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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강 전쟁의 원인 " 국가 및 사회적 차원(1) 국가란 전쟁을 위한 최적의 조직

13강 전쟁의 원인 " 국가 및 사회적 차원(1) 국가란 전쟁을 위한 최적의 조직 4) 호전적 전쟁 철학 로버트나이스벳(Robert Nisbet)은 그의 사회사상에 관한 저서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하고 있다. '사회철학에 관한 책의 맨 앞에서 전쟁과 군국주의를 다루는 것이 이상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서양의 사회사 특히 서양의 지성사 및 서양인의 가치에 관한 역사연구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분석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좋아하던 않던 간에 지난 3,0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전쟁이 많았고, 전쟁에 의해 지배당했고, 그리고 군사 문명이었다는 증거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명한 전쟁사학자인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는 '유럽의..

12강 전쟁의 원인 : 전쟁과 철학

12강 전쟁의 원인 : 전쟁과 철학 1) 전쟁은 인간 사고(思考)의 결과 만일 전쟁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단지 인간들이 만든 기계들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극단적으로 인간들의 싸움을 로봇이 대신해 주게 될 날이 온다면 그때의 전쟁은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의 가장 기본적 특징인 인간 생명의 대규모적 살상, 그리고 거기서 연유하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전쟁의 본질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로봇이 인간 대신 싸워주는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게임일 것이다. 그리고 자기편의 로봇이 다 부서진 국가가 상대방의 의사에 굴복할 리도 없을 것이다. 아직도 총을 들고 전쟁터에 달려갈 수 있는 인간들이 살아있을 터이니 말이다. - 『전쟁과 국제정치』 (2020.5.30) by 이춘근 p..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2) ‘하늘의 요새’가 펼친 융단폭격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2) ‘하늘의 요새’가 펼친 융단폭격 1950년 8월 15일을 며칠 앞둔 시점, 낙동강 전선에선 위기감이 시시각각으로 커가고 있었다. 다부동 쪽에서 적은 심하게 우리를 압박해 왔다. 나는 병력 증원(增援)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지상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 하늘 뒤덮은 B-29 융단폭격 26분간 폭탄 3200발 쏟아부어 미군 고문관 메이 대위를 불렀다. 나는 “상황이 매우 심각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메이 대위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는 내게 “지금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사령부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전화통을 들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아주 급하다”고 보고한 뒤 “병력 증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 8군 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1) 숨가쁘게 넘긴 고비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1) 숨가쁘게 넘긴 고비들 미군 1기병 사단장인 게이 장군(가운데)이 1950년 8월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던 국군 1사단을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왼쪽), 최영희 15연대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아래 사진은 6 · 25 당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던 헤럴드 트리뷴 소속 전설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 [다부동 구국 전투사·미 육군부 자료] 미국이나 연합국에서 온 종군기자들이 전선에 가끔 나타났다. 주요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나중에 방문해 꼼꼼히 취재하는 기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국군이 새로 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전차 넉 대를 잡은 것이 큰 뉴스였던 모양이다. 후방에 포 쏴 아군 후퇴 막고 전쟁통에 병풍..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방어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군과의 연결점을 제대로 이었지만,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고 강렬한 기세로 몰려오는 적 앞에서 왜관~포항을 잇는 Y축선 서쪽 끝의 국군 1사단 방어선은 여지없이 흔들릴 기세였다. 미군이 건넨 3.5인치 로켓포 … 더이상 탱크가 두렵지 않았다 경북 상주에서 다부동, 그리고 대구를 잇는 간선로는 적이 집중적으로 노린 공격선이다. Y선 동쪽 지역의 국군 방어선도 적의 강한 공세를 받고 있었지만, 1사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나는 15연대를 좌익, 12연대를 가운데, 11연대를 우익에 배치했다. 방어 전면은 21㎞였다. 사단의 예비 병력을 별도로 두지 않고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세운 것이다. 적의 공격에 한..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1950년 8월 12일이다. 북한군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면서 우리 1사단이 연대별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구에 있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단 사령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303고지’에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단의 15연대가 방어를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왜관 X-Y축 꼭짓점에서 180㎞ 낙동강 방어선이 완성됐다 미 8군은 “사단장이 직접 나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관 지역을 방어하는 미 1기병사단과 접촉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15연대장 최영희 대령과 참모를 대동하고 303 고지 쪽으로 갔다. 미군들이 나와 있었다. 미 1기병 사단 8기병 연대 2대대장 해럴드 존슨 중령(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 상황은 험악했다. 미 24사단의 방어를 뚫고 내려온 북한군 3사단(사단장 이영호)이 우리의 정면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다부동을 압박하는 적의 주공(主攻)이었다. 이화령과 조령을 넘어온 적 15사단(사단장 박성철)과 13사단(사단장 최용진)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들을 맞는 국군 1사단은 후퇴하면서 합쳤던 5사단 병력까지 모두 포함해도 9000명이 채 안 됐다. 정규적인 1개 사단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 사단에 전차와 대포로 무장한 적을 맞았던 것이다. “8·15까지 부산 점령하라” 김일성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려 김일성의 발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는 개전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안 있..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나는 광범위한 낙동강 41㎞ 전선에서 가까스로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각 연대 예비 병력으로 야간에 치고 들어온 적군을 역습함으로써 주요 거점을 지킬 수 있었던 게 한 요인이다. 미군의 공중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미 공군은 우리가 지원 요청을 하면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서 폭격기를 발진시켜 30분 이내에 아군 상공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한 차례 비행에서 두어 시간씩 폭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전차와 야포 및 주력 부대를 현지의 수많은 사과밭이나 야산에 숨겨 뒀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공격해 왔다. 이곳 다부동마저 뚫리면,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국군 1사단 작전처 소속이었던 남성인 중위는 공중..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㊻ 고등학생 김윤환(전 신한국당 대표) 1950년 8월 1일, 한국에 도착한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지연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미군 정보당국이 7월 초순 이후 전혀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던 북한군 6사단의 위치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남으로 우회했다. 모두 2개 사단이 호남을 거쳐 경상도 서부 지역으로 쳐들어 왔다. 북한군 6사단은 거창과 진주를 점령하더니 급기야 마산까지 공격해 왔다. 미 8군이 크게 당황한 이유다.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을 36시간에 걸친 긴급 철도 수송 작전으로 마산 전선에 투입했다. 적은 남한 청년을 총알받이로, 그래도 총구를 겨눌 수밖에 … 낙동..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㊺ 별을 달다 국군 1사단은 국군 17연대, 미군 24연대와 연합작전(聯合作戰: 두 나라 이상의 군대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벌이는 작전)을 경북 상주에서 펼쳤다. 갈령을 넘어오는 적 15사단 주력(主力)을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7월 23일부터 이틀에 걸쳐서였다. 우연히 맞은 기회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적을 맞아 싸우는 연합작전을 처음으로 수행했다. 국군이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 북한군을 제대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7월 25일 김홍일 1군단장으로부터 새 명령이 내려왔다. 지금의 전선(戰線)을 미 24연대에 맡기고 상주의 상주읍에 다시 모여 조직을 재편한 뒤 상주 함창읍으로 진출하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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