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부천의 산업을 일군 사람들, 꿈으로 시대를 열다 展] 02

드무2 2025. 3. 24.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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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산업을 일군 사람들, 꿈으로 시대를 열다 展] 02

 

 

 

 

부천 중공업의 견인차, 삼양중기

 

 

 

 

 

 

이름 신길룡

직업 삼양중기 관리직

특징 우리 손으로 만든 기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성능을 최적화합니다.

 

"대량생산을 위해 자동화된 기계를 사용하고,

단계별로 공정을 관리하여

최종 제품의 우수한 품질을 보장합니다."

 

기계가 대량 생산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기술 발전에 발맞춰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새로운 기계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1. 서상록 회장의 이천물산 설립

삼양중기는 해방 이후 부천지역에서 중공업을 선도한 대표적인 기계제조 기업이다. 삼양중기의 전신은 재일교포 서상록 회장이 설립한 이천물산이었다. 서상록 회장은 1910년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청소년기인 17세에 일본 오사카에 가서 양말공장, 봉제공장, 프레스공장 등에서 일하다가 직접 공장을 세웠다. 이때 세운 기업이 '이천공업' 이다. 사명에 이천을 붙인 이유는 서상록 회장이 이천 서씨이기 때문에 이를 따온 것이다.

일본에서 회사를 크게 키운 서상록 회장은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1949년 1월 조국으로 금의환양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에 있는 모기업과의 물자교류를 위해 인천에 있던 도시바 공장을 인수하여 이천전기옥업을 설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부터는 여러 자회사를 세웠고, 1963년에는 이천산업을 설립하였다. 1969년에 인천과 가까운 부천지역에 이천물산을 설립한 것은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2. 이천중기로의 전환과 발전

곧이어 부천이 시로 승격한 1973년에는 이천물산을 이천중기로 전환하여 기계 주물, 제지 기계, 롤러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상록 회장은 일본에 이천제강을 세웠는데, 이곳에 주물과 기계 등을 수출하기 위해 이천중기가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 내에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기에 중화학공업 기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시대적인 요인도 있었다. 농업과 상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부천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경인공업지대가 발전하자 경인국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시 승격 이후에는 경인고속도로와 통근 전철이 갖춰져 인구가 급증하였다.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공급되면서 부천은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변에 여러 분야의 공장들이 있고, 노동력도 쉽게 구할 수 잇으며 교통이 편리한 위치였기에, 서상록 회장이 이천중기를 발족한 것이었다. 이런 여건들을 바탕으로 이천중기는 1973년 이후 국내 주물시장의 60%를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3. 삼양사 인수로 맞은 중흥기

하지만 이천중기는 곧 이천그룹의 경영난과 1970년대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재정난에 빠지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이천중기에 투자를 시작한 것이 삼양사였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발맞춰 이천중기에 관심을 가지던 삼양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투자를 시작하여 1977년 8월 1일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삼양사는 이천중기 공장의 설비들을 현대화하고 일본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싱가폴, 중동, 콜롬비아 등으로 수출을 다변화하였다. 1979년 2월에는 공장의 명칭을 삼양중기로 바꿨다.

삼양중기는 기계주문, 프레스, 제지, 롤 등에 대한 생산력을 안정화하여 대우중공업 등지에 출하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기계의 국산화에도 힘써서 마침내 까다롭기로 유명한 제지기계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하여 제지기계 분야에서 국내 최고 공급업체로 발돋움하였다. 또한 꾸준히 설비를 늘리고 교체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5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할 정도로 기업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켰다.

 

 

 

 

4. 부천 공업사의 한 획으로 남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삼양중기의 성장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환경적 거부감이 커진 반면, 수도권인 부천은 거주지로서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는 외환위기가 터져 매출이 급락하였다. 이로 인해 삼양중기는 조직 개편과 구조조정을 단행하였고, 노사갈등이 일어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소사장제 등을 도입하여 회복을 하는 듯하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과거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결국 2009년에는 사명을 삼양엔틱으로 바꾸고 환경시설 제작업체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2014년에는 삼양사의 지주회사 (持株會社)인 삼양홀딩스로 합병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부천의 공업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삼양중기는 시민들의 추억 속에 남게 되었다.

 

 

 

 

 

 

 

 

 

 

 

 

 

 

 

 

 

 

 

화장지의 대중화 (화장지 생산과정)

 

 

 

 

 

 

 

 

 

 

안전모와 작업복

 

삼양중기에서 사용하던 안전모와 작업복이다.

 

신길룡 소장품

 

 

 

 

 

 

 

기계목형

 

삼양중기에서 기계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던 목재 기계 제작틀이다.

 

부천시립박물관 소장

 

 

 

 

 

 

 

 

 

 

 

 

 

 

 

 

 

 

 

 

 

 

 

 

 

 

 

 

도면과 도면장

 

삼양중기에서 기계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하던 도면과 도명장이다.

 

 

 

 

 

 

 

 

 

 

삼양중기 우수사원 표창장

1991

 

표창장 | 삼양제109호 우수사원상 | 소속기계부 | 성명 신길룡

 

위 사원은 지난 일년간 맡은 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타 사원의 모범은 물론 회사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1990년도 우수사원으로 표창합니다.

 

1991년 1월 4일

삼양중기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허령

 

신길룡 소장품

 

 

 

 

 

 

 

 

 

 

삼양중기 2008년 사보

2008

 

신년 시무식에서 우수사원상을 수상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길룡 소장품

 

 

 

 

 

 

 

 

 

 

 

 

 

 

 

 

 

 

 

 

 

 

 

 

 

작업수첩, 계산기, 시계, 명함, 사원증, 식권 등

 

신길룡 씨가 삼양중기에서 근무하며 사용한 여러 도구들이다.

 

신길룡 소장품

 

 

 

 

 

 

 

 

 

 

 

 

 

 

 

 

 

 

 

 

 

 

신길룡 씨의 사진들

 

신길룡 씨는 1970년대 초부터 2017년까지 삼양중기에서 근속하였다. 그의 사진 앨범에는 삼양중기와 함께 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길룡 소장품

 

 

 

 

K 반도체의 시작, 한국반도체에서 삼성까지

 

 

 

 

 

 

이름 김영숙

직업 한국반도체 생산직

특징 반도체 생산직은 제조공정의 핵심! 웨이퍼를 가공하고 장비 운영, 제품 검사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각 공정의

        정확성을 보장해야 한다.

 

"힘들죠, 교대 근무에,

우리 것으로 처음 만들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더욱 발전하고 언젠가는 1등도 할 수 있겠죠."

 

청정실에서 일하기 때문에 화장품은 언감생심, 6년 넘게 생얼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이라는 자부심이 얼굴 가득하다.

 

 

 

 

 

 

 

1. 반도체 조립 하도급 시대

1960 ~ 70년대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반도체 부품의 단순 조립 생산 단계에 있었다. 1965년 미국 코미 (Komy) 투자 한국 최초의 반도체 관련 기업인 고미전자사업 (주)을 시작으로 트랜지스커, IC, 다이오드, 메모리 등 반도체 부품 조립생산에 들어갔다. 1967년 모토로라, 1968년 아남산업, 1969년 한국전자와 금성전자 등이 조립생산 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외국기업들의 조립 하도급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국업체들은 막대한 물량의 주문을 소화해 내면서 반도체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미국을 필두로 한 반도체 칩을 잘 패키징해서 정해진 시일 안에 납품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 생산 반도체 패키징 거의 대부분을 도맡아서 조립하면서 한국 반도체 패키징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40%를 정유하기도 하였다.

 

 

2. 한국 최초 전 공정 반도체 제조공장

1974년 모토로라에서 반도체 핵심기술을 연구한 강기동 박사의 주도하에 한국 최초로 웨이퍼✷부터 패키징까지 모든 공정을 시작한 한국반도체 (주)가 설립되었다. 경기 부천 한국 최초 반도체 소자 생산 공장에서는 LED 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 칩을 개발했다. 세계 네 번째로 생산된 전자시계용 CMOS 칩✷✷이며 한국 최초로 반도체 칩을 제조하는 역사적 업적을 이룬 것이다. 이후 한국반도체는 삼성반도체, 삼성전자로 변천해 가면서 한국반도체 사업을 몇 단계나 높여왔다.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 시장 1위에 올라서는 확고한 발판을 만들었다.

 

✷ 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으로, '한 장의 웨이퍼에서 얼마나 많은 D램을 만들어내느냐' 가 전체 D램 생산량을 결정한다.

 

✷✷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주요 칩 대부분은 CㅡMOS 기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1976년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신문광고 (매일경제 1976. 3. 26.)

 

 

 

 

3. 삼성, 부천에서 반도체 산업진출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전격적으로 인수한다. 한국반도체 생산에서 부천 반도체공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사건은 매모리칩의 개발이다. 삼성전자 내부 수요보다는 그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품목을 개척하고자 한다. 거기에 가격 변동성이 크고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D램을 주력제품으로 선택한다.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인식이었다. 반도체 생산 및 연구는 가속화되었고 1983년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첨단 반도체 사업 추진을 위한 첫 제품으로 한국은 당시 선진국과 4년 6개월 기술 격차에서 256K D램에서는 3년으로 줄었고, 이후 1M D램, 4M D램에서도 지속적으로 줄여 나간다. 1989년 10월 선진 반도체사와 같은 시기에 16M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6년이라는 단기간에 5세대에 걸친 D램을 개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삼성반도체 부천공장 (왼쪽) / 삼성반도체 부천 공장 (오른쪽)

 

 

 

 

 

 

 

 

 

 

4. 삼성반도체 부천공장, 60K D램 개발

삼성은 반도체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고, 생산 및 연구도 가속화하였다. 1983년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였다. 첨단 반도체 사업 추진을 위한 첫 제품으로 한국은 당시 선진국과 6년 6개월의 기술 격차에서 256K D램에서는 3년으로 줄였고, 이후 1M D램, 4M D램에서도 지속적으로 줄여 나아갔다. 1989년 10월에는 선진 반도체사와 같은 시기에 16M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6년의 단기간에 5세대에 걸친 D램을 개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94년에는 한국 반도체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삼성반도체 D램 산업의 패권국이던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의 반도체 칩에 트랜지스터와 캐퍼시터가 각각 2억5천6백만 개가 집적된 첨단 메모리 반도체 칩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2001년 100나노 기술의 성공으로 나노반도체 시대를 열면서 세계 반도체 업계 2위에까지 올라선다.

 

 

 

 

64K D램 개발 성공 기사 (경향신문 1983. 12. 06) / 64K D램

 

손톱만 한 칩 안에 15만 개의 소자가 800만 개의 선으로 연결된 형태로, 8천 자의 글자를 기억할 수 있는 초고밀도 집적회로 (VLSI)급 반도체

 

 

 

 

 

 

 

5. 부천, 또 다른 반도체산업 기지

1997년 외환위기 IMF 상황에서 삼성은 당시 기흥공장의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집중하였고 비메모리 분야인 부천공장을 외국계 기업에 매각한다. IMF에 의한 이 결정으로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다.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은 1998년 전력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는 미국의 페어차일드코리아에 인수되었고 2016년에는 차세대 실리콘 카바이드 관련 미국 온세미컨덕터가 들어오면서 또 다른 형태의 반도체 산업 기지로 자리를 잡았다. 삼성반도체✷✷✷ 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아닌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 반도체는 사용목적에 따라 정보저장이 목적인 비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2가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는 컴퓨터의 뇌로 불리는 CPU (중앙처리장치)가 있다.

 

 

 

 

◀ 초기 반도체 공장 ▲ 한국반도체 디퓨전실 모습

 

 

 

 

 

 

 

 

 

 

 

 

 

 

 

 

삼성전자 <부녀사원 및 아르바이트 여대생 모집> 광고

1984

 

월간 『아르바이트 소식』 창간호 (1984. 7)에 게재된 삼성전자의 구인광고이다.

 

 

 

 

 

 

 

 

 

 

삼성전자 <6년동안 화장하지 않은 이야기> 광고

1992

 

한국예총 부천지부에서 진행한 제8회 복사골예술제 팜플렛에 게재한 것으로, 시리즈 광고의 휴먼테크 품질편과 삼성전자 부천공장의 지역사회 연대를 결합한 내용을 실었다.

 

 

 

 

 

 

 

 

 

 

삼성반도체 <POWER MOSFETㅡSFET> 광고

1988

 

월간 『PC 저널』 (1988. 4)에 게제된 삼성반도체 제품 (전자부품) 광고이다.

 

 

 

 

 

 

 

삼성전자 브랜드 광고

1989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통신이 합병된 이후의 브랜드 광고로, 월간 『스타 (STAR)』 창간호 (1989. 1)에 게제되었다.

 

 

 

 

 

 

 

삼성전기 브랜드 광고

1988

 

『월간중앙』 복간호 (1988. 3)에 게재된 삼성전기 브랜드 광고이다.

 

민경남 소장품

 

 

 

 

 

 

 

 

 

 

 

 

 

 

 

 

 

 

 

 

 

 

삼성전자 5인치 컬러 텔레비전 (CTㅡ061S)

1990년대

 

소형 컬러 텔레비전으로, 당시 가전제품 기술의 진보를 반영한다. 작은 크기로 이동성이 좋아 어디서나 TV 프로그램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전동현 소장품

 

 

 

 

 

 

 

삼성전자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 (CTㅡ1456S / Kㅡ52)

1980년대

 

1988년에 제조된 삼성전자의 CRT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한국 전자 산업의 성장과 가정용 전자기기의 대중화를 보여준다.

 

전동현 소장품

 

 

 

 

 

 

 

삼성전자 브라운관 흑백 텔레비전 (SWㅡC342)

1970년대

 

붉은색 외관과 소형 디자인은 당시 텔레비전이 단순한 정보 전달 기기를 넘어 실내 인테리어의 일부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전동현 소장품

 

 

 

 

 

 

 

삼성전자 붐박스 (RCㅡF15S)

1980년대

 

1970 ㅡ 80년대 유행하던 휴대형 오디오인 붐박스 (Boom Box)이다.

 

전동현 소장품

 

 

 

 

전시를 마치며

 

부천시립박물관의 특별전시 <부천의 산업을 일군 사람들, 꿈으로 시대를 열다>에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는 부천의 산업 발자취를 돌아보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천시립박물관은 2023년 부천시 승격 50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시 50년, 그 발자취를 찾아서> 展 (전)을 개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테마 박물관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부천의 역사를 보다 깊이 있게 기록하고 전시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부천 근현대기업 조사 연구 용역 보고서』를 통해 부천의 산업사를 새롭게 탐구하게 되었고, 이 전시가 그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부천의 근현대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비록 유물을 부족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부천의 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 4 명의 페르소나는 각기 다른 꿈을 가지고 치열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여정을 통해 부천의 근현대 산업의 역동성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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