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행

[<15> 한국 다시 찾은 단원들 "뿌듯해"]

드무2 2024. 2. 1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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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국 다시 찾은 단원들 "뿌듯해"]

 

 

 

“우리가 얻은 게 더 많아”

미 평화봉사단원 출신인 데이비드 스미스 (70), 폴라 루이스 베를린 (68), 제임스 캘러헌 (75)씨 (왼쪽부터)가 27일 서울 종로구 호텔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70년대 한국에 파견돼 교육 · 보건 봉사를 했던 이들은 정부 초청으로 40여 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 고운호 기자

 

 

 

70년대 2000명 왔던 美평화봉사단···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랐다❞

 

 

 

1966 ~ 1981년 전후 재건 도와

환경 열악한 지방 도시 찾아가

결핵 퇴치 · 영어 교육 봉사 활동

"한국 경험이 내 진로에 큰 역할"

 

교육열 · 근면성실함이 한국 강점

"내가 머물던 하숙집 위층 방에

시골서 유학 온 학생들 살았는데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공부···

그때 미래 한국의 희망을 봤다"

 

 

 

“매일 아침이면 마을에 울려퍼지던 새마을운동 노래의 멜로디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근면 성실함으로 무장한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랐어요.”

70년대 미국 평화봉사단 (Peace Corps Volunteers) 단원으로 한국에 파견돼 교육 · 보건 봉사를 했던 데이비드 스미스 (70), 제임스 캘러한 (75), 폴라 루이스 베를린 (68)씨는 27일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입을 모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 (KF) 초청으로 한국을 4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이들은 “인천공항에 내리고 나서부터 경탄의 연속이었다” 며 “한국이 경이적인 경제 성취를 이뤘고, 이제는 BTS·블랙핑크를 보유한 문화 강국이자 미국의 ‘탑티어 (top-tier) 동맹’ 으로 거듭나고 있으니 우리도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고 했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머셋팰리스서울에서 4 - 50년 만에 한국을 찾은 평화봉사단원 왼쪽부터 데이빗 스미스, 폴라 루이스 베를린, 제임스 캘러한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고운호 기자

 

 

 

미 평화봉사단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약 2000명의 단원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주로 환경이 열악한 지방 도시에서 영어 교육, 결핵 퇴치 사업을 전개하며 전후 재건을 도왔다. 이런 지식 · 기술 · 경험 전수는 한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평화봉사단은 1981년 “이제 더 파견이 필요 없겠다” 며 한국 프로그램을 종료했지만, 2년여 한국 생활을 통해 지한파 (知韓派)로 거듭난 단원 출신들은 지금까지도 동맹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단원들이 파견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에서 북한보다도 덜 유명한 ‘미지 (未知)의 나라’ 였다고 한다. 70년대 초반 제주 서귀포에서 배우자와 함께 영어 교사로 봉사한 캘러한씨는 “절이 많은 전형적인 아시아 국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고 했고, 베를린씨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지구 반대편으로 가겠다 하니 가족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고 했다. 스미스씨는 “시골에 살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난생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며 “매일같이 내게 다가와 ‘영어를 가르쳐달라’ 고 조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 했다.

 

 

 

1981년 경남의 한 지역에서 평화봉사단원이 보건소에서 ‘나병은 유전병이 아니다’ 라는 내용을 적은 플래카드를 걸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70년대 후반 여수 애양원에서 봉사한 스미스씨는 “밥알에 콩이 몇 알 올라가 있는 걸 보고 ‘여기선 엄청 비싼 음식이니 저렇게 조금만 주는 거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며 “근무시간이 길었고 식사도 조악했지만 나보다 생활 환경이 열악했던 한국인들을 보며 종종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고 말했다. 베를린씨는 1979년 10 · 26 사태와 그 직후 선포된 계엄령이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매주 받아보던 주간지 (뉴스위크)의 아시아 섹션에 (당국의 검열로 인해) 항상 구멍이 나 있었다” 면서도 “하지만 단 한 번도 공포스럽다 느낀 적은 없었다” 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인생의 진로를 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며 “우리가 더 얻은 게 많았다” 고 했다. 봉사단 활동 이후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에 진학해 국제 개발을 전공한 스미스씨는 “내가 살던 하숙집 위층 공부방에 시골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살았는데 오전 6시쯤 불이 켜진 뒤 자정 무렵까지 꺼지지 않았다” 며 “한 나라가 발전하려면 ‘미래에 대한 희망’ 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때 알게 됐다” 고 했다. 한국 경제사를 공부했다는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사재 축적이 아니라 경제 발전에 매진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은 운이 좋았다” 고 했다.

 

 

 

1967년 경기도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봉사단원이 학생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는 모습. / 연합뉴스

 

 

 

캘러한씨는 중앙아시아 · 남아메리카 등에서 외교관으로 20년 넘게 일했다. 그는 “다른 나라들도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미국이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며 “교육열에서 비롯된 우수한 인적 자본이 ‘한강의 기적’ 을 만든 것” 이라고 했다. “보건소에서 했던 일을 너무 사랑했다” 던 베를린씨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대 교수가 됐다. 그는 “지금도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인들이 얼마나 근면 성실했는지에 대해 강의한다” 고 했다.

 

 

☞미국 평화봉사단

미국 청년들을 개발도상국에 파견해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는 연방정부의 행정기관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생의 2년을 봉사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자” 며 1961년 설립했다. 현재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아프리카 · 중남미 · 동남아 등 40국에서 농업 · 보건 · 교육 지원을 하고 있다. 한국에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약 2000명의 단원을 파견했다.

 

 

김은중 기자

 

 

 

스티븐스 · 존스 · 커밍스··· 봉사단 통해 한국과 인연

 

 

주한 대사 · 경제관료 등으로 부임

한미 동맹의 가교 역할 이어나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 (오른쪽 맨뒷줄)가 1970년대 봉사단원 시절 충남 예산중학교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있는 모습. / 연합뉴스

 

 

 

미국 평화봉사단원 중에는 한국 대사가 되는 등 한국과 인연을 이어나간 인사들이 여럿 있다.

캐서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는 스물둘이던 1975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아 충남 예산 예산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당시 그는 봉사단원 신분이었지만 영어 정규 수업 교사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식 교사 대접을 받았다. 1976년도 졸업 앨범에는 ‘영어교사 심은경’ 으로 수록됐다. 동료 교사들이 그에게 심은경이란 한국어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스티븐스 전 대사는 당시 학생 · 마을 주민과 어울리며 한국어도 배웠다. 2008년 한국 대사에 부임했을 때 첫 공식 석상에서 “안녕하십니까, 심은경입니다” 라며 유창한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2011년 한국을 떠나 2013년까지 주인도 대사도 지냈는데, 이후 공직을 떠나 한국외대 석좌교수 · 미국 한미경제연구소 (KEI) 소장 등을 지내며 한미 동맹의 가교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이뿐 아니라 2004 ~ 2005년 주한 미 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현 주세르비아 대사도 평화봉사단원 (카메룬 파견) 출신이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 변호사는 대학생이던 1971년 경남 마산에서 활동했다. 그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도 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박사도 19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딛으며 인연을 맺었다. 그의 아내도 한국인이다. 조 도노번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도 1970년대 말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고, 국무부 동아태 수석부차관보를 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매캔 하버드대 명예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66년 평화봉사단원으로 경북 안동농고에서 2년간 영어와 문학을 가르쳤는데 훗날 하버드대 교수가 돼 한국 시조를 영어로 짓는 법을 가르쳤다. 2009년 ‘도시의 절간 (urban temple)’ 이란 책을 냈다. 책에는 봉사단원 시절 안동 읍내에서 막걸리를 먹고 취해서 돌아올 때 돼지가 울었던 기억을 담은 ‘안동의 어느 밤’ 같은 한국의 서정이 담긴 영어 시조 60여 수가 실렸다.

 

노석조 기자

 

 

 

참전 용사에 이은 '한국의 報恩'

평화봉사단원 · 가족 등 올해까지 750명··· 초청 코로나땐 마스크 선물

 

 

 

KF (한국국제교류재단)는 지난해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과거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 평화봉사단원 및 그 가족 총 37명을 한국에 초청했다. 사진은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갖는 모습. / 한국국제교류재단

 

 

 

“다시 방문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이 잊지 않고 우리까지 찾아줘서 고맙다.”

한국국제교류재단 (KF · 이사장 김기환)은 평화봉사단의 헌신에 사의를 표하고자 2008년부터 매년 전직 단원과 그 가족들을 초청하고 있다. 올해까지 약 750명이 초청 사업을 통해 한국을 찾아 근무지를 둘러보고 과거의 동료들과 재회했다. 6 · 25전쟁 참전 용사 초청에 이은 또 하나의 보은 (報恩)인 셈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방한이 불발된 2020년에는 마스크 등을 미국의 단원들에게 전달해 뉴욕타임스 (NYT)가 이를 다루는 등 화제가 됐다.

올해도 평화봉사단 출신 단원과 가족 40여 명이 21일부터 7박 8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979 ~ 1981년 경남 통영의 보건소에서 일한 폴라 루이스 베를린씨도 42년 만에 ‘모자 (母子) 보건’ 업무를 담당했던 이곳을 다시 찾았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백발의 노인이 돼 베를린씨를 맞았다고 한다. 그는 “봉사단 시절을 기록한 일기와 사진을 미국에 보냈는데 화물 사고가 나서 모두 사라졌다” 며 “이렇게라도 추억을 복원하게 돼 눈물이 흘렀다” 고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11월엔 KF가 미국 내 전직 봉사단원 500여 명에게 마스크 등이 포함된 ‘코로나19 생존 박스’ 를 전달했다. 홍삼 캔디와 은수저 등 한국을 추억할 수 있는 제품도 곁들였고 박스 위에 ‘당신의 헌신에 대한 우리의 작은 보답’ 이라 적었다. 1966년부터 강원 춘천에서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한 샌드라 네이선씨는 당시 본지에 “50년 전 내 인생의 경험이 지금 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 같은 경험을 했다” 며 “박스를 여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고 했다.

이 같은 노력에 감동해 한국에서 활동한 전직 봉사단원들의 모임 ‘프렌즈오브코리아 (FOK)’ 가 이번 방한을 계기로 국내 한 장애인 복지 시설을 찾아 2000달러 (약 270만원)를 기부했다. FOK 부회장이자 한국인 배우자를 둔 제임스 마이어 (80)씨는 “이렇게 평화봉사단을 다시 초대해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며 “하숙집 아주머니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단원들에게 베풀었던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면 우리가 봉사한 것에 비해 여전히 받은 게 너무 많다” 고 했다.

 

김은중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10월 3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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