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미 동맹의 그림자]
경기 양주 광적면 ‘효순미선평화공원’의 모습.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은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 잔치에 가던 중 이 공원 바로 앞 언덕에서 미군의 공병 장갑 차량에 깔려 숨졌다. / 남강호 기자
"미선이 살아 돌아올까 봐 1년간은 대문도 못 잠갔다"
故 심미선양 부모 인터뷰
미군 장갑차에 희생, 그 후 21년
"딸 살아있었다면 결혼했으려나···
매년 열리는 추모제도 참석 안 해
마음이 아파서 차마 갈 수가 없다
이해한다며 온 사람 다 반미단체
미선이 사진 가져가 남은 게 없어
딸 이젠 반미에 안 불려 다녔으면···
미군, 고의로 사고 내지 않았을 것
운명이다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4일 오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2리의 한 언덕길. 길옆 ‘효순미선평화공원’ 담벼락엔 고 (故) 신효순양과 심미선양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두 여중생은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 잔치에 가던 중 이 언덕에서 미군의 공병 장갑차량에 깔려 숨졌다. 미군 장갑차는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었다. 여중생의 죽음에 전국적으로 반미 여론이 들끓었다.
공원을 지나 효순 · 미선양이 살던 거마울 마을 초입에 다다르니, 논밭에서 나는 두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을 초입엔 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 (69)씨와 어머니 이옥자 (66)씨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논농사를 하면서 집 옆 밭에서 총각무와 마늘, 깻잎도 기르고 있었다. 마을 토박이인 부부는 딸의 죽음 뒤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21년 전,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미선이네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 으로 불렸다고 한다. 미선이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집의 막내였다. 이옥자씨는 “막내딸 미선이가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교복 모델을 해도 되겠다고 했었다” 며 “미선이가 늘 그렇듯 대문 열고 혹시라도 돌아올까 봐 죽고 나서 1년간은 문도 못 잠갔다” 고 했다. 이씨는 벽에 붙어 있는 여섯 살 난 손녀 사진을 바라보며 “꼭 미선이를 닮아서 이렇게 예쁜가, 손녀가 추모 공원에 다녀오고선 ‘이모 있는 공원에 다녀와서 인사하고 왔어요’ 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더라” 고 했다. 이씨는 “우리 미선이도 살아있었으면 결혼했으려나” 라고 했다.
고 (故) 심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씨가 4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의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이태경 기자
부부는 둘째 딸의 자식인 손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 이씨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 미선이 예쁜 사진들은 없냐고 해서 줬더니, 그 사진들을 다 가져가고 남아있는 사진이 없다” 며 “살아 있을 때 자식들 셋이랑 가족사진이라도 찍을 걸 아쉬웠다” 고 했다.
심수보씨는 “세상을 살다 보면 편안하기만 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다” 며 “딸의 죽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별안간 닥친 일이기 때문에 정신을 하나도 차리지 못했다” 고 했다. 심씨는 “그저 나의 운명이다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 했다.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부부의 일상은 딸의 죽음 이후로 바뀌었다. 당시 미군 장갑차 조종수 2명은 주한미군지위협정 (SOFA)을 적용받았기 때문에 미군에서 사건을 조사했다.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받은 둘은 미 군사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이 나오자, ‘SOFA를 개정하라’ 는 촛불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고 (故) 심미선양의 아버지 심수보씨가 4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의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심씨는 “먼저 떠나보낸 막내딸의 제사는 매년 기일마다 가족들끼리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며 “막내딸을 잃은 직후엔 미군에 원망도 컸지만, 지금은 우리 딸을 고의로 쳤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고 했다. / 이태경 기자
각종 단체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씨는 “처음에는 딸이 돌연 사고로 죽었으니 원망도 있었고,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며 “집회도 참석했는데 누군가 ‘자식 팔아넘기는 거 아니냐’ 는 이야기를 수군대기도 했고, 누군가는 마을에 들어오는 35번 버스 안에서 미선이 이야기를 엉뚱하게 해서, ‘내 딸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지 마라’ 며 싸운 적도 있다” 고 했다. 심씨는 “유가족을 위한다고 오는 단체가 하도 많아서 혼란스러웠다” 고 했다.
부부는 매년 기일마다 진행하는 추모제에 따로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씨는 “처음엔 부모 마음에 추모 공원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그 공간만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아파서 차마 갈 수가 없다” 며 “지금 돌이켜 보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고 했다. 심씨는 “나를 이해한다고 오는 사람들이 다 반미 단체더라” 며 “여러 정치인이 오지만, 자기 자식과 아버지가 죽었어도 그렇게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다녔을까” 라고 했다. 심씨는 “자식이 죽기는 했지만, 설마 그 미군이 정말 우리 딸을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해서 치였을까, 사람이었다면 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며 “그냥 이제 우리 딸이 계속 반미 운동에 불려 다니지 않고, 미선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고 했다.
효순양의 부모들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마을 초입에서 17분쯤 걷자 나타났다. 농기계와 손수레, 비료 포대, 삽 등이 마당에 쌓여 있었다. 벨을 누르자 집에 있던 효순이 어머니가 나왔다. 그는 “더 이상 떠나간 효순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싶다” 고 했다. 미선양 부부는 “효순이 집은 딸이 죽고 나서 하도 시달려서 외간 사람을 잘 안 만난다” 고 했다. 미선양 아버지 심수보씨는 효순양 아버지와는 오랜 동네 친구라고 했다.
양주 = 구아모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5일 자]
미군 기지촌의 눈물
지난달 15일 찾은 경기 동두천시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성병관리소였던 건물의 모습. 폐허가 된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엔 잡초가 무성하고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graffiti · 낙서화)는 ‘흉가 체험’ 방송을 한다며 찾는 유튜버들이 남겨뒀다. / 박상훈 기자
당시 부대 반경 2㎞ 성매매 허용
성병 걸린 '양공주' 가뒀던 건물
27년간 방치된 채 흉물로 변해
지난달 15일 찾은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자락. 등산객들이 오가는 길옆에 2m 높이의 철제 펜스가 처져 있었다. 펜스 안쪽으로 폐허가 된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잡초가 무성하고 벽면이 무너져 내린 이 건물은 ‘양공주’ 라 불렸던 기지촌 여성의 ‘성병 관리소’ 중 한 곳이다. 1973년부터 정부가 운영하다 1996년에 폐쇄됐다. 미군들은 이곳을 ‘몽키하우스’ 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 격리된 여성들이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 같았다는 것이다.
동두천은 6 · 25전쟁 이후 대표적인 주한 미군 주둔지가 됐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 제정으로 집창촌 등에서의 성매매는 불법이 됐지만, 기지촌 반경 2km는 예외였다. 기지촌마다 ‘양공주’ 들이 생겼다.
1960년대 초반 정부는 미군 기지촌 주변에 성병 관리소인 ‘낙검자 수용소’ 를 만들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주 2회 성병 검진을 받고 성병이 없다는 검진증을 발급받아야 성매매를 할 수 있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검진에서 떨어졌다’ 는 낙검 (落檢)자로 분류돼 수용소에 갇혔다.
이곳에 수용된 여성 중에는 항생제인 페니실린 과다 투여로 쇼크사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여성들은 동두천 상패동의 무연고 공동묘지에 묻혔다.
작년 9월 대법원은 “정부의 기지촌 조성 · 운영 · 관리 등 불법 행위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 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117명에게 총 6억4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이 ‘낙검자 수용소’ 는 1987년부터 사실상 운영이 중단됐고, 민간 소유 부지에 있던 건물은 27년간 방치됐다. 동두천시는 이 건물을 철거하는 것을 포함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는 중이다. 일부 주민은 “부끄러운 흉물” 이라는 이유로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아픈 역사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동두천 = 구아모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5일 자]
미군 경제에만 의존했던 동두천, 부대 떠나자 대낮에도 거리 한산
지난달 15일 오후 경기 동두천시 미군 부대 '캠프 케이시' 정문 앞 거리가 한산한 모습. / 박상훈 기자
상점 10곳 중 7 ~ 8곳은 폐업 · 휴업
"고도 제한 등 걸려 개발조차 못 해"
지난달 말 경기 동두천시 미군 부대 ‘캠프 케이시’ 정문 앞의 ‘미2사단 사거리’. 점심때였지만 상점 10곳 중 7 ~ 8곳은 폐업했거나 문을 열지 않았다. 점심 시간 한 시간 동안 눈에 띈 미군 장병은 4명뿐이었다. 이들은 햄버거와 커피를 포장해서 부대로 들어갔다. 캠프 케이시 인근에서 미용실을 운영 중인 장모 (61)씨는 “손님이 하도 없어 평소에 가게를 비워두고 일부 단골을 대상으로 예약제로만 운영하고 있다” 며 “대낮에도 거리가 한산해 유령 도시가 따로 없다” 고 했다.
동두천 캠프 케이시는 한때 미군 2만명이 주둔했다. 하지만 주한 미군 규모가 줄었고, 남은 미군도 지난 2018년 대부분 한강 이남인 경기 평택으로 옮겼다. 현재는 210야전포병여단 3000명만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미군으로 상권을 유지하던 동두천시는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녹록지 않다. 시는 2018년 7월부터 미군 기지 앞을 관광 특구로 지정하고 세계 각국 음식을 맛보는 ‘월드푸드 스트리트’ 로 바꿨다. 하지만 코로나와 작년 핼러윈 참사를 거치며 상권은 계속 침체 중이다. 양복점을 운영하는 김모 (66)씨는 “상권은 죽어 가는데 남은 미군 기지 때문에 고도 제한 등이 걸려 개발도 못 하는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며 “떠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고 했다.
지난 9월 15일 경기도 동두천시 1호선 보산역 인근 외국인 관광특구 캠프보산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박상훈 기자
미군 부대가 이전한 경기 평택시는 ‘미군 특수’ 를 기대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난달 22일 오후 찾은 캠프 험프리스 맞은편 "안정리 로데오거리' 의 상점 70곳 중 19곳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주한 미군 상당수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상인들은 특수를 기대했지만, 험프리스 기지의 규모가 워낙 큰 게 문제였다. 부대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큰 불편 없이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군은 평택 시내 상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동두천 = 고유찬 기자, 평택 = 조재현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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