덟 자를 친히 만드셨다.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한자, 문자가 간직한 오랜 역사

 

한자는 3,3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오랜 역사를 지닌 문자이며, 글자 수가 수만 자 이상에 이르는 대표적인 표의문자 表意文字이기도 하다.

한자의 형태는 발생 시기, 기록하는 매체, 구조적 특징에 따라 수천 년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하였다. 그 변화 과정은 갑골문 甲骨文, 금문 金文, 소전 小篆, 예서 隸書, 해서 楷書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해서가 바로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하는 한자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한때 한자의 복잡한 형태는 중국이 서구보다 낙후된 근본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1950년대에는 한자의 형태를 개선하려는 문자 개혁이 중국 정부의 주도로 추진되었고, 형태가 복잡한 일부 상용한자는 간략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것이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화자 簡化字이다.

한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북방 유목 민족을 포함, 한국 · 일본 · 베트남 등 주변 지역에 전파되어 거대한 문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국 주변의 여러 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한자에 기반한 새로운 문자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연구자 노트

 

○ 사용 시기 : 기원전 14세기경 ~ 현재

○ 사용 지역 : 중국, 한국, 일본 등

○ 기록 언어 : 중국어, 한국어와 일본어 어휘

 

중국 고대에 문자를 뜻하는 명칭으로서 서계 (書契), 명 (名), 서 (書), 문 (文), 자 (字) 등이 쓰였으며, 진나라 (秦, 기원전 221 ~ 기원전 207) 시기에 문자 (文字) 라는 명칭이 출현하였다. 중국의 문자를 지칭하는 한자 (漢字)는 당나라 시기의 불교 문헌에 처음 출현한다. 지금은 한어 (漢語, 중국어) 를 기록하는 문자로서 한자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중문 (中文) 이나 화문 (華文)으로도 쓰인다.

 

한자는 고대에 한국 · 일본 · 베트남 등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한자라는 공동의 문어 (文語)를 매개로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시킨 한자문화권 (漢字文化圈)이 형성되었다. 한자를 모태로 자민족의 언어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문자가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한자계 문자 (漢字系文字) 라고 한다.

 

한자의 제자 원리에는 상형 (象形), 지사 (指事), 회의 (會意), 형성 (形聲) 등이 있다. 상형은 지시 대상의 형상을 간략하게 본떠 문자 형태로 나타내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 밖에도 지시 대상을 본뜬 문자가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지 못할 때, 기존 글자와 결합하여 글자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지사는 추상적인 의미를 간단한 부호로 표기하거나 의미를 지시하는 부호를 부가하여 글자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회의는 두 글자의 형태와 의미를 조합하여 새로운 글자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형성은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와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를 결합하여 새로운 글자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한자의 형태는 수천 년 동안 점진적으로 연속성을 갖고 변화했다. 그 변화 과정은 일반적으로 발생 시기, 기록 매체, 구조적 특징에 따라 갑골문 · 금문 · 소전 · 예서 · 해서 등으로 구분된다.

 

갑골문은 거북의 껍질 (甲)과 짐승의 뼈 (骨)에 새겨진 문자이며, 대부분 상 (商) 왕실의 점복 (占卜) 내용을 기록하여서 복사 (卜辭)라고도 한다. 칼로 새긴 문자이므로 형태에서 선의 이음새가 상대적으로 날카롭다. 금문은 서주 (西周) 시대의 대표적인 문자이며 청동기에 주조하거나 새겨진 문자라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는 주로 제사에 사용하는 예기 (禮器)이며, 선조의 공덕을 칭송하거나 공적을 세워 왕께 하사받은 책명 (策命) 등이 기록되었다. 갑골문보다 글자를 구성하는 선이 굵고 이음새가 부드럽다. 갑골문과 금문은 한 글자를 다양한 형태로 쓰는 일자다형 (一字多形)이지만, 진나라의 문자 통일 정책으로 제정된 소전 (小篆)은 형태가 한 가지로 고정되었고 글자를 구성하는 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부드러운 곡선을 특징으로 한다.

 

진나라에서 행정문서 처리의 편의를 위해 일종의 관청 필체로 형성된 예서는 한나라 (漢, 기원전 206 ~ 기원후 220)의 공식 서체가 되었다. 예서는 기본적으로 소전을 계승하였으나, 글자의 구성에서 크게 두 가지 형태 변화가 나타났다.

 

첫 번째 변화는 필획 (筆劃)이다. 소전에 나타나는 곡선은 예서 시기에 직선화되었고, 굵기가 일정했던 필선 (筆線)은 점진적으로 가로획 · 세로획 · 삐침 · 파임 등과 같이 필획의 쓰기 방향과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되었다. 두 번째 변화는 편방 (偏旁)이다. 소전에서는 한 글자가 다른 글자에 구성되면 상하좌우의 위치가 달라도 형태는 같았지만, 예서에서는 같은 글자라도 구성된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心 (심)이 글자의 왼쪽에 위치하면 '情 (정)' 과 같이 '忄' 의 형태로 쓰이고, 아랫부분에 위치하면 '恭 (공)' 과 같이 '㣺' 의 형태로 쓰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일부 글자들이 다른 글자에 구성될 때 나타나는 변형된 형태는 점차 고정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서 이후에 좀 더 쓰기 편하고 반듯하게 가다듬어진 서체가 위진 (魏晉) 시대에 형성된 해서이다. 해서는 '본보기 서체' 라는 의미를 지니며, 한자 서체 변화의 종척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한자 서체의 모범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50년대에 중국 정부는 자주 사용되는 상용자이지만 획수가 많아서 형태가 복잡한 글자를 간략한 형태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한자를 간화자 (簡化字)라고 한다. 간화자에는 고대부터 전승된 속체 (俗體) · 초서 (草書) · 행서 (行書) 등 옛 서체에서 취한 글자가 많다.

 

[김은희]

 

 

 

 

 

 

 

 

 

 

 

 

석고문 탁본

 

 

 

석고문

한자, 기원전 5 ~ 3세기 / 청 (淸, 1616 ~ 1912년) 후기

 

 

 

 

 

 

 

 

 

조전비 탁본

 

 

 

 

 

 

 

 

 

석고문 탁본

 

 

 

 

 

 

고궤 탁본 / 과부기정 탁본

군부궤 탁본 / 사환부궤 탁본

 

 

 

 

 

 

 

 

 

 

 

 

 

 

 

 

 

 

 

 

 

 

 

 

 

 

 

예기비 탁본

 

 

 

 

 

 

 

 

 

 

 

 

대금황제도통경략낭군행기 탁본

 

 

 

 

 

 

 

 

 

 

 

 

 

 

 

 

 

 

 

 

 

나라 야쿠시사 불족적가비 탁본

복제품

 

 

 

 

 

 

 

 

 

 

 

 

 

 

 

 

 

 

과부기정 탁본

 

청동으로 제자괸 삼족정 (三足鼎)의 내벽에 주조된 명문의 탁본이다. 과부기정 (戈父己鼎)은 과 (戈) 족의 조상 기 (己)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예기 (禮器)이다.

 

[김은희]

 

 

 

 

 

 

사환부궤 탁본

 

청동으로 제작된 제기 궤 (簋)의 바닥과 뚜껑 안쪽 면에 주조된 명문의 탁본이다. 바닥과 뚜껑 안쪽의 명문 내용은 동일하다. 사환부 (師寏父)가 숙길 (叔姞)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예기이다.

 

[김은희]

 

 

 

 

 

 

 

 

 

 

 

 

 

 

 

 

 

 

석고문 탁본

 

석고문은 돌에 새겨서 전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고는 돌 (石)로 만든 북 (鼓) 이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북을 닮아서 붙여졌다. 또한 사냥에 관한 내용이어서 엽갈 (獵碣) 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고문 원석은 7세기에 기주 (岐州) 옹성 (雍城, 오늘날 산시성 (陕西省) 바오지시 (寶鷄市) 펑샹구 (鳳翔區) 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며, 현재는 북경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석고문 원석은 모두 10점으로, 주로 국왕이 사냥하는 모습을 읊은 시가 새겨졌다. 발견 당시에는 700자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바오등으로 270자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석고문의 서체는 대전 (大篆) 으로 진나라 시황제가 제정한 전서의 표준 서체인 소전 (小篆) 의 모체로 여겨진다.

각 석고의 이름은 첫 구절의 두 글자로 붙이고 있으나, 그 순서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궈모뤄 (郭沫若) 의 설을 따르면, 견면 (汧沔) · 영우 (靈雨) · 이사 (而師) · 작원 (作原) · 오수 (吾水) · 거공 (車工) · 전거 (田車) · 난거 · 전거에 글씨가 잘 남아 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석고문 탁본은 선봉본 (先鋒本), 중권본 (中權本), 후경본 (後勁本) 으로 불리는 북송 (北宋) 시대의 탁본 3점으로 모두 일본에 있다.

이 탁본에는 『桂叢仙館 (계총선관)』, 『江寧孫宸景風氏珍藏 (강녕손신경풍씨진장)』, 『景風廿年精力所至 (경풍입년정력소지)』, 『景風審定 (경풍심정)』, 『景風所得金石 (경풍소득금석)』 의 인장이 찍혀 있다. 모두 탁본을 소장하고 감상한 청나라 사람 손신 (孫宸, 字 (자) 景風 (경풍)) 의 인장이다.

인장을 통해 탁본 시기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석을 탁본한 그대로 전하고 있어서 원석의 마모 정도를 알 수 있는 중요 편년 자료이다.

 

[배규하]

 

 

 

 

 

 

 

 

 

 

 

 

 

 

 

 

 

 

 

 

 

 

 

 

 

 

 

 

 

 

 

 

 

고궤 탁본

 

청동으로 제작된 제기 궤 (簋)의 몸체와 뚜껑의 안쪽에 주조된 명문의 탁본이다. 고 (詁)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예기이다.

 

[김은희]

 

 

 

 

 

 

군부궤 탁본

 

청동으로 제작된 제기 궤 (簋)의 뚜껑 안쪽 면에 주조된 명문의 탁본이다. 군부 (君夫)가 국왕의 음덕을 찬양하며, 문부정 (文父丁)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예기이다.

 

[김은희]

 

 

 

 

 

 

 

 

 

 

 

 

 

 

 

예기비 탁본

 

예기비는 노나라 재상인 한칙 (韓勅)이 공자묘 (孔子廟)를 수리하고 예기 (禮器)를 정리한 공적을 칭송한 비이다. 비석의 뒷면과 좌우 양면에는 비석을 세울 당시 기부한 관리의 이름과 금액이 새겨져 있다.

후한 시대 후기는 예서 (隸書)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 주는 팔분예 (八分隸)의 최고 전성기이다. 예서는 물결 모양의 파책 (波磔)이 있고 없고에 따라 고예 (古隸)와 팔분예로 구분한다. 당나라 때 장회관 (張懷瓘)과 이양빙 (李陽氷)은 글자의 형태가 팔자 (八字)와 같아서 팔분 (八分)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였다. 당시 팔분예 비석 중에서 예기비는 그 전형적인 형태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명 · 청 시대의 여러 학자도 예기비를 예서의 최고봉으로 논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탁본은 예기비의 우측면으로, 조선시대 역관이었던 역매 (亦梅) 오경석 (吳慶錫, 1831 ~ 1879)이 소장하던 것이다. 탁본의 아래에는 오경석이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있다.

 

[박준호]

 

이것은 한나라 영수 2년 (156년) 노나라 재상이었던 한칙 (韓勅)이 세운 공묘 예기비의 우측이다.

필법은 정교하지만 좋은 탁본이 아니어서 애석하였는데, 작은 소품이라 하더라도 족히 감상할 만은 하다. 당나라의 예서 명필이었던 한택목 (韓擇木)이나 채유린 (蔡有鄰)과 같은 사람들은 꿈에서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右漢永壽二 (年), 魯相韓勅造, 廟禮器碑右側也. 筆法工妙, 惜非精  , 然吉光片羽, 尙足愛玩, 如唐之韓擇木蔡有鄰輩, 所不能夢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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