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에서 서울풍물시장까지] 05
서울풍물시장
서울풍물시장 장똘이
빨간동 식당가
곡식을 담아 두는 저장고
'뒤주'
뒤주는 수확한 곡식을 담아 두는 저장고다. 쌀을 담아 두는 쌀뒤주와 벼를 보관하는 나락뒤주가 있다.
적은 것은 50리터에서 큰 것은 200리터의 쌀을 담을 수 있으나, 대부분 한 가마 (80㎏)짜리가 많다. 대청 또는 부엌에 놓고 사용하는 옻칠을 하거나 자개를 입히거나 장식을 다는 치장을 하기도 한다.
'쌀궤'라 하기도 하나 주로 '뒤주'라 부른다.
알짜배기만 걸러내는
'풍구'
풍구는 쭉정이나 먼지 등을 가려내는 데 사용한 농기구이다. 지역에 따라 '풍로' (경상남도 영산, 전라남도 보성), '풀무', '풍차 (風車)'로도 불리며 《북학의》에는 '양선 (颺扇)'으로 《농정촬요》에는 '풍선차 (風扇車)'로 표기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둥근 통 안에 회전 지름이 50 ~ 100㎝ 되는 일종의 송풍기의 축을 장치하고 밖에서 이것을 돌리면 큰 바람이 나도록 만들어져 있다.
축을 돌리면서 위에서 곡식을 흘려 넣으면 겉껍질이나 검부러기들은 바람에 날려 옆으로 빠져나가고 낟알만 아래로 떨어진다.
양 (부피)를 재는 기본 도구
'됫박'
중량 (重量)을 재던 단위가 ㎏으로 통일 (統一)되기 전까지 사용되던, 되나 말 (斗)의 양을 재는 규격 도구이다.
민간에서는 관되 (官升, 官斗), 즉 공식적으로 인정된 되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에서 민간을 상대로 하거나 민간이들 간의 실제 거래에서는 원래의 양보다 많이 들어가는 되가 널리 쓰였다. 됫박, 또는 됫바가지는 이와 같이 공식적인 양보다 더 많이 담을 수 있게 만든 되로 민간에서 널리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되를 될 때는 '깨끼', '마세', '평승 (平升)'이라 하여 원통형 막대인 밀대로 깎아서 재는 방법과 '고봉 (高峯)', '고승 (高升)'이라 하여 수북히 쌓아 재는 방법이 있는데, 고봉으로 하면 2홉 (合) 정도 더 담을 수 있다.
수확한 벼 알곡을 훝는 연장
'홀태'
홀태는 촘촘한 날 사이레 벼 · 보리 · 밀 따위의 이삭을 끼워 넣고 훑어내는 농기구이다.
홀태는 '훑다 → 훑 + 애 → 홅애 → 홀태'로 훑어낸다는 의미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지역에 따라 '기네', '베홀깨', '홀챙이', '치게', '청치기개', '찌깨', '청치', '왜홀태', '벼훑이', '호리깨', '그네'라고도 한다.
알곡을 떨어내는 탈곡 연장
'도리깨'
도리깨는 보리 · 콩 · 깨 · 조 등과 같은 곡식의 이삭이나 껍질을 두드려 그 속에 있는 알곡을 떨어내는 데 사용하는 탈곡용 농기구이다.
조선시대의 농서인 《농사직설》의 '고로 (栲栳)', 《과농소초》의 '연가 (連枷)', 《농정촬요》의 '도리편 (兜里鞭)' 등은 도리깨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을 지역에 따라 '도루깨', '돌깨', '도깨'라고도 불렀다.
낟알을 떨어낼 때 사용한 농기계
'탈곡기'
탈곡기는 벼 · 보리와 같은 곡식을 탈곡하는 연장이다. 지름이 40 ~ 50㎝ 되는 원통에 말굽쇠 모양으로 구부린 철사가 촘촘히 박혀 있고 이와 연결된 발판을 밟으면 원통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원리이다. 회전되는 원통에 볏단을 내리면 촘촘히 박힌 철사에 치여 알곡이 떨어진다.
두 사람리 한 조가 되어서 탈곡을 한다. 두 사람이 같이 탈곡기를 밟고, 한 사람이 볏단을 준비하고 애벌떨이를 하면 다음 사람이 볏단을 받아 마저 떤다.
그러나 일할 양이 많지 않거나 사람이 부족한 경우, 혼자서도 가능하다.
밭에 생명을 불어 넣는
'후치'
후치는 쟁기와 비슷한 형태이나 쟁기보다 크기가 작고 가벼우며, 보습 끝이 무디고, 휘어진 각도가 작다. 또한 쟁기의 보습 위에 부착되어 일구어진 흙덩이를 일정한 방향으로넘겨주는 역할을 하는 볏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후치는 쟁기로 갈아 놓은 밭의 이랑을 직거나 밭고랑에 난 풀을 긁어 없애고 북을 주는데 사용하던 농기구이다. 후치로 김을 매면 이랑 사이에 난 풀이 죽고,, 북을 돋우어서 뿌리에 영양이 공급되며, 고랑의 물도 잘 빠지기 때문에 호미로 김을 매기에 앞서 후치로 전체적인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일록에는 후치질의 효과를 가뭄방지, 바람에 의한 쓰러진 방지, 장마의 피해 방지 등으로 설명하며 밭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후치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쟁기'
쟁기는 논밭을 가는 대표적인 농기구로, 주로 소에 메워 사용한 축력용 도구이다.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쟁기만을 사용하여 하루에 보통 3,300㎡ ~ 5,000㎡ 정도의 논밭을 갈 수 있었다.
쟁기는 때에 따라 사람이 직접 끌거나 주로 소에 메워 사용하며, 끄는 소의 마리 수에 따라 크게 호리와 겨리로 나뉜다. 그 중 겨리는 강원도 등지의 산간 밭농사 지역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농기구이다.
또한 산간지역의 경우에는 밭농사를 주로 짓고 비탈진 경작지가 많기 때문에 흙을 뒤집는 볏이 없는 쟁기인 '극쟁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소 대신 사람이 끄는 인력용 쟁기인 '인후치'로 밭을 갈기도 한다.
흙 속에 숨을 불어 넣는
'써레'
5월 초순의 입하 (立夏, 5월 5 ~ 6일)가 다가오면 모내기를 시작하는 데, 이때 사용하는 농기구가 바로 써레이다. 써레는 모를 심기 전에 논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구이며, 논밭을 가는 쟁기와 함께 봄철 농사일의 대표적인 농기구이다.
옛 속담에도 '입하물에 써레 싣고 나온다'라 하여 입하 무렵이면 들에 가지고 나가서 써레질을 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재래종 벼로 이모작 농사를 지을 때에는 입하 무렵에 못자리를 만들기 때문에, 농부들은 써레와 번지를 사용하여 모판을 부드럽고 판판하게 고른 뒤에 볍씨를 뿌려 못자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써레질은 논밭의 흙을 썰어 부드럽게 만든다는 뜻으로, '삶기'라고 한다. 따라서 써레질을 '논 삶는다'라고도 한다.
소를 보호하고 짐을 싣는
'길마'
과거 우리 조상들은 무거운 짐이나 농산물을 옮길 때 소나 말의 힘을 주로 이용하였고, 소나 말에 짐을 싣기 위해 다양한 보조도구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 때 사용한 도구는 길마, 옹구, 거지게, 발채 등으로 다양한데, 그 중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 길마이다.
길마는 소나 말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얹는 일종의 안장으로, 물건을 양쪽에 실어 소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소에 실은 물건이나 짐이 소의 등이나 옆구리에 닿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겸한다.
길마 위에는 거지게나 발채, 옹구 등 바구니 역할을 하는 용구를 얹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장터 등 먼거리를 다녀올 때에도 길마는 매우 긴요한 도구였다.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구유'
구유는 보통 굵은 통나무를 우묵하게 파서 만들었는데, 튼튼하고 무게가 있어 소가 밟거나 들이 받아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통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널판지를 구부려 위는 넓고 바닥은 좁게 만들어 쓰기도 하였으며, 또는 두껍게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통나무를 파서 구유를 만들었더라도 이를 바로 쓰면 터지기 때문에 2 ~ 3년 동안 그늘에 두어 오줌 따위를 받아두었다가 사용했다.
이러한 '예비 구유'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사랑채 부근에 두어 오줌을 받는데 이를 '오줌 구유'라고도 부른다.
근대화의 표상
'흑백 TV'
국산 흑백 TV 1호인 VDㅡ191이 생산된 것은 1966년 8월.
'진공관식 19인치 1호 제품'이라는 뜻의 'VDㅡ191'은 19인치의 경우 8만 7,683원이었고 80㎏짜리 쌀 한 가마가 2,500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쌀을 25가마 넘게 살 수 있는 고가였음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72년 정부 주도하에 장기 월부제로 고향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내는 '효자 TV 캠페인'도 전개되어 농어촌에 14인치 수상기 100만 대 이상을 보급해 농촌의 텔레비전 보급률을 높이기도 하였다.
東廟 현판
지하철 1호선 동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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