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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7

[⑦ 건국 과정의 완결]

[⑦ 건국 과정의 완결]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이승만과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승만은 선포식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 고 했다. / 조선일보DB 득표율 90%로 대통령 당선··· 취임식 끝나자마자 집무 시작했다 위기 속에 탄생한 대한민국 경제 빈약하고 치안마저 불안 행정 경험 있어도 친일파 몰려 국가 운영할 인적 자원도 부족 제대로 된 軍 없는데 미군 철수 신생국가 안착시킨 국정 운영 유엔 "한반도 유일 합법국가" 정적 조봉암을 발탁해 농지개혁 건국 마지막 시험대 2대 총선도 공정하게 치르며 '자유민주' 확립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⑥ 대한민국 헌법 제정]

[⑥ 대한민국 헌법 제정]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 1948년 7월 24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연단에 선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 이라고 선서했다. 당시 거의 모든 의원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의원 대부분 내각제 지지했지만, 혼자 힘으로 대통령제 이끌다 내각제로는 혼란 수습 힘들다 판단 입헌군주제서 연유한 내각책임제 군주 없는 국가선 제 기능 힘들어 "내각제 땐 어떤 지위도 안맡겠다" 한민당 압박, 대통령제 관철시켜 이승만 하야 ..

[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제헌의회 개원… 이승만 "투표율 90% 넘는 건, 세계에 민족의 애국심 보여준 것"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 · 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 (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 · 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피의 세례' 에도 투표율 95.5%··· 제헌의회 선거의 기적 이끌다 소련, 남로당 앞세워 전국..

[④ 한반도 문제, 유엔에 회부]

[④ 한반도 문제, 유엔에 회부] 한국 문제를 UN에서 다루도록 제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이승만이 중국 난징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한 후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프란체스카. 한국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이승만의 중요한 성취였다. 이를 통해 두 강대국 간 협상이 아니라 UN의 주관 아래 자유민주국가 수립이 가능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소련 지시로 남한서 폭동··· 자유민주 정부 수립 위해 유엔 설득하다 소련, 北에 위성국가 세우고 사회 혼란 유도해 남한 장악 야욕 이승만 "통일 고대하나 여의치 않아, 남방 임시정부 조직하자" 시민 모금으로 방미··· 미국에 '유엔 주재 정부수..

[③ 얄타 회담 비밀협약 폭로]

[③ 얄타 회담 비밀협약 폭로] 얄타 회담 참석한 미·영·소 정상 - 1945년 2월 얄타 회담을 위해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 앉은 사람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이승만은 같은 해 국제연합(UN) 창립총회가 열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얄타 회담 때 '조선을 소련 영향권 안에 둔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 미 정부 문서보관소 한반도 운명 바꾸려… 루스벨트 · 처칠 · 스탈린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다 정치는 돈이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순수한 정치 활동이지만, 망명정부 지도자는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짓누른 짐이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서자..

[② 워싱턴 · 제네바를 무대로 상해 임시정부 중심 잡아]

[② 워싱턴 · 제네바를 무대로 상해 임시정부 중심 잡아]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의 이승만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있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 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오른쪽 마지막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고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공산주의자들이 임시정부 흔들 때마다··· 외교로 김구에 힘 실어줘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총회서 '日 만주 침략 규탄 성명' 발표 중국 외교관들과 친분 바탕, 국제사회의 임시정부 지지 이끌어 저서 '일본 내막기' 서 '美 ·..

[① 최초의 자발적 민중집회 지도자로서 두각 드러내]

[① 최초의 자발적 민중집회 지도자로서 두각 드러내] 스승 서재필과 군축회의 참석한 이승만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이승만 (왼쪽) 한국 대표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이승만 46세, 서재필 57세 시절의 일이다. '독립협회' 를 세운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 중 이승만이 있었다.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기파랑) 19세기말 만민공동회 주도··· 왕정 허물고, 민주공화정으로 나가다 서재필의 가르침 받은 이승만 · 주시경 · 김규식 ··· 토론 모임 만들어 민중 1만여명과 러 강력 비판, 부산에 '급탄항' 만들려던 시도 막아 정부 정책 방향 바꾼 혁명적 사건 ··· 조선왕실에 의회 설립도 요구 탄압 시작되자 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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