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3
세상을 바꾼 기술, 인쇄술
처음 만들어진 문자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와 지식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민 계층이 성장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문자가 필요해졌다. 능러난 문자 수요는 다양한 독서층을 형성하며 그대로 인쇄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쇄술은 문자를 종이 등에 담아서 다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이다. 인쇄술을 통해 다수의 사람이 손쉽게 문자를 접할 수 있었다. 소수의 사람만 누리던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전수되었고, 지식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인쇄술은 중세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촉매가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여 상용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통치에 필요한 서적뿐 아니라 민간의 실용서까지 다양한 책을 보급할 수 있었다,
세상을 바꾼 기술, 인쇄술
1) 서양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 1400 ~ 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15세기 유럽은 새로운 변화의 시기였다.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면서 중세의 신분 질서는 흔들렸다.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층과 대학을 중심으로 문자와 서적 수요가 폭증하였다. 필사된 책으로는 더 이상 서적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서적 수요의 증가라는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인쇄술은 중세 유럽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기폭제이자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촉매였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성서 해석이 인쇄 사적과 팸플릿으로 유통되었다. 16세기 독일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간 종교개혁은 이러한 인쇄술의 결과였다. 인쇄된 성서는 신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직접 전해주었고, 종교 팸플릿은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을 곳곳에 전파하였다. 성서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역의 언어로 인쇄되었다. 자국어 성서는 자국어를 익히는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인쇄술은 유럽 주요 지역의 언어를 표준화하고 고유어 사용을 촉진하여 민족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17세기 과학혁명도 인쇄술의 영향이 컸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과학의 데이터는 인쇄술을 통해 복제되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의 사상이 책으로 전파됨으로써 근대 사회를 규정하는 합리적 사고방식 역시 확산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대량 생산된 책은 독자들의 사고방식을 동질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지배권력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독서 인구의 확산, 인쇄술의 발전, 분자를 통한 지식의 습득으로 근대적 독자가 탄생하였다. 17세기에 이미 유럽에서는 정기간행물이 발행되었고, 18세기에는 수천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일간지가 등장하였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으로 인쇄 속도가 더 빨라지고 일간지의 가격도 저렴해졌다. 대량 생산된 신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력이 되었고, 그 편집 정책은 대중 여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2) 한국
현존하는 고려시대 인쇄본은 대장경을 포함하여 대부분 불경이나 불교 관련 서적이다. 당시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인쇄 서적의 수요층은 귀족이나 승려들이었다. 또한 서적 간행의 목적도 독서이기보다는 신앙의 일환이었다.
고려말에 이르러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도입하면서 성리학 서적들이 인쇄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조선은 유교 국가를 표방했다. 조선의 통치 기반을 마련한 태종은 책을 수시로 찍어 보급하기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의 왕들도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보급함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통치에서 인쇄술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은 통치에 필요한 서적뿐 아니라,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실용서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지방 관아에서 출판하고 보급하였다. 따라서 서적의 상업적 출판과 유통은 19세기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목판이나 활자로 책을 인쇄하기도 했지만, 역시 판매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에서 출판한 책은 주로 개인의 문집이나 족보, 유교 서적 등이었는데, 혈연 · 지연 · 학연을 기반으로 한 여러 집단의 공동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인쇄한 후 나누어 갖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출판 방식은 정치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집단 간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1년 일본으로 간 신사유람단은 인쇄소 등을 시찰하고 근대 인쇄술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일본으로부터 신식 납활자 인쇄술을 도입하였다. 1883년 통리아문 산하에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 (博文局)이 설치되었다. 10월 1일 신식 납활자와 인쇄기를 이용하여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발간되었다. 이후 근대 납활자는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서적 출간에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근대 인쇄술은 서양의 근대 사상을 보급하는 통로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전후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신문과 서적 발행에도 활용됨으로써 항일 민족 운동의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재정]
구텐베르크 인쇄기
복제품
월인천강지곡 금속활자 인판
임인호 복원품
월인천강지곡
복제품
직지 권하 금속활자 인판
임인호 복원품
백운화상 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 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은 현전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보통 줄여서 『직지 (直指)』라고 한다.
고려의 승려 백운화상 (白雲和尙) 경한 (景閑, 1299 ~ 1374)이 원나라 승려 석옥청공 (石屋淸珙, 1272 ~ 1352)으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과 여러 문헌에서 선 (禪)의 깨달음에 관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것을 제자 석찬 (釋璨) 등이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내용은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을 모은 것이다. 원래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는 하권만 남아 있으며, 첫째 장은 없어졌다. 책의 마지막에는 '선광 7년 7월 청주목 교외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다. (宣光七年 丁巳 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 라는 인쇄 기록이 있다.
'선광'은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중원을 뺏긴 후 명나라 영토 북쪽에 일시 세웠던 왕조인 북원 (北元)의 연호로, 선광 7년은 1377년이다. 이 인쇄 기록에 근거하여 『직지』가 1377년 청주에 있던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임을 알 수 있다. 문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늦어도 13세기에 고려의 중앙 정부에서는 금속활자를 이용해 서적을 인쇄했다.
『직지』는 중앙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방까지 확산되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금속활자는 형태가 고르지 않고, 조판기술도 곳곳에서 미술한 점이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를 발명하고 이를 상용화 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직지』는 프랑스의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콜랭 드플랑시 (Collin de Plancy, 1853 ~ 1922)가 수집한 고서적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앙리 베베르 (Henri Vever, 1854 ~ 1943)가 소장하다가, 1950년경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직지』의 존재는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 1865 ~ 1935)이 1901년 발행한 『한국서지』 보유판에 소개되었으나, 실물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International Book Year)' 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재정]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은 세종 (世宗, 재위. 1418 ~ 1450)이 수양대군이 편찬한 부처의 일대기 『석보상절 (釋譜詳節)』을 보고 부처의 생애를 칭송하며 한글로 지은 노래이다.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든 한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다.
1446년 (세정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 (昭憲王后, 1395 ~ 1446)가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아들 수양대군에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행적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부처의 전기를 모아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한글로 번역해 이듬해에 세종에게 올렸다. 세종이 이를 보고 부처의 일대기를 한글 노래로 짓고, 책 이름을 『월인천강지곡』이라 하였다. '달빛이 천 개의 강에 비추듯 부처의 자비가 모든 중생을 비춘다'는 뜻이다. 상 · 중 ·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었고, 한 수는 두 구절로 이루어졌다. 현재 1 ~ 194수로 이루어진 상권 1책과 『석보상절』에 섞여 있는 중권 일부의 노래만 전한다.
이 책은 한글 위주로 표기하고, 한자어의 경우 한글 오른쪽 아래 작은 활자로 음을 단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한글로 한자음을 먼저 쓰고 한자를 나중에 쓰는 한글ㅡ한자 병기 방식의 시초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 (月印釋譜)』에서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쓰고, 그 아래 작은 글자로 한글음을 단 것과 대조된다. 그렇지만, 이후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부분의 언해본은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체제를 따랐다.
또한 이 책을 찍는 데 사용한 한글 금속활자는 가로획과 세로획이 직선인 돋움체 계통이다. 한글 돋움체의 큰 활자는 지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작은 글자의 한자와 대비되는 큰 글자의 한글을 사용한 인쇄 방식에서 한글에 대한 세종의 애착과 존중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한글 표기 방식은 한글 창제 당시의 자모음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 (아래아)가 단독으로 쓰일 때 원으로 표기되지만, 'ㅣ'나 'ㅡ'와 결합할 때 직선으로 표기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같이 간행된 『석보상절』의 한글 표기 방식과 다른 점이 있어, 한글 표기 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정]
구텐베르크 성서의 『여호수아서』
구텐베르크 42행 성서 인판
드레스덴 학 드루쿨린 전통인쇄소 복원품
구텐베르크의 「여호수아서」
『구텐베르크 성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 1400 ~ 1468)가 발명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성서이다. 본 성서는 1,282쪽 분량의 완본 성서에서 「여호수아서」 만을 담고 있다. 한 면이 42행으로 이루어져 『42행 성서』라고도 불린다. 별이 달린 막대를 거리에 이고 있는 황소 모양의 워터마크가 표시된 종이로 인쇄하였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1454년경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공방에서 제작되었다. 구텐베르크는 동료인 페터 쇠퍼 (Peter Schoeffer), 투자자인 푸스트 (Fust) 그리고 20여 명의 인쇄공의 도움으로 약 180부의 성서를 제작하였다. 150부는 종이에, 30부는 양피지에 인쇄하였다. 이 중에서 현재 49부가 전한다. 동시대에 많이 사용된 서체인 텍스투라 (Textura)를 모방하여 활자를 제작하였다. 문장 시작 부분의 두문자 (頭文字)는 인쇄하지 않은 채 판매되었다. 구매자가 두문자를 포함하여 표제와 장식 등을 했기 때문에 같은 인쇄본이라도 모양이 달랐다. 값비싼 책일수록 장식이 화려하였으며, 이런 방식 역시 필사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구텐베르크 성서』의 텍스트는 1270년 파리 대학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개정판 『불가타 (Vulgata)』를 원전으로 하였다. 그 이후 제작된 성서의 모든 인쇄본은 더 이상 필사본 성서를 원본으로 하지 않고, 『구텐베르크 성서』를 사용했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1462년 푸스트와 쇠퍼에 의해 인쇄된 성서, 1471년 로마에서 아르놀트 파나르츠 (Arnold Pannartz)에 의해 인쇄된 성서 등의 원본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신학자들은 『구텐베르크 성서』를 성서 편찬의 전환점이자 전승의 종착지로 여긴다.
『구텐베르크 성서』는 필사본에 비해 제작 속도가 빨랐지만, 수공으로 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많이 제작할 수 없었고 값도 비쌌다. 그러나 이로부터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었던 성서가 인쇄되었고, 본격적인 상업 출판이 시작되었으며, 궁극에 지식 정보의 대중화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최경은]
구텐베르크가 인쇄할 때 사용한 인쇄기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활자 인쇄에 적합한 인쇄기를 개발했다. 그것은 포도주나 기름 압착기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인쇄기에 달린 손잡이를 당기면 연결된 나사가 돌면서 아래로 움직이는데, 그때 생기는 압력이 수평 상태의 나무판자로 전달되었다. 이 판에는 인쇄된 종이를 장착할 수 있었고, 판 밑에는 조판이 끝난 활자가 놓이게 되었다. 한 장씩 인쇄할 때마다 활자에 잉크를 칠해서 인쇄했다.
15세기 종이는 깨끗하게 인쇄하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미끈거렸다. 이 때문에 인쇄공들은 작업하기 4 ~ 5일 전에 종이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했다. 인쇄물의 품질이 여기서 결정되었다. 적절한 잉크를 만드는 것도 복잡했다.
그때까지 목판 인쇄에 사용하던 잉크는 매끈한 금속활자에 칠하기에 너무 묽었다. 더구나 축축한 상태의 종이에 흡수되면 뒷면까지 배어들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걸쭉하면서도 빨리 마르는 잉크가 필요했고, 여러 원료를 혼합해서 실험을 거듭하여 최적의 잉크를 만들었다. 또한 식자판에 놓인 활자에 잉크를 균등하게 칠하기 위해 잉크 방망이도 제작했다.
[이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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