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원도

[추억의 수학여행 ㅡ 철원여행 (남이섬, 가평레일바이크, 김유정 문학촌포함)] 09

드무2 2024. 6. 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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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수학여행 ㅡ 철원여행 (남이섬, 가평레일바이크, 김유정 문학촌포함)] 09

 

 

 

 

 

 

 

 

 

 

 

 

南門

 

 

 

 

 

 

 

 

 

 

 

 

 

 

 

 

 

 

 

 

 

 

 

 

 

 

 

 

유리메타

2010년 삼성증권 사옥 철거시 버려지는 강화유리를 가져와 재활용 소주병을 붙여 유리로 된 메타세쿼이아길을 연출했다. 이 다리를 따라 가면 겨울연가 첫키스 벤치를 만나게 된다.

 

 

 

 

 

 

 

남이섬, 여성가족부

셀프웨딩촬영명소

'BEST 18' 선정

 

 

 

 

웨딩전문 사진작가 15인의

추천을 받아 전국 6개 권역별로 선정

겨울연가의 주인공이 되어 볼 수 있는 '연인들의 성지'

 

봄 / 여름 추천지로 빌딩숲 사이 연초록 물결을 담을 수 있는 '서울숲' (서울 / 수도권)이다. 연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남이섬' (강원권), 폐교가 예술스튜디오로 재탄생한 '당진 아미미술관' (충청권) 등이 꼽혔다.

 

한옥의 선이 담기는 '남산골한옥마을' (서울 / 수도권)과 드라마 '도깨비' 속 커플이 돼 볼 수 있는 '고창 메밀밭' (전라권), 동화 속 나라를 연상시키는 '독일마을' (경산권' 등이 가을 / 겨울 추천지로 뽑혔다.

 

여가부는 일부 명소에서 실제 예비부부들을 모델로 사진을 촬영해 셀프 웨딩촬영 명소 홍보콘텐츠 제작과 확산에도 나선다. 지난 5월 예비부부들의 신청을 받아 총 6쌍을 선발했다. 사진작가와 함께 이 달 내 봄 / 여름 명소에서 사진촬영을 진행한다. 사진은 작은 결혼 '셀프촬영하기' 홍보콘텐츠로 제작되고 작은 결혼정보센터 홈페이지 (www. smallwedding.or.kr)와 페이북에 공개된다.

 

조민경 가족정책과장은 "최근 많은 예비부부들이 셀프 웨딩 촬영을 진행하는 등 직접 '나 만의 의미있는 작은 결혼식' 을 준비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며 "앞으로도 특색 있는 국내 신혼여행지,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작은 결혼식 모델 등 실속 있는 정보를 계속 개발해 제공해 나가겠다" 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 2017. 06. 15)

 

 

 

 

전 세계 동화작가들

'2017 나미콩쿠르'

앞다퉈 축하

 

 

 

전 세계 89개국에서 접수된 1,777개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중

최종 선정된 18명의 수상작가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

 

'2017 나미콩쿠르' 시상식이 전 세계 동화작가들의 축하를 받으며 지난 14일 남이섬에서 열렸다. 시상식에는 나미콩쿠르 수상자 13명과 심사위원 7인을 비롯해 강우현 남이섬 세계책나라 축제위원장, 죽제아동도서협의회 (이하 IBBY) 관계자, 비에라 아노스키노바 BIB 사무국장, 토마스 리만 주한 덴마크 대사 등 100여 명이 넘는 귀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날 나미콩쿠르 시상식은 지난해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전 세계 89개국에서 접수된 1777개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중 최종 선정된 18명의 수상작가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상식에는 대상 (Grand Prix)을 받은 폴란드의 마우고자타 구로브스카 (Malgorzata Gurowska)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초청받은 13명의 동화작가가 함께 했다. 월리 드 동커 IBBY 회장은 축사를 통해 "IBBY와 남이섬은 뛰어난 그림책을 창작하는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를 발굴한다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다" 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과 IBBY의 세계 네트워크 확장을 위해 남이섬이 보내주는 후원과 지지에 감사드린다" 고 말했다.

 

준코 요코타 나미콩쿠르 심사위원장도 "이번 심사에선 작가의 출신 국가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음에도 8명의 수상자가 4개 대륙에서 선정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며 "앞으로도 이러한 수준 높은 공모전을 통해 어린이 그림책 수준을 높일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고 밝혔다.

 

대상을 받은 마우고자타 구로브스카는 "2017 나미콩쿠르라는 뜻깊은 그랑프리를 수상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며 "기존 형식을 뚜이어 넘는 새로운 일러스트레이션을 발굴하고 격려하는 나미콩쿠르는 우리와 같은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 라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을 축하하는 공연과 퍼레이드도 다채롭게 열렸다. '퓨전타악그룹 슈퍼스틱' 의 난타공연을 시작으로, 나미콩쿠르 브랜드공연 쇼케이스 (극단 브러쉬씨어터)' 가 시상식의 분위기를 띄웠다. 시상식이 끈난 뒤 펼쳐진 '동화나라 숲속 퍼레이드' 에선 어린이취타대와 풍물단, 슈퍼스틱과 거대 앨리스 인형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로 관광객들과 흥겨운 축제 한마당을 구현했다. 이어 '2017 나미콩쿠르 수상작展' 전시가 펼쳐지는 문화원 앞에서 참가자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축제의 개막과 성공을 기원하는 가래떡 커팅식을 가졌다. [아주경제 / 2017. 05. 15]

 

 

 

 

 

 

 

 

 

외국인 관광객

130만 명 시대 연

남이섬의 역발상

 

 

 

 

춘천 남이섬은 한 해 120개국, 13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 한국적 특성 살린 직원들의 '손끝 정성' 과 동반성장을 앞세운 ;북한강 관광벨트' 를 통해 자연 속 문화를 체험하는 설렘의 100년 관광을 시현하겠다.

 

춘천 남이섬은 한 해 120개국 13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다. 지난 3월 사드배치로 촉발된 중국의 한국관광제한이라는 초강수에도 흔들림 없이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1944년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남이섬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달리 모래섬의 불모지였다. 수재 민병도 선생 (1916 ~)이 1965년 토지를 매입해 이 모래땅에 다양한 수종의 육림을 시작했다. 1966년 경춘관광개발 주식회사를 설립, 종합휴양지로 조성하던 중 IMF 금융위기로 첫 번째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수재는 좌절하기는 커녕 2000년 4월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공격적 마케팅을 실시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유원지' 로만 인식되던 남이섬은 2001년 12월 KBS 드라마 '겨울연가' 의 성공에 힘입어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1년 30만 명이 채 안되던 관광객 수가 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시아권 및 유럽권 관광객들이 급증해 2004년부터 연 평균 160만 명이 방문하는 '국제관광지' 로 발돋움했다. 외국인 방문객은 2012년 64만 명 (총 방문객 260만 명), 2014년 100만 명 (총 308만 명), 2016년 130만 명 (총 328만 명)에 달해 국내 단일 관광지로서는 최고의 외국인 관광객 수를 기록하고 있다.

 

어린이 그림책을 매개로 한 '남이섬 세계 책나라축제' 는 매년 5월 열리는 종합문화축제다. 올해 8회를 맞이하여 '신비로운 세계나라' 라는 주제 아래 국내외 동화 일러스트레이션 전시, BIB 그림책 수상작 전시 등을 비롯해 가족극, 공연 및 퍼레이드, 각종 체험 등 축제를 찾아온 가족이 책과 함께 신비로운 상상의 나라로 빠져들게 한다.

 

특히 '나미콩쿠르 (남이섬 국제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 는 IBBY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회에 42개국, 2회에 71개국, 3회 째인 올해에는 89개국에서 1777명이 ㅇ으모하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콩쿠르로 발돋움했다.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 브라티슬라바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BIB)와 함께 세계 3대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이섬의 저력은 역발상에 있다. 설립자 수재는 척박한 모래땅에 불가능에 가까운 나무를 심었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쓰레기를 관광상품화했으며, '겨울연가' 의 흥행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테마를 찾았다. 남이섬은 쓰레기를 재활용하면서 자연이 살아났고, 소주병 등 쓰레기를 재활용한 작품들은 이제는 섬의 상징이 됐다. 남이섬 구석구석을 산책해봐도 쓰레기 한 점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섬에 숲이 우거지자 많은 문화 예술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남이섬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머리를 맞대 공연 전시를 기획, 자연상태 청정 정원의 이미지에 '동화나라' '노래의섬' 이란 콘셉트를 더했다.

 

남이섬 전명준 대표이사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2000만 시대를 눈 앞에 둔 만큼, 한국적 특성을 살린 직원들의 '손끝 정성' 과 동반성장을 앞세운 '북한강 관광벨트' 를 통해 자연 속 문화를 체험하는 설렘의 100년 관광을 시현하겠다" 라고 밝혔다. 감성문화가 살아 숨쉬는 남이섬. 섬에 입장하자마자 느껴지는 '나미나라 공화국' 의 경영철학이 대한민국 모든 관광지로 전파되길 바란다. [글로벌이코노믹 / 2017. 05. 11]

 

 

 

겨울연가 동상

 

 

 

남이섬 세계 책나라축제 ㅡ 그림책 도서관

 

 

 

남이섬,

1분 만에 주파하는

'스카이라인 짚와이어

 

 

 

 

 

 

 

2010년 개장한 짚와이어는 경기관광공사, 가평군,

남이섬이 공동 투자한 민관 합작 사업

지난해 이용객 9만5000여 명... 2015년 대비 45.7% 성장

 

경기도 가평의 자라섬과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을 1분 만에 주파하는 스카이라인 짚와이어의 지난해 이용객이 전년대비 약 50% 증가했다. 남이섬 이용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짚와이어 이용객은 총 9만5000여 명으로 2015년 6만5천여 명에 비해 45.7% 증가했다. 또한 지난해 10월 누적 탑승객이 30만 명을 돌파하며 개장 초기인 2011년 3만 명에 10배가 넘는 성장세를 기록했다.

 

지난해 짚와이어 이용객 가운데 20대는 3만3000여 명으로 전체 이용객의 41%로 가장 많이 차지했다. 이어 30 ~ 40대가 35%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 중 외국인 이용객은 2만3000여 명으로 홍콩 (31%), 싱가포르 (17%), 말레이시아 (13%), 대만 (12%), 중국 (8%) 순으로 많이 이용했다.

 

짚와이어는 경기관광공사, 가평군, 남이섬이 공동으로 투자한 민관 합작 사업으로 약 35억 원을 들여 2010년 11월 개장했다. 주주배당 역시 지난해 6%에 이어 올해 7.7%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유지, 민과 같이 협력해 진행한 모범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경기관광공사 관계자는 "짚와이어는 경기도 대표 관광지 자라섬과 강원도 대표 관광지 남이섬을 잇는 새로운 체험거리로 자리잡았다" 며 "향후 국내외 관광객들이 더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민과 관, 지자체 간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 이라고 밝혔다.

 

한편 짚와이어는 강원도 춘천 남이섬 주차장에 세워진 약 80m 높이의 타워에서 와이어 로프에 매달려 남이섬과 자라섬으로 이동하는 친환경 레포츠 시설이다. 시속 60 ~ 80㎞의 속도로 이동하며 약 1분 동안 하늘에서 북한강 일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특히 지난해 1월에는 레포츠 산업시설로는 처음으로 '체육시설 업자 배상 책임 공제 1호' 에 가입하며 더욱 안전한 레저시설로 자리매김했다. 남이섬 짚와이어는 개장 후 지금까지 무사고를 기록하고 있다. [이데일리 / 2017. 04. 05]

 

 

 

남이섬,

신세계 DF와 손잡고

한국 관광시장의

새로운 장 개척

 

 

 

 

도심과 자연을 잇는 새로운 관광거점 구축

쇼핑 위주의 관광을 벗어나 관광시장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

 

한국 관광시장은 쇼핑과 단체관광에 집중되어 있고, 서울 및 제주도에만 관광객이 몰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쇼핑 위주의 관광을 벗어나 관광 시장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 한 해 120개국 130만 외국인 관광객이 찾은 한국 대표관광지 남이섬과 면세점 사업의 대표격인 신세계 디에프의 상생이다. 남이섬 전명준 대표와 신세계 디에프 손영식 대표는 21일 업무 협약식을 맺고 도심과 자연을 잇는 새로운 관광거점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은 서로가 가진 관광 특수성과 문화적 인프라를 결합해 더 나은 인프라를 제공하여 다국적 관광객 유치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시작됐다. 쉽게 말해, 신세계는 남이섬을 찾는 130만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남이섬도 서울 도심과 공항에 위치한 신세계 면세점에서 남이섬을 홍보한다는 계획ㄷ이다.

 

이를 위해 남이섬ㅡ신세계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공동 홍보와 마케팅, 프로모션을 개발 운영한다. 먼저 남이섬ㅡ신세계 간 셔틀버스 개설을 시작으로 남이섬 공예품 (눈사람 브랜드)과 신세계 디에프의 전통문화 복합편집숍 '한수 (韓手)' 를 연계한 관광상품을 구성한다. 또 남이섬 입장권 소지시 면세점 할인 쿠폰을 제공하거나 사업장 내 서로의 홍보영상과 안내 책자를 설치하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남이섬ㅡ신세계의 이번 업무협약을 실제 동남아를 비롯한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 관광객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남이섬의 경우 작년 한 해 130만 명의 외국인이 방문하였다. 특히 구매 잠재력이 높은 개별 관광객 비율이 43%에 달해 이들이 신세계 면세점으로 향할 경우 실제 면세 매출 증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이섬 전명준 대표는 "이번 업무협약은 남이섬을 중심으로 경기ㅡ강원을 잇는 북한강 관광밸트에 공항ㅡ서울을 잇는 신세계 디에프가 합쳐진 새로운 한국관광의 전환점" 이라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2,000만 시대를 눈앞에 둔 만큼 자연 속 문화를 체험하는 설렘의 100년 관광을 실현하겠다" 고 밝혔다. [코리아피플 / 2017. 03. 21]

 

 

 

남이섬,

동남아인 필수

관광 코스로

 

 

 

 

 

 

 

추위 마케팅 역발상... 외국인 손님 120만 명 중 동남아인이 60만 명 말레이 · 태국 · 베트남어 안내판... '할랄 레스토랑' 엔 빈자리 없고, 무슬림 위한 기도실 완비

 

7일 오후 강원도 춘천 남이섬 머리에 히잡을 두른 말레이시아 여교사들, 3대가 함께 온 인도네시아 가족, 태국 가톨릭 교육 기관의 교사 연수 참가자 등 동남아인 수십 명이 배에서 내렸다. 이들은 산책로에서 만난 눈사람 모형을 보고 환호했다. 각국 전통복장 차림 눈사람 아래 '셀레맛 다땅 (안녕하세요)', '테리마 카시 (감사합니다)' 등 동남아 각국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전명준 주식회사 남이섬 대표는 "이런 추세라면 올해 남이섬을 찾는 120만 명 외국인 관광객 중 60만 명이 동남아 손님으로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한국을 찾는 동남아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2011년 124만 명이던 방한 동남아 관광객은 올해 22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경제 발전으로 소비 여력을 갖춘 신 (新) 중산층이 늘어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방한 관광객은 최근 5년 새 140% 증가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동남아 국가연합 (ASEAN) 인구의 60%는 35세 이하의 젊은 계층으로, 중산층이 2010년 5000만 명에서 2020년에는 1억 명이 넘는 거대 소비시장을 형성할 것" 이라고 관측했다.

 

'겨울 추위' 역발상 콘셉트

이날 남이섬의 동남아 관광객들은 말레이 · 인도네시아어와 베트남어, 태국어로 된 안내 팜플렛을 들고 섬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국내 4번째 할랄 레스토랑' 인증판이 붙은 식당은 무슬림 관광객들로 100여 석 자리에 빈 곳이 없었다. 2층에 있는 기도실 '무솔라 (Musolla)' 에서는 세족장에서발을 씻은 남성 2명이 메카 방향 화살표 쪽으로 기도를 했다. 식당 건너편에 동남아 각국 화폐 환전소도 보였다. 태국 관광객을 인솔한 가이드 권순웅 씨는 "남이섬은 다양한 동남아 국가 관광객을 위한 세심한 편의 시설로 소문이 나서 '반드시 들러야 할 관광코스' 로 꼽힌다" 고 말했다.

 

한류 드라마 '겨울 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남이섬은 '추위와 눈 체험' 이라는 콘셉트로 관광 비수기인 겨울철을 동남아 특수를 누리는 성수기로 바꿨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처음 한국을 찾은 아이미 시아프가 (24) 씨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한국의 겨울은 너무 매력적이다. 다음엔 스키장을 가겠다" 고 말했다.

내년 1월 7 ~ 29일 강원도 화천에서 열리는 산천어축제에는 외국인 관광객 8만 명이 찾을 전망이다. 작년에는 7만 4000명이 방문했다. 한응삼 산천어축제 운영본부장은 "지난 달 태국과 대만, 홍콩 등에서 홍보활동을 벌였다" 고 말했다. 1월 한달간 동남아 관광객 전용으로 운영되는 리조트 예약률은 현재 85%에 달한다. 관광공사는 이달 중순부터 내년 3월까지 동남아 관광객 등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용평 · 하이원 · 대명 리조트에서 '코리아 스키 페스티벌' 을 벌인다.

 

'진짜 한국' 실감할 수 있는 상품 나와야

최근에는 인센티브 관광객도 부쩍 늘었다. 관광공사가 지난 달까지 유치한 동남아 인센티브 관광객은 27만 7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61% 증가했다. 역대 최고치였던 21만 1500명 (2014)을 웃돈다. 연말까지 30만 명을 넘어설 전망. 특히 베트남 인센티브 관광객은 3만 6000명으로, 전년보다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박철범 관광공사 미팅 인센티브 팀장은 "수천 명이 동시에 입국하는 중국 인센티브 관광은 수도권에 머물며 쇼핑 위주로 진행되지만, 1000명 안팎의 중소 규모인 동남아 관광객은 지방을 누리며 한국의 다양한 매력을 경험한다" 고 말했다.

 

개선해야 할 점도 있다. 관광 전문가들은 언어 소통과 음식 만족도에서 동남아 관광객들이 다른 국가에 비해 평균치 이하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통역 · 식당 · 숙박 등 관광 인프라를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 관광객이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절반에 육박하는 현 상황을 개선하려면 이들에 대한 관광 서비스 지원이 절실하다. 이훈 한양대 교수는 "일본은 편리한 교통과 쾌적한 숙박, 정성스러운 환대를 바탕으로 동남아 관광객 유치전에 민관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며 "진짜 한국을 실감할 수 있는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 고 말했다. [비즈조선 / 2016. 12. 09]

 

 

 

 

 

 

 

문화예술

자연생태의 청정정원

신비로운 세계나라

 

역사를 만드는

남이섬의 '역발상 경영'

발자취를 만나보자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80세까지

80세 이후에는 종신직원이랍니다.

 

주식회사남이섬은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이 처음 매입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오신 정신을 이어 받아 남이섬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직원들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종신직원을 선정해 오고 있다.

남이섬에서는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직원은 80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 종신직원은 일반직원 가운데에서 선정된다. 종신직원은 80세가 넘은 후에는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명예직원 신분이 유지되며 사망시까지 매월 80만 원의 공로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지난 2007년부터 이 제도가 시작되었으며, 남이섬에는 현재까지 원예조경, 호텔, 공예, 환경 등의 직종에서 7인의 종신직원이 선정되었다.

 

 

 

 

석성계 石聖桂

도자공예 종신직원

 

1934년 강원도 강촌 충생으로 1950년부터 도자제작 기술을 연마하여 옹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옹기제작이 사양길로 접어들 때 퇴직했다가 1998년 남이섬에 '계절임시직' 으로 입사했다.

2004년 정규직원이 되어 남이섬에 공예원을 설립하고 전통 발물레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 2008년 12월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었다.

 

 

 

석성계(79)···남이섬 최고령자, 발 물레 시연으로 해외진출까지 [출처 : 경기일보 2013년 11월 14일 자]

 

 

 

 

"도공의 길 다시 걷게 한 남이섬"

남이섬 공예원 내 <남이요>를 대표하고 있는 석성계 요장이 남이섬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8년이다. 당시 나이 65세, 어릴 때부터 익힌 기술로 옹기를 만들며 살아오다가 일을 쉬게 된 지 15년째 되전 해였다. 옹기 제작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은퇴를 맞게 되었고, 이후 제제소 일용직과 같은 일을 하다가 남이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남이섬에 들어온 석성계 요장은 여객선의 밧줄 묶는 일, 환경센터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일 등을 했다. 그러다가 2001년 남이섬 CEO로 취임한 강우현 대표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았다.

 

"어르신 남이섬에서 다시 한 번 옹기장이로 살아보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남이섬의 전통 흙가마 <남이요>가 탄생했다. 동시에 '요장 (窯長)' 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6 · 25전쟁 통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배워, 한 평생 업으로 살아온 옹기장이로 복직하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려운 생활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이런 저런 일을 해 온 석성계 요장은 당시 옹기제작 기술을 배우면 먹고 살 길이 열리리란 기대로 17세 때 요장 (窯場)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향 강촌을 떠나 당시 최대의 요장이 있던 서울 신내동으로 갔다. 신내동 요장은 지난 2002년 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배요섭 옹기장의 가문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잠은 어떻게 얻어 잘 수 있었지만, 먹을 것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밥을 먹기 위해서는 남의 집 소여물 먹이는 일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 배움을 계속할 시간에 홀로 소꼴을 베러 나가야 하기도 했다. 자연히 진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고, 엄한 스승님은 작품을 잘 못만들면 돌리던 물레를 멈추고 작품을 통째로 들어 머리에 덮어 씌워 버리곤 했다.

 

"스승님이 작품을 머리에 덮어씌우면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됐지. 서럽고 배고프고 집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있는 외로움도 힘들었고... 그때는 맨날 울었어."

 

그렇게 고생하며 배운 기술을 서른 살 즈음에는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시는 옹기나 그릇제조 기계가 없어 사람의 손이 귀하던 시절, 용인, 여주, 가평 등을 오가며 일할 때는 직접 차를 대절해 모시러 올 만큼 대접받으며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사양산업이 된 옹기 만드는 일을 다시 해보자는 강우현 대표의 제의를 받았을 때, 반갑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엔 잘 될 수 있을까 싶더라고 기구도 없지, 가마도 없지... 사람 또한 나밖에 없는데 과연 될까 싶었어. 지금처럼 자리 잡을 줄은 몰랐지. 정말 몰랐지."

 

"발물레 시연으로 해외 진출까지,

가평 옹기의 맥 홀로 꿋꿋이 이어가는 보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된 <남이요>는 눈에 보이는 발전을 거듭했다. 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가마가 생기고, 도자를 전공한 젊은 청년작가들이 들어왔다. 발물레 시연 공간도 갖추게 되었다. 남이섬 내 위치한 '공예원' 에서 석성계 요장은 반세기 전에 배운 전통방식 그대로의 옹기 제작을 선보인다. 손님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그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고, 이제 석성계 요장의 발물레 시연은 남이섬의 빼 놓을 수 없는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 임진각 '평화누리관광특별전', 2009년 일산 '경기국제관광박람회', 예술의 전당 '나미나라국가브랜드전', 중국에서 열린 '국제창의박람회' 에서도 석성계 요장은 시연을 선보였다.

 

"내가 중국까지 가서 발물레 시연을 하고 왔잖아.

작품 하나 하나 만들어서 내놓을 때마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박수치고 환호를 했지."

 

새벽 4시면 눈을 떠서 하루를 준비하는 석성계 요장은 가마에 불 지피는 날을 가장 기다린다.

 

"잘 구워진 작품을 가마에서 꺼냈을 때 그 때가 가장 보람있지.

작품이 잘 나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

 

50년 넘게 몸에 익혀온 옹기 기술을 선보일 수 있도록 해준 지금의 직장에 감사하다는 석성계 요장은 종신직원 선정으로 또 한번 인정 받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종신직원까지 됐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야지.

내 몸이 지금만 같으면 80 넘어서도 문제없을 것 같아."

 

남이섬에 인접한 가평은 여주, 이천과 함께 도요지로 유명한 곳이다. 대형 요장이 네 군데나 있었고, 석성계 요장 역시 그 중 한 곳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젠 모든 요장이 사라져 그 시절의 명성마저 무색해 지고 있지만, 아직도 흙을 다지고 물레를 돌리는 석성계 요장으로 인하여 그 맥은 오늘도 이어져 가고 있다.

 

 

 

 

신현분 申鉉分

연회부 종신직원

 

1944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1975년 '계절임시직' 으로 입사했다.

2004년 정직원이 되어 2007년 12월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호텔 정관루에서 근무하고 있다.

 

 

 

신현분(69)…남편과 함께 한 30년 생활, 남이섬 ‘장금이’ [출처 : 경기일보 2013년 11월 14일 자]

 

 

 

 

"자갈로 강둑 쌓던 시절부터

부부가 함께 쌓은 남이섬 근무경력 30여 년"

 

신현분 종신 (74세)은 남이섬 환경 정비 작업이 한창 이루어지던 1975년 남이섬에서 일용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처음에 와서 한 일은 남이섬 둘레로 둑을 쌓는 일. 당시는 지금처럼 기술과 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작업이 더디고 힘들었다. 강물이 줄어들 때를 기다렸다가 강바닥의 돌을 주워 가져다주면 남자 직원들이 둑을 쌓았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사람 손으로만 해야 할 때라서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몰라.

돌은 주워서 큰 돌, 작은 돌, 자갈 별로 분리해야지.

그걸 머리에 가득 이고 옮겨야지.

한창 젊을 때니까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었지."

 

당시 농사 외에는 먹고 살만한 일자리가 드물었던 가평지역 사람들에게 남이섬은 최대의 일터였다. 부부가 함께 남이섬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아이들을 맡길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였다.

당시 5살, 3살이던 아이들은 저녁이면 엄마가 보고 싶어 섬 선착장까지 찾아오곤 했다.

 

"어떤 날은 선착장에 있던 직원이 강가에서 소리가 나기에 가봤더니

우리 애가 강가에 앉아 엄마 기다리며 졸다가 그만 퐁당 빠져 버린거야.

그 어린걸 건져다가 옷을 덮어서 재워 놓으면

내가 퇴근하는 길에 업고 가곤 했지.

하루 종일 저희들끼리 노느라 눈물, 콧물, 흙 범벅이 되가지고,

아이들이 불쌍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우."

 

"젊은 시절 다 바친 평생직장,

돌아보면 고생보다 행복한 기억이"

 

남이섬에서 일을 시작한 후 수 년이 지나서부터는 호텔 연회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엔 섬 곳곳에 앉아 계신 손님들에게 출장 서비스처럼 일일이 음식을 실어나르는 것이 연회부의 일이었다.

손님이 넘쳐나는 성수기엔 며칠씩 집에도 가지 못하고 주방에서 일을 하며 손님들의 세 끼 식사를 챙겨야 했지만, 힘든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맨 가평 사람들이니까 쉬는 시간이 생기면

이화리 편, 달전리 편 이렇게 편을 나눠서 달리기 시합도 하고

닭싸움도 하고, 내기를 해서 음료수도 먹고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까 좋고

여기서 내 젊은 시절을 재미있게 보냈어."

 

이런 추억은 젊은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보람의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남이섬 종신직원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 번 그동안 흐른 세월을 느꼈다는 신현분 종신. 특히 7 ~ 80년대와 비교해 크게 달라진 환경을 볼 때, 이날까지 남이섬에서 일해 온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찬밥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 일하던 때가 30년 전 일이 돼서 어느새 회사에서 어른 대접을 받고, 이렇게 종신직원까지 됐잖아.

좋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지."

 

"엄마처럼, 딸처럼,

가족 같은 팀원들이 있어 즐거워"

 

아직까지 정정한 몸으로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신현분 종신은 입사 때부터 함께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또 다른 종신직원 장재동 (77세) 님을 비롯, 마음 맞는 직원들이 있어 언제나 즐겁게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 어린 나머지 직원들이 우리를 '어머니 ! 어머니 !' 하면서 따르고 일도 잘 하니까 하나도 힘들게 없어.

이 나이에 이렇게 좋은 직원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좋아,

회사 나올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즐거워."

 

젊음의 추억과 고생의 손때가 묻은 일터를 향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은 신현분 종신은 오늘도 남이섬 직원들의 입맛을 돋우어주기 위해 직원식당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있다.

 

 

 

 

김동제 金東濟

원예조경 종신직원

 

1933년생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1975년에 '계절임시직' 으로 입사했다.

설림자인 수재 민병도 선생을 도와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2004년에 정규직원이 되었고,

2007년 12월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었다.

 

 

 

 

"지금은 남이섬 숲 설립자인

수재 민병도 선생과 함께 심고 가꿔"

 

김동재 종신은 (주) 남이섬의 설립자인 故 수재 민병도 선생이 모래밭과 다름없던 남이섬을 매입하여 손수 수목을 심고 가꾸기 시작할 당시에 계절임시직으로 입사하여 남이섬 역사와 동고동락해 왔다.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가 운영하던 골프장을 정리하고 남이섬에서 본격적인 육림사업을 시작할 당시는 1975년으로, 그때부터 김동제 종신은 수재 민병도 선생과 함께 현재 울창한 숲을 이룬 300여 종의 수목을 직접 심고 가꾸어 왔다.

 

"이 지역은 원래 밤나무가 유명했던 곳이거든.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밤나무뿐이었는데

왕회장님 (수재 민병도 선생) 지시대로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어.

그때는 왜 그렇게 나무가 잘 죽는지... 심어 놓으면 죽고, 심어 놓으면 죽고...

병든 나무 살리는 일이 가장 힘든 때였지."

 

입사 이후 처음 7년간은 오직 나무 심는 일에만 매달렸다.

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그중에 50그루는 죽을 정도로 모래땅에 심은 나무를 살리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단지 나무를 살려서 멋진 숲을 조성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진심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람이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으면 가슴 아프지, 나무도 다를게 없거든.

작은 묘목일 때부터 돌보는데 어느 날부터 뿌리가 썩거나 말라서 죽게되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더라고."

 

그렇게 자식 키우듯 정성으로 돌본 어린 묘목들은 이제 사람의 키를 흘쩍 넘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현재 남이섬의 상징과도 같은 '메타세쿼이아길' 을 비롯하여 '중앙잣나무길', '전나무길', 단풍군락지인 '백풍밀원' 등이 모두 김동제 종신의 손으로 조성되었다.

 

"40여 년 몸담은 일터는 제2의 고향"

 

김동제 종신의 고향은 전북 전주. 군에 다녀온 이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 · 경기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이 경기도 가평이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은 있었지만, 남이섬에서 수재 민병도 선생과 함께 하며 나무를 향한 깊은 애정으로 평생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왕회장님께서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잘려도

당신 손가락이 잘린 듯 아프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내가 그래, 어느 센가 그 마음을 배우게 된 거지"

 

김동제 종신은 이제 나무와, 그리고 수재 민병도 선생과 인연 맺게 된 남이섬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한다.

 

"종신직원으로서 도리를 다하고파"

 

수재 선생의 호를 따서 조경과 원예 관리를 위해 이름 지어진 '수재원팀' 은 300여 종이 넘는 많은 나무들을 세심히 돌보느라 사시사철 바쁘다.

그는 '성실히 일하는 모습은 종신직원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라며 82세의 나이에도 불구, 젊은 직원들과 다름없이 앞장 서서 일하겠다는 생각이다.

 

"사장님은 겨울 같은 때, 날이 추우면 며칠 쉬었다가 나와도 된다고 하셔,

하지만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나이 많다고 힘들다고 쉬는 게 말이나 돼.

그건 종신직원으로서 도리가 아니지."

 

큰 나무를 손질하기 위해 위험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조경 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호흡을 맞추고 배려하는 일.

그는 이 부분에 있어 '수재원' 식구들은 누구보다 잘 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팀원들 간에 연령 차이가 상당하지만,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 간에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남다른 팀워크의 비결.

젊은 직원들은 나이 많은 직원들을 통해 남이섬 숲의 역사와 특성에 대해 배우고, 고령의 직원들은 젊은 직원들에게 새로운 조경 기술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김종제 종신은 이렇게 젊은 직원들과 호흡하며 일하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젊은 직원들이 잘 따라주는 데다 공기 좋은 남이섬에서

나무가 주는 좋은 기운을 매일매일 받고 있으니 늘 건강한 것 같아.

앞으로도 왕회장님이 하시던 것처럼 열심히 나무들을 가꿔야겠어."

 

김동제 종신은 수십 년 전, "나무는 자꾸 심어야 해. 또 심어가꾸라" 말하신 수재 민병도 선생의 뜻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이섬 숲을 바라보는 손님들의 감탄사에 힘을 얻어 일한다는 그는

오늘도 수많은 나무 사이를 누비며 남이섬을 푸른 낙원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조구형 趙九衡

선박운항 종신직원

 

1937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1978년부터 선장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지금까지 무사고를 기록하며 근무해왔으며 55세 대 일시 퇴직했다가 복직,

2009년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었다.

 

 

 

조구형(76)…30년 무사고 선장, 며느리와 함께 2대가 한 직장에 [출처 : 경기일보 2013년 11월 14일 자]

 

 

 

 

"37년 전 입사 스토리"

 

1978년 4월 20일. 남이섬에 입사하던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조구형 선장은 70년대 가평ㅡ홍천을 오가던 여객선을 운항하다가 남이섬에 입사했다. 회사에서는 새 선박이 건조되어 들어오던 시기에 맞춰 운항자격을 갖춘 조구형 선장을 뽑게 된 것.

당시는 전국에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여객선 운항 직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을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구형 선장은 입사 당시 당당하게 자신을 정직원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오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렸었다.

 

"그 때는 젊어서 그랬는지 이상하게 배짱을 부리게 되더라고

그런데 회사에서 나를 선뜻 정직원으로 뽑아주는 거야.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지."

 

"1984년 장마 폭우 시,

배 안에서 이틀간 고립되기도"

 

이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배를 성실하게 운항해 온 조구형 선장의 33년 남이섬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1984년 전국을 강타한 장마 때다. 당시 하루 200㎜ 이상 내렸던 폭우는 북한강에도 예외없이 쏟아졌다. 북한강 수위는 지금의 남이섬 정문 기와 부분까지 차 올랐다. 섬에 남았던 손님과 직원들이 헬기로 구조될 때, 조수와 함께 배에 남았던 조구형 선장은 당시 기둥에 묶어둔 뱃줄이 풀리면서 불어난 강물 위에 고립되고 말았다. 강은 위험지역으로 통제됐고 구조의 손길조차 받지 못한 채 비상식량도 없이 배 안에서 이틀을 굶었다.

 

"당시 조수가 젊은 사람이었어. 배고파 죽겠다고 또 무섭다고 불평하는 데 나까지 그럴 수는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참았지.

이틀 후에 물이 줄어들자, 모터보트로 컵라면을 가져다 주는데

한꺼번에 세 개를 그 자리에 먹어치웠어. 배를 채우고 보니까

장마철이라 그런지 라면 밑에 벌레가 생긴 게 보이더라고."

 

강물이 너무 줄었을 때도 고생이었다.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줄어들 때면 아침부터 간이 다리를 놓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다리를 다 놓기 전에 오시는 손님은 직접 업어서 강을 건너다 드렸다. 이런 일이 부지기수로 반복되던 시절이 1980년대였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2대가 한 직장에"

 

부자 (父子)가 함께 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조구형 선장의 큰 기쁨이다.

지난 2005년, 아들 조성춘 씨가 남이섬에 입사하면서 2대가 함께 일하게 된 것. 조구형 선장은 아들과 남이섬의 인연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내가 남이섬에 입사했지.

어린 것을 어머니께 맡겨 두고 부부만 둘이 이쪽으로 와서 일했어.

어느 날, 당시 춘성군에 살던 아들이 춘천 남면에서부터 혼자 버스타고,

길을 물어가며 엄마, 아빠보고 싶다고 찾아온거야.

그 밤에 찾아온 어린 아들을 붙들고 부부가 함께 울었어.

그 길로 아예 데려 와서 함께 살았지.

그런데 이제는 내 직장까지 따라와서 같이 일하고 있잖아."

 

현재 남이섬 환경청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조성춘 씨는 얼마 전 남이섬 호텔 정관루에서 근무하는 박선미 씨와 결혼했다.

조구형 선장은 아들, 며느리와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이색 기록까지 갖게 되었다.

 

"가장 큰 보람은 37년 무사고 경력"

 

37년 동안 배를 운전해 온 조구형 선장에게 가장 큰 보람은 '무사고

경력' 이다. 환경과 시설이 열악했던 70년대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 작은 실수 없이 운항을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은 쉽지 않은 일.

종신직원으로 선정되는 날, 직원들 앞에서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나를 뽑아준 회사에 감사한다.

앞으로 80세 정년을 넘길 때까지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고 싶다."

 

라고 밝혔던 조구형 선장은 일용직으로 일하던 어르신들이 정식 직원인 자신보다 먼저 종신직원으로 선정되는 것을 보며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남이섬의 종신직원 제도가 세간의 이슈가 되면서 TV 출연까지 하게 되고,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은 일이 노년의 직장인에게 행복한 경험이 되었다. 종신직원 선정을 통해, 지난 33년간 일한 보람을 찾았음은 물론,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게 됐다는 조구형 선장. 그는 오늘도 가평나루와 남이나루를 오가며 섬을 찾는 손님들을 부지런히 안내하고 있다.

 

 

 

 

장재동 張再東

연회부 종신직원

 

193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1975년에 '계절임시직' 으로 입사했다.

당시 남이섬에서 일하던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나올 수 없게 되자 대신 나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2004년부터 정규직원이 되어 2007년 12월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었다.

 

 

 

 

 

 

 

"시어머니 대신 출근했던 남이섬,

평생의 직장으로"

 

점심시간, 남이섬 직원들이 식당으로 모일 때면 반가운 미소로 따뜻한 밥을 내어주는 얼굴이 있다. 40년째 남이섬에서 일해오고 있는 장수직원 장재동 종신 (77세). 직원식당의 최고 연장자이자, 남이섬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며 동참해온 이력을 갖고 있다. 장재동 종신이 남이섬에 입사하게 된 것은 지난 1975년. 전부터 남이섬에서 일해 온 시어머니가 편찮아지면서 대신 출근을 한 것이 남이섬과 맺은 기나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열악했던 작업환경에도 불구, 시어머니 대신 남이섬에서 일하게 된 것이 기분 좋았던 이유는 아침마다 시어머니의 도시락을 챙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라고.

 

"예전엔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시어머니 도시락을 싼다는 게 얼마나 고민이 되던지

닭이 알을 낳으면 계란 하나 싸드리고

그것도 없으면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몰라.

그러다가 내가 일을 하면서부터는

어차피 내가 먹을 도시락이니까 대충 싸도 상관이 없었지.

도시락 걱정이 없어졌다는 즐거움으로 회사에 나오기 시작했지."

 

시어머니께 아이들 양육을 맡기고 나와서 남이섬에서 잔디도 심고, 둑 쌓는 일도 했다. 하지만 살림만 하던 여자로서 바깥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는 남이섬에 지금처럼 나무가 크게 자라있지 않던 시절, 무더운 여름, 섬 벌판에서 잔디 손질하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옛날에는 여름이 왜 그렇게 더웠는지 몰라.

뜨거운 땡볕 아래서 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정신이 다 몽롱한 데 멀리서 리어카 한 대가 오는 거야.

리어카에서 얼음물을 내리더니 나눠주는데, 그 물이 얼마나 달고 시원하던지

그때 먹었던 물이 내 평생 최고로 시원하고 달았지."

 

"정신없이 일했던 젊은 시절,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이후, 음식 솜씨가 남달랐던 장재동 종신은 남이섬에서 직영하는 선착장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20년간 했다. 아침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밀려드는 손님들 덕분에 가장 정신없이 일하던 시절이었다. 물과 커피부터 어묵, 국수, 부침개, 도토리묵까지, 메뉴가 다양한 만큼 손님들의 취향도 다양했다. 매너있는 손님, 반말하는 손님, 칭찬하는 손님, 화내는 손님...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기는 힘들었지만 직원들끼리 서로 합심하며 일했다.

 

"식당으로 손님들이 죄 밀려들 적엔 청소하는 사람,

안내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뛰어와서 누구는 커피 팔고,

누구는 서빙해주고, 서로 돕는 맛으로 하하, 호호 재미있게 일하던 때였어.

그런데서 보람을 느끼며 일했지."

 

40년째 남이섬에서 일하고 있는 장재동 종신에겐 황량한 골프장에서 친환경 문화예술 관광지로 변모한 지금의 남이섬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남이섬이 언론에 소개되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을 볼 때, 국제적 관광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종신직원 선정 이후

자녀들 앞에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

 

지난 2008년, 남이섬 종신직원으로 선정되면서는 나이 든 부모로서, 자식에게 기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분좋았다고.

 

"몸이 건강해도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

하지만 내가 일할 곳이 있다는게 좋아

벌어서 며느리 생일도 챙겨주고, 손자들 용돈도 줄 수 있으니까."

 

입사 이후, 회사에서는 손님과 직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보람으로, 집에서는 묵묵히 가족들을 이끌며 한결같은 세월을 살아온 장재동 종신, 그녀는 남이섬을 대표하는 푸근한 어머니로서 주방을 이끌어가고 있다.

 

 

 

 

유제근 柳濟根

환경미화 종신직원

 

1939년 강원도 방하리 (남이섬)에서 태어났다. 주식회사남이섬의 전신인 경춘관광개발에 입사,

골프장을 개발할 때부터 유원지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2012년 9월 1일 나미나라공화국 · 남이섬의 종신직원으로 추대되었으며, 현재 남이섬의 청소관리와

쓰레기 재활용 업무를 천직으로 여기며 성실하게 일하는 그는 남이섬 역사의 산증인이다.

 

 

 

 

 

 

 

"고향이자 평생직장인 남이섬"

 

"내가 여기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지. 그래서 우리 집은 '섬덕' 이라고 불려."

 

청평댐이 생겨 지금처럼 섬이 되기도 전 그의 집은 남이섬 남단에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잦은 물난리를 피해 섬 건너편 방하리로 이사했다. 군대 제대 후 농사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 친구와 함께 남이섬에 들어와 힘든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폐목을 정리하고, 식당 일에 다른 일꾼들의 밥을 실어 주는 일까지 지금의 남이섬이 있기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함께 온 친구와 동료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남이섬 만이 오롯이 그의 말 없는 친구로 남아 있다.

 

 

"남이섬이 변해오는 모습은 다 겪었지. 여기서만 지냈으니까.

남이섬은 내 고향이고 쑥쑥 자라는 자식과도 같아."

 

 

"40년째 나룻배로 출퇴근.

강물이 어는 겨울철엔 출근 못할까 늘 걱정"

 

"내가 와야 새도 깨고 다람쥐도 깨어나지."

 

새벽 5시쯤이면 어스름한 물길을 가르며 노를 저어 가장 먼저 출근한다. 동틀 무렵 물 안개가 피어오르기 전 섬에 도착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남이섬에 들어와 새벽 공기를 맡으며 쓰레기를 줍다보면 어느새 아침이 밝아 온다. 그는 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남이섬을 자유로이 오가지만 강물이 얼어버리면 출근하지 못한다. 나룻배가 아니면 강을 건널 방법이 없다. 그럴 때면 늘 남이섬 쓰레기들이 걱정이다.

 

"새벽에 들어와 쓰레기 줍고, 불도 피우고 찬 공기 마시면서

섬 한 바퀴 도는 게 운동이지.

매일 하다 못해 봐. 그래서 나에겐 겨울이 너무 길어."

 

 

"남이섬에서 일하며 5남매 대학 보내"

 

"뿌듯하지. 여기 나무들처럼 잘 자라줬어."

 

남이섬에서 일하며 딸 넷, 하들 하나 5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그가 9살 때 6 · 25를 겪으며 미처 못다한 공부의 꿈을 자식들이 대신 이뤄주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던 아들은 한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건강을 챙겨 드리고, 출가한 딸들은 어여쁜 손자를 안겨 드렸다. 자식들을 돌보듯 남이섬을 매만지고 있는 그의 손길 덕에 남이섬도 나날이 발전하고, 또 그의 가정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이렇게 잘들 자라주니 얼마나 고마워. 이제 더 바랄게 없이 행복해."

 

 

"76세의 나이에 일할 수 있는 직장"

 

"90세, 100세. 이 몸이 성한 날까지 일할거야."

 

남이섬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 에게 80세까지 정년을 보장하고 있다. 60세가 정년인 일반 직장과 비교해 보면 20년을 더 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는 그는 남이섬에서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을 건강의 비결이자 생활의 활력소라고 말한다. 노후에도 일할 수 있는 기쁨이 있는 것은 고향인 남이섬 곳곳에 손때를 묻혀 왔기 때문일 것이다.

 

"부지런해야 해. 움직이면 건강해져요.

늙은이를 늙은이 취급 안 하고 평생 일하라니 고맙지."

 

"여러분, 건강 지키십시오 ! "

 

건강을 위해 술과 담배는 물론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는 유제근 종신. 첫째도 둘째도 부지런한 생활을 꼽았다. 행복은 아득히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주변을 지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몸소 보이며, 오늘도 연세가 무색하게 새벽같이 강을 건너 쓰레기를 줍고 청소차를 타며 남이섬 곳곳을 깨끗이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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