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낙동강 혈전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드무2 2021. 6. 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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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1950년 8월 12일이다. 북한군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면서 우리 1사단이 연대별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구에 있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단 사령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303고지’에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단의 15연대가 방어를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왜관 X-Y축 꼭짓점에서 180㎞ 낙동강 방어선이 완성됐다

 

 

미 8군은 “사단장이 직접 나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관 지역을 방어하는 미 1기병사단과 접촉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15연대장 최영희 대령과 참모를 대동하고 303 고지 쪽으로 갔다. 미군들이 나와 있었다. 미 1기병 사단 8기병 연대 2대대장 해럴드 존슨 중령(사진)이 책임자였다. ‘조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존슨 중령은 “양측 사단이 맞붙어 있는 곳이라서 소대를 하나씩 주고받기 식으로 상대방 쪽으로 파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슨 중령은 양국 소대 사이에 전화선도 연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마침 점심때였다. 나를 따라온 참모진과 미군 측의 존슨 중령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함께 나무 밑에 앉았다. 존슨 중령이 C레이션 몇 박스를 가지고 왔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에게 들은 설명은 이랬다.

 

 

 

국군과 미군의 치열한 방어전이 낙동강 전선에서 펼쳐지던 1950년 8월 말 미 공군이 원산을 폭격했다. 북한의 산업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출격한 미 공군기가 원산시의 철도 수리창을 겨냥해 투하한 폭탄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연기 구름이 솟아오르고 있다. 아래 사진은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 F-80 전투기가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이륙하는 모습. [미 육군부 자료]

 

 

 

국군 1사단의 다부동과 왜관 지역 방어를 맡은 1기병 사단은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구상하고 배치한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 앞에서 언급한 X선과 Y선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미군이 왜관에서 함안까지 맡은 X축선과 왜관 동쪽으로 포항까지 방어를 맡은 국군의 Y축선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오상중학교에 있을 때는 거점(據點) 방어로 진지를 편성했지만 다부동으로 옮겨서는 방어 정면이 다소 줄어들어 미군의 X선과 국군의 Y선은 ‘선(線) 방어(line of defense)’의 개념으로 진지를 편성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대 사이의 공백이 있었다. 미군끼리의 공백은 문제가 아니다. 원활한 의사 소통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Y선에 올라 있는 국군과 국군 사이에도 중대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미군과 한국군이 만나는 협조점에서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왜관 303고지 지역이 북한군이 노리는 최대 약점이다. 그러나 X와 Y선의 꼭지를 잘 이으면 장장 180㎞의 낙동강 방어선이 분명하게 연결된다. 말하자면 한국과 미국의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작업이었다.



한·미 연합작전이라는 말이 요즘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 다부동 전투에 앞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면서 펼친 지연전에서도 드물게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펼친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산발적이면서 분산적인, 경우에 따라 즉흥적으로 펼친 작전이었다. 그러나 다부동 전투를 앞두고 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로 부대를 교환하는 작업의 의미는 중대했다. 한국과 미국이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연합작전의 시작이었다.

 

 

 

 

 

 

 

존슨 중령은 꽤 친근감이 있었다. 작전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개인적으로 얘기할 게 있다”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냐. 한번 들어보자”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사실 나는 인천에서 3년 동안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바탄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인천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한 일본인이 자신을 참 잘 대해 줬다고 했다. 모포도 더 가져다주고, 음식물도 모자라지 않게 몰래 갖다줬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다시 찾고 싶은데 주선 좀 해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도와주고 싶지만 일본인은 패전 뒤 모두 한국에서 떠났다”고 말해 줬다. ‘아 참, 그렇겠구나’라고 이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존슨의 얼굴에서는 뭔가 섭섭하면서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전쟁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총을 들고 싸움을 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듯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가 고마움과 아쉬움만 간직한 채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존슨은 나와 아주 친해졌다. 제 고통이 담긴 추억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 아픔도 함께 나눴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미 육군참모총장(1964~68)에까지 올랐다. 어쨌거나 나는 존슨과 소대 병력을 교차해 파견했다. 국군 1사단 15연대 방어 지역에 미군 1개 소대가 들어오고, 우리의 1개 소대가 미군에 배치됐다. 작지만 견고한 사슬로 한국과 미국은 한데 묶였다. 비록 1개 소대의 작은 병력을 주고받았지만 거대한 미국이 한국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전선에 나섰다는 데서 믿음이 생겨났다. 이제 남은 것은 적의 공세를 막아 내는 일이다. 이어 치열한 반격도 펼쳐 고향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결전의 의지도 강해졌다. 내 상념의 한 자락은 어느덧 낙동강을 넘어 서울을 지나 평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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