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평양 9

[해방 이후 평양]

[해방 이후 평양]    ▲ 1945년 8월 평양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식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조만식 (왼쪽). 가운데가 일본군 평양사관구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 오른쪽은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 위키피디아    광복 직후엔 '민족주의'··· 소련군 나타나며 갑자기 '공산주의'   1945년 8월 17일 '평남 건준' 조직조만식 필두로 우파 · 기독교인 중심소련의 해체 요구에 좌파 인사 늘려    3월 26일 북한과 일본은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축구 국가대표 경기 (A매치)를 치른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A매치 경기가 열리는 것은 4년여 만입니다. 2019년 10월 한국과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를 김일성 경기장에서 치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한국이나..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2009년 10월 북한을 공식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오른쪽)가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방문해 마오안잉의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회창군 AP=연합] 내가 전쟁 중에 만난 중국인이 있다. 차이청원(柴成文)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의 주 북한 대사관 초대 참사였다. 그러나 출신은 군인이었다. 나와의 인연은 1951년에 시작한 휴전회담에서였다. 그는 당시 휴전회담 중국 대표단의 비서장 신분으로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봤다고 했다. 미군 공습 공포 … 김일성도 탄광으로, 농가로 숨어다녀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나는 6·25전쟁 휴전회담의 첫 한국 대표다. 강원도 강릉에서 국군 1군단장을 하고 있던 내게..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미 10군단의 이동경로 정신없이 길을 재촉했다. 내가 길을 서둘렀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북진해서 수풍댐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고,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던 무렵의 청천강을 건너갈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1950년 10월 북진은 실패였다, 청천강서 교두보 쳤어야 … 이곳에 머물며 청천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의 전선을 형성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점이었다. 나는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전쟁 발발 뒤 정신없이 전선을 누빈 일선 사령관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내가 6·25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북진과 평양 입성, 나아가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전체적인 전략의 판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1950년 10월 국군과 연합군이 탈환한 평양은 아직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평양에서 시가전을 펼쳤던 국군 일부가 평양백화점 앞에 서 있다. 평양은 같은 해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해 공산치하에 들어간 뒤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을 받아 시내 전역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무너진다. [중앙포토] 아침 6시쯤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단 CP에 갔더니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 2사단의 ‘인디언 헤드’ 마크를 단 사람들이었다. 100명 남짓이었다. “도강(渡江)을 허락해 달라”는 그들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총사령부(GHQ)에서 보낸 ‘문서 수집반’이었다. 북한이 남기고 간 모든 문서를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

[6 · 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2) 1950년 10월, 국군 점령하의 평양

[6 · 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2) 1950년 10월, 국군 점령하의 평양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개마고원에서 중공군에 맞서 장진호 전투를 벌였던 미군 해병 1사단이 그해 12월 13일 함흥에 전사자들을 매장한 뒤 추도식을 열고 있다. 미군 2500여 명이 전사했다. 10배나 많은 적군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투혼을 잃지 않고 싸움으로써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운 전투로 기억된다. 그러나 적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지동리에서 평양 동쪽으로 우회한 뒤 북쪽 외곽의 모란봉으로 해서 시내에 진입한 15연대의 작전으로 적은 후방을 공격당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15연대는 내가 선교리에 도착한 시간에 모란봉과 김일성 대학에 진출한 뒤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데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1950년 10월 19일 첫 평양 입성을 눈앞에 둔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장군 일행이 대동교 선교리에 도착하기 직전 지뢰폭발 사고가 터졌다. 백 사단장의 뒤를 따르던 석주암 참모장 일행의 지프가 지뢰가 터지면서 전복돼 길에 누워 있다. 1사단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날 평양에 도착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자욱한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연기 같은 안개 사이로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그곳은 영국 등 유럽의 사진에서 흔히 보는 것과 비슷한 벌판이다. 낮은 구릉이 곳곳에 널려 있을 뿐 시야를 가로막는 산은 없었다. 그냥 그곳에서 평양까지는 허허벌판으로 툭 터져 있는 공간이었다. 평양을 먹여 살리는 곡창이기도 했다. “우리라도 ..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9) 마지막 관문을 넘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9) 마지막 관문을 넘다 1950년 10월 38선 이북으로 진군한 미군이 북한군 토치카에 화염방사기를 발사하고 있다. 쫓기던 북한군은 평양 근처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했지만 쉽사리 무너졌다. [중앙포토] 전투는 어떻게 보면 대형 공사를 완성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부족한 곳을 메우고, 내게 넘치는 부분은 제때 거둬들일 줄 알아야 한다. 기계적으로 공격을 퍼부어야 할 순간에는 과감하게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물러날 때에는 역시 과감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선의 동향을 정확하게 읽고, 그 배후에 숨은 상대의 의도와 약점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일선에서 피를 흘리며 분전하는 병사들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장막..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5> 진격 길에 나서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진격 길에 나서다 평양 진격로 세 시간쯤 흘렀을 것이다. 나는 미 1군단의 밴 브런트 참모장이 작전계획 수정 작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작업을 마친 밴 브런트가 내게 수정한 작전명령서를 쥐여줬다. 나는 다시 확인했다. 국군 1사단이 경의(京義) 축선의 우익을 맡아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돼 있었다. 이승만 “평양엔 반드시 ‘마이 보이’들이 먼저 입성해야” 대전비행장으로 와서 경비행기 L5로 청주에 돌아왔다. 사령부에 들어서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에게 “자, 이제 우리가 선봉(先鋒)으로 평양에 진격한다”고 외쳤다. 사령부는 참모들과 사령부 본부대원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도로우선권이라는 게 있다. 청주로부터 수원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길..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4> “백 사단장, 평양을 맡으시오”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백 사단장, 평양을 맡으시오” 1950년 9월 20일 서울시내에 진입한 유엔군 장병이 시가전을 벌이면서 미처 퇴각하지 못한 적 잔당을 소탕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아주 다른 내 얼굴과 몸짓에서 뭔가를 읽은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밀번에게 눈물로 호소 … 마침내 평양 진격 선봉에 서다 “평양으로 진격하는 대열에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이 빠져 있다. 1사단은 해주로 진격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밀번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