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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수학여행 ㅡ 철원여행 (남이섬, 가평레일바이크, 김유정 문학촌포함)] 13

드무2 2024. 8. 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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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수학여행 ㅡ 철원여행 (남이섬, 가평레일바이크, 김유정 문학촌포함)] 13

 

 

 

 

 

 

 

김유정 이야기집 전관안내

 

 

 

 

김유정은 한국문학의 천재이며

창작이나 삶 모두가 나에에 귀감이

되고 있다. 억압 받는 민중이 어느

정도까지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가. 당대에 이러한 문제를 가장

생생하게 파헤친 작가

가 김유정이라고 생각한다.

 

ㅡ 모옌 (2012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김유정의 작품 전편엔

춘천의 정서가 넘쳐 흐른다.

김유정은 당대 문학의

중심이었으며, 춘천이라는

지역사회를

문화적으로 가치

있게 만들었다.

 

ㅡ 이외수 (소설가)

 

 

 

 

 

 

김유정 소설이야말로 가장 쉽게

우리 문학의

대표

소설로서

세계인에게 각광을 받을 것이다.

 

ㅡ 신경림 (시인)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며

광명을 찾고 깊다. 그리고

참말로 다시

일 · 어 · 나 · 고 · 싶 · 다.

 

ㅡ 최인호 (소설가)

 

 

 

 

 

 

짧고 어두웠던 삶을

관통한 섬광 같은

예술혼이 담긴

김유정의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문학사적 가치가

변하지 않고 있다.

 

ㅡ 전상국 (소설가)

 

 

 

영원한

청년작가

김유정을

말하다

 

 

 

 

 

 

김유정 문학의

생동감

가히 독보적이다.

 

ㅡ 윤대녕 (소설가)

 

 

 

 

 

 

 

 

 

 

 

 

 

김유정 선생이 남긴 이 작품들은

시대와 상관없고

공간과

관계없이

우리의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ㅡ 이어령 제1대문화부장관

 

 

 

 

 

 

 

작가는 작품을 후세에 남김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고 갈아 있는 것이다.

혜성처럼 나타나 무지개처럼 사라진,

영원한 청년작가 김유정 !

이곳에서 김유정의 문학과 생애

생생히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908 ~ 1920

김유정의 어린시절

 

 

 

 

1908 ~ 1920

 

1908년 _ 출생

2월 12일 (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 (金春植),

어머니 청송 심씨 (靑松 沈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2남 6녀 중 일곱번째)

 

1914 _ 6세

11월 26일 도사 (都事) 벼슬을 했던 김유정의 조부 김익찬 사망.

이때부터 아버지 김춘식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 서울 종로구 운니동 (당시 진골)에 저택을 마련하고 서울로 이사.

 

1915년 _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이 미처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_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운니동에서 관철동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동안 한문공부와 붓글씨를 익힘.

 

1920년 _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0 ~ 1931

김유정의 청년시절

 

 

 

 

1920 ~ 1931

 

1923년 _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졸업 (제16회),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검정으로 입학.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은 질박, 키는 5척.

숭인동으로 이사. 이름을 김나이 (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1926년 _ 18세

소설가가 된 안회남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8년 _ 20세

형 유근 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집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녹주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_ 21세

휘문고보 5년 졸업 (제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집으로 거처를 옮김.

 

1930년 _ 22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출석일 부족으로 6월 24일 제명처분 당함.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춘천 실레마을로 귀향.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_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다시 입학.

그후 자퇴함 (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마을에 야학당 금병의숙을 열고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 (農友歌) 지어 부름.

 

 

 

 

안회남과의

만남

 

유정이 작가가 되도록 자극이 되어준 외적 요인으로 안회남이 있다. 김유정과 안회남은 휘문고보에 입학은 같이 했어도 친해지기는 3학년부터였다. 두 사람 모두 지각과 결석을 자주 했고, 그런 서로를 바라보다가 친해졌다고 했다. 그들은 함께 공부하고 운동을 하고, 하모니카 연습을 하며 함께 뒹굴었다.

 

김유정은 3학년을 마치고 휴학하였다가 다음해 복학하여 졸업하였지만, 안회남은 1927년 12월 15일 자로 자퇴하고 이후 학교 대신 도서관에 드나들며 문학서적을 탐독한다.

 

문학에 대한 김유정의 관심은 안회남과 우정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했다.

 

 

 

 

 

 

 

김유정의 언어,

박녹주의 소리

 

김유정은 우리말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했다. 언어에는 말과 글이 있다고 말할 때, 김유정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글이 아니라 말이었다. 그것도 글을 모르는 기층민의 말이었다. 그는 기층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이러한 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원초적이고 야성적인 김유정의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으로의 여행을 체험하게 해 준다.

 

박녹주 역시 판소리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했다. 박녹주는 동편제 소리의 전통을 지켜낸 명창이라 할 수 있다. 동편제 소리는 소박한 멋이 있고, 호방하고 남성적인 데에 반해서 서편제 소리는 세련된 기교가 있고 애절하고 여성적이다.

 

 

 

 

 

 

 

 

 

김유정과 박봉자

 

1936년 『여성』 5월호에 <그분들의 결혼플랜ㅡ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공동 제목 하에 김유정과 박봉자가 쓴 글이 나란히 실리면서 김유정은 박봉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김유정은 28세였고, 박봉자는 27세였다.

김유정은 거의 매일 박봉자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냈다. 30통의 편지를 부쳤으나 박봉자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다음달 6월 1일, 경성의 한 예배당에서 김유정과 친분이 깊은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 김유정은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 10개월 사이에 김유정은 병든 몸으로 미친듯이 창작열을 불태워 <야앵>, <옥토끼., <생의 반려>, <정조>, <슬픈 이야기>, <따라지>, <땡볕>, <연기> 등을 발표하였다.

 

천하무쌍의 러브레터를 찾는다면 나는 주저치 않고 유정의 편지를 추천한다.

내용은 어떠냐 하면 거기는 "아이 러브 유" 하는 류의 문구는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지극히 순박하고 성스럽고 또한 평범한 그것이었다. ㅡ 김문집의 <김유정의 비련을 공개 비판함> 중에서

 

 

 

 

 

 

 

 

 

 

금병의숙 錦屛義塾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ㅡ 당시 김유정이 만들어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금병의숙엔

김유정의 고향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서려 있다.

 

금병의숙 錦屛義塾

 

김유정에게 춘천은 문학의 고향이자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었다.

1931년 고향에 돌아 온 후 실레마을 사람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야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우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농우회가도 지어불렀다. 1932년엔 동네 사람들과 학생이 힘을

합쳐 나무를 베다가 직접 세운 금병의숙으로 야학당을 옮겼다.

현재 금병의숙터에는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에 당시 김유정이 심은

느티나무와 소설가 김동리가 비문을 쓴 김유정기적비가 남아 있다.

 

 

 

 

 

 

 

1933

 

25세, 춘천 실레마을에서 상경하여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 진단.

1월 13일 <산ㅅ골 나그내> 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1선지 3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산ㅅ골 나그내>가 처녀작이 됨.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젊은 아낙내가 홋몸으로 돌아다닌대두 고생일 게유 또 어차피 사내는···."

여기서부터 사리에 맞도록 이 말 저 말을 주섬주섬 꺼내오다가 나의 며느리가 되어줌이 어떻겠느냐 꽉 토파를 지었다. 치마를 홉싸고 앉아 갸웃이 듣고 있던 나그내는 치마끈을 깨물며 이마를 떨어뜨린다.

 

ㅡ <산ㅅ골 나그내> 중에서

 

총각과 맹꽁이

1966년 9월, <신여성>에 발표.

일제 식민지 시대, 농촌 소작인 청년 '덕만' 은 지주의 횡포와 수탈로 빈궁을 면치 못하는 대상이었다. 결혼에 대한 조금의 희망을 갈구하지만, 좌절되고 마는 농촌사회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此間七行略 此間四行略' 표지가 있어 마을 청년과 들병이가 수작하는 장면이 인쇄과정에서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ㅅ골나그내

1933년 3월 『제일선』에 발표.

1936년 1월 『사해공론』에 다시 발표.

남편있는 여인이 살기 위해서 매춘하는 점. 덕돌이네와 유랑 걸인의 빈궁상을 그리고 있는 점. 남성 걸인과 덕돌이보다 여성 걸인과 덕돌 어머니가 생활력이 강한 점. 결말에 가서 등장인물들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점. 순박한 인간성을 포착하고 있는 점 등이 이 <산ㅅ골 나그내>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뿌리뽑힌 인간들의 빈궁한 생활상, 무기력한 남성과 생활력이 강한 여성, 살기위한 매춘, 순박한 인간성, 원점회귀 (原點回歸)의 구성 등은 김유정의 소설에 일관되고 있는 특징들이다.

 

 

 

<산ㅅ골나그내>가 실린 1933년 『제일선』 3월호, 33쪽

 

 

 

 

 

 

계집의 음성이 나자 그는 꾸물거리며 일어 앉는다. 그리고 너덜대는 홑적삼을 깃을 여며 잡고는 덜덜 떤다.

"인제 고만 떠날태이야? 쿨룩······."

 

ㅡ <산ㅅ골나그내> 중에서

 

 

 

 

 

 

 

 

1934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8월 16일 <정분> 탈고. 9월 10일 <만무방> 탈고. 12월 10일 <애기> 탈고. <노다지>, <소낙비> 를 12월에 탈고. 1933년의 <따라지의 목숨> 을 <흙을 등지고> 로 개작하여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1등 당선이 되고, 신문사와 협의하여 <소낙비> 로 제목을 바꾸어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

 

 

 

金 따는 콩밧

1935년 3월 <개벽>에 발표.

가난한 농민 영식이 자신을 콩밭에서 금줄을 찾으려다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광업에 의해서 일확천금의 허황한 꿈에 순박성이 유린되고 있는 1930년대의 상황을 그려낸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반어적인 상황을 기조로 한가운데 욕망에 이끌리는 인간의 탐욕적인 삶의 양식을 해학적으로 희화화한 김유정 특유의 해학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935년 3월 <영화시대>에 발표.

<금>에서는 천원짜리 감돌 앞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성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노다지>에서는 그것이 무너지는 현장을 보여준다.

김유정의 금광소설 3편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은 모두 1935년 3월에 발표되었다.

 

 

 

 

1935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 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작품 현상모집에 <노다지> 가작 입선. 같은 해에 <金 따는 콩밧>, <금>, <떡>, <만무방>, <산골>, <솟>, <홍길동전>, <봄봄>, <안해> 등 단편소설 11편과 <닙히 푸르러 가시든 님이>, <朝鮮의 집시>, <나와 귀뚜람이> 등 수필 3편 발표.

 

 

봄 · 봄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

<봄 · 봄>은 실레마을의 실존인물들에게서 벌어진 실제 이야기로 쓴 소설이다. 일제시대 우리 문학에는 농촌의 사정을 그린 작품이 대단히 많았다. 당시 인구의 8 ㅡ90%가 농민이었기에 농촌의 현실은 바로 조선 전체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문학은 지식인 작가의 계몽적인 입장에서 쓰여져, 농민보다는 농민을 계몽하는 지식인 주인공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비해, <봄 · 봄>은 주인공의 우직하지만 건강함이 유발하는 해학을 통해 당시 우리 농촌 현실을 한층 더 진정한 형상화로 끌어올리고 있다.

 

 

 

 

 

 

노다지

1935년 3월 조선일보에 5회 연재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선 작품. <노다지>는 하룻밤 동안이라는 시간적 제약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잠재해 있는 황금에 대한 욕심과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연관지어 남들의 눈을 피해 금을 캐러 다니는 잠채꾼의 행위와 심리를 추적하여 인간 심리의 갈등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35년 6월 「중앙」에 발표. 서술 방법에서 구연체적 (口演體的) 특질을 잘 살리고 있어 실감나게 읽혀진다. 겨우 일곱 살의 어린 여자아이 (옥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절실하게 부각되었다.

 

 

산골

1935년 7월 「조선문단」에 발표. 천진하고 순수한 산골 처녀의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이쁜이를 유혹하여 마음을 빼앗았지만 서울로 공부하러 떠난 주인댁 도련님, 그리고 하염없이 도련님을 기다리는 이쁜이, 그리고 이쁜이를 좋아하는 석숭이가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룬다.

 

 

 

만무방

<조선일보>에... 1935년 7월 17일부터 30일까지 13회 연재.

주인공과 부수적 인물들이 모두 뿌리뽑힌 유랑민들이다.

한없이 착취당해야만 하는 소작인의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김유정의 소설 중에서는 드물게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해학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그의 대부분의 소설과 구분되는 점이다.

 

 

 

매일신보에 1935년 9월 3일부터 14일까지 10회 연재.

1934년 8월 16일에 탈고한 '정분' 을 손질하고 제목을 바꾼 것이다. '정분' 은 김유정 사후 '조광 (朝光, 1935. 5)' 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수필 '조선의 집시' 와 내용상 상통하는 곳이 있다. 들병이를 다룬 작품으로는 '솟' 이외에도 '총각과 맹꽁이', '안해' 등이 있다.

 

 

 

 

김유정소설집ㅡ동백꽃 / 삼문사, 1938 (왼쪽)                 김유정소설집ㅡ동백꽃 / 세청서관, 1940 (오른쪽)

 

 

 

 

 

 

 

소낙비

조선일보 신춘문예 작품 현상모집 일등 당선 작품이다.

제목 앞에 '一等當選 短篇小說' 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고 매회 송병돈 (宋秉敦)의 삽화가 곁들여 있다. 같은 신문 1월 3일 자에 당선 기사가 있고 1월 23일 자에 당선 축하회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절실한 상황에서 자기 삶을 위해 매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산ㅅ골나그내>, <솟>, <만무방>, <가을>, <貞操>에도 나타난다. 춘호 내외는 빚에 못이겨 고향 인제 (麟蹄)를 야반 도주한 유랑민이다.

 

 

 

 

 

 

우물길에서 어쩌다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 만치 가서.

"재ㅡ미 키두 !"

 

ㅡ <봄 · 봄> 중에서

 

 

 

사진출처 : 영화 <봄봄>

 

 

 

홍길동전

1935년 10월 '신아동 (新兒童)' 에 발표.

김유정은 허균의 '홍길동전' 을 고쳐 만들면서 줄거리를 간결하게 다듬었다. 홍판서의 첩 (초란이), 홍길동을 체포하려다 실패하는 우포장, 홍길동의 아내가 되는 두 소저 (백 소저, 조 소저)를 빼버리고, 율도국을 건설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도 아예 빼버렸다.

율도국 이미지를 뺀 것은 김유정의 작가 정신이기도 하다. 초란이가 빠졌으므로 길동을 죽이려다 실패한 인물이 길동의 형으로 바뀌었다. 실제 김유정은 그의 형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안해

1935년 12월 '사해공론 (四海公論)' 에 발표.

지문 (地文)도 구어체로 되어 있는 점, 비속어가 풍부한 점, 농촌 사회에서 흔히 쓰는 관용적 비유가 풍부한 점, 인물 및 행위 묘사가 과장적이고 희화적인 점, 욕설과 난폭한 행위 속에 끈끈한 정을 지니고 있는 점 등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1936

 

김유정 28세, <심청>,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音樂會>, <동백꽃>, <夜櫻>, <옥토끼>, <貞操>, <슬픈이야기> 등 11편의 단편소설과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 <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電車가 喜劇을 낳어>, <길>, <행복을 등진 情熱>, <밤이 조금만 잘렷드면> 등 6편의 수필을 발표.

 

 

봄밤

1938년 4월, 「여성」에 발표.

제목 앞에 '콩트 · 컴비' 라는 표지가 붙어 잇고, 안회남이 쓴 같은 제목 콩트와 나란히 함께 실려 있다. 황금의 유혹에 약한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였다.

 

 

옥토끼

1936년 7월 「여성」에 발표.

소년 · 소녀적인 천진성을 부각시키려한 작품이다.

 

 

정조

1936년 10월 「조광」에 발표.

떠돌이 부부의 악착같은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산ㅅ골나그내>의 여인이나 <소낙비>의 춘호 아내와 같은 방법으로 삶의 길을 찾으면서도 이 작품의 행랑어멈에게서는 순박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배경은 농촌이 아니라 도시이다.

 

 

生의 伴侶

1936년 「중앙」에 8월, 9월 2회에 걸쳐 발표.

김유정 자신의 삶을 작품화한 미완성 장편소설이다. 자신과 형, 누이, 박녹주 (나명주)와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나타나 있다.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기 위하여 서술자를 주인공의 친구로 설정하였다.

 

 

슬픈이야기

1936년 12월 「여성」에 발표.

작품 전체가 한 개의 형식 단락으로 되어 있고, 대화 부분에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고, 문장의 호흡이 길며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두꺼비>와 같은 기법이다.

또한 이 작품의 박감독 (남성)은 <두꺼비>의 옥화 (여성)에 해당한다. 박감독은 '불밤송이 (채 익기 전에 말라 떨어진 밤송이)'에, 옥화는 '쭈그렁밤송이 (알이 제대로 들지 아니하여 쭈그러진 밤송이)'에 각각 비유되고 있다. 나와 옥화 사이에 아이러니가 성립하듯이 나와 박감독 사이에 아이러니가 성립한다.

 

 

夜櫻

1936년 7월 「조광」에 발표.

김유정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나 하류계층의 인물이다. 봄의 화사함과 대조시키고 있다. 세 여성의 개성을 각각 다르게 정숙의 전남편은 무기력한 건달형이다.

 

 

 

 

 

동백꽃

1936년 5월 「조광」에 발표.

향토색 짙은 농촌의 배경 속에서 인생의 봄을 맞이하여 성장하여가는 충동적인 사춘기 소년 · 소녀의 애정을 해학적으로 그린 김유정의 대표작이다.

 

 

 

 

 

 

김유정소설집ㅡ동백꽃 / 왕문사, 1952 (왼쪽)            김유정소설집ㅡ동백꽃 / 장문사, 1957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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