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행

[<13>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드무2 2024. 2. 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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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부천시 오정동 영안모자 본사에 있는 ‘영안역사기록관’ 에서 백성학 명예회장이 6 · 25 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미군 빌리와의 인연을 담은 기록물들을 보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이태경기자

 

 

 

❝미군은 날 구했고, 난 그의 손자에 장학금··· 내 삶이 한미동맹 표본❞

 

 

 

미군부대 심부름꾼 '쇼리' 로 일해

6 · 25때 가족과 헤어져 남한으로

북한 포격에 화상 입고 죽을 고비

미군 빌리 덕에 간신히 살아남아

 

청계천 모자장수서 '모자왕' 되다

빌리에게 배운 영어 · 매너가 밑천

美 바이어들도 우리 회사만 찾아

전쟁 36년만에 美서 빌리와 만나

 

강원 홍천에 '빌리 사랑의 집' 세워

빌리의 자녀 · 손자들에 장학금

지금도 서로 연락하면서 지내

양국도 서로 도우며 발전하길

 

 

 

부천시 오정동에 있는 영안모자 본사. 2층에 있는 창업주 백성학 (83) 명예회장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모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책상 뒤 신문 크기의 액자에 담긴 흑백 사진이었다. 4명의 아이들이 군복을 걸친 채 군용 텐트 앞에 서 있었다. 백 명예회장은 “1953년 6월 강원도 화천 어디쯤 있던 미군 야전병원에서 찍은 사진” 이라고 했다. 백 명예회장이 미군 부대에서 키 작은 꼬마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쇼리 (shorty)’ 라고 불리며 허드렛일을 할 때였다. “6 · 25 전쟁 끝나기 한 달쯤 전인데, 북한군 포격으로 미군 유류 저장소가 불타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지. 그때 치료 받으면서 미군 부대에 있던 하우스 보이 출신들과 찍은 사진인데,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해.”

전 세계 12개 공장에서 연간 1억 개 이상 모자를 만들어 세계 모자 생산 · 판매량 1위 기업을 일군 ‘모자왕’ 백성학 명예회장은 “한미동맹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를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라며 웃었다. 주변에선 이런 백 명예회장을 두고 한미동맹의 ‘살아있는 표본’ 이라고 말한다.

혈혈단신 월남해 고아로 자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먹을 것을 준 것도, 정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그가 세계 무대로 나아갈 때 무기가 된 영어를 가르쳐 준 것도 미군이었다. 그의 사업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만나 꽃을 피웠다. 백 명예회장은 미국과의 인연을 과거의 일로만 두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준 미군 은인을 10여 년에 걸쳐 어렵게 찾아냈고, 그의 손자에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보은했다.

 

 

◇ 미군 쇼리에서 세계 모자왕으로

전쟁 전 평안북도 원산에 살던 백 명예회장은 1950년 12월 가족과 헤어져 혼자 남한으로 내려왔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사실상 고아 (孤兒)가 된 그를 거두어 준 것이 미군 부대였다. 그곳에서 ‘빌리’ 라는 이름의 미군을 만났다. 그는 백성학을 친동생처럼 돌봐줬다. “당시 나는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해 미군을 따라 다녔는데, 빌리는 나에게 예의범절과 영어까지 가르쳐 줬어. 내가 미군들이 쓰던 영어 욕설을 쓰면 야단을 치며 못하게 했지.” 북한군 포격으로 화상을 입고 냇물에 빠졌던 백성학을 구조해 화천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도 ‘빌리’ 였다. 하지만 6 · 25 전쟁이 끝나고 빌리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둘 사이의 연락도 끊겼다.

 

 

 

1952년 미군부대에서 빌리와 함께

1952년 겨울 강원도 김화군의 미군부대 진지에서 열두 살 백성학이 빌리와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다. / 영안모자

 

 

 

전쟁이 끝난 후 백 명예회장은 서울 종로의 한 모자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1959년 서울 청계천에 모자 노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끊긴 것 같던 미국과의 인연은 1967년 미국에 모자를 수출하면서 이어졌다. 납품 업체를 찾던 미국 바이어가 백 명예회장의 모자를 보고 거래를 터 줬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미군 부대 ‘쇼리’ 로 있으면서 익힌 영어와 매너로 미국 바이어를 상대했지. 당시 국내 모자업계에 영어 하는 사람이 없어서, 미국 바이어들이 죄다 우리 회사에 왔다고.”

사업이 자리를 잡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빌리를 찾는 일이었다. 1975년 주한미군 신문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Stars and Stripes)에 ‘빌리’ 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1980년대 중반엔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빌리’ 란 미군을 찾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는 빌리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1985년 강원도 홍천에 사회복지 시설 ‘백학마을’ 을 세우면서, 건물 이름은 ‘빌리 사랑의 집’ 으로 정했다. 이런 그의 사연이 미국 유명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1986년 6월 호에 6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그리고 미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6 · 25 당시 빌리가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300대대 출신 퇴역 군인 수십명을 미국 캔자스시티로 초청하면서 당시 찍은 사진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 속에서 ‘빌리’ 의 얼굴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비티 (Beattie). ‘비티’ 라는 발음을 빌리로 들었던 것이다.

1989년 그토록 그립던 빌리와 재회했다. 빌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회 얘기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0년 2월 호에 또 실렸다. 그는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 흘려 지킨 한국의 어린 고아가 성공해서 다시 자신들을 찾아온 스토리가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고 말했다.

 

 

◇ 代를 이은 보은과 인연

빌리는 2010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인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백 명예회장은 빌리의 자녀와 손자들이 원하면 미국 내 영안모자 회사에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에 진학한 빌리의 손자에겐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금도 빌리의 가족과는 서로 연락을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6 · 25 전쟁 때 미국에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 미국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고 했다.

백 명예회장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가교 역할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장 등을 운영하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록펠러재단 회장을 지낸 J. 록펠러 등과 인연을 쌓았다. 한국 기업인들이 원하면 자신의 미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도왔고, 미국 기업인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면 한국 기업을 소개해 줬다. “한국과 미국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흔들릴 관계가 아니야. 나처럼 서로 돕고 도우며 오랫동안 끈끈하게 이어가야지.”

 

이성훈 기자

 

 

 

❝카투사 복무 시절 인맥 · 영어로 세계시장 뚫어❞

 

 

 

'기업인 인큐베이터' 카투사

휠라 윤윤수 · 롯데쇼핑 정준호

"효율적 조직문화와 인사 배워

글로벌 사업에 큰 도움 됐다"

 

 

 

우리 산업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한미 동맹의 매개가 미 육군 배속 한국군 요원, 바로 카투사 (KATUSA)다. 카투사 복무 중 영어 회화를 익히고 미군의 조직 문화를 접한 이들이 197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글로벌화와 기업의 세계 진출에 첨병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업계 인사들 중 카투사 출신은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이탈리아 브랜드를 국내로 들여왔다가 글로벌 본사까지 인수한 휠라 윤윤수 회장, 국내 대표 유통업체인 롯데쇼핑 정준호 대표와 이마트 한채양 대표, 국내 최대 골프 기업 골프존을 창업한 김영찬 회장, 항공 물류 기업 스위스포트코리아의 김종욱 대표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계를 상대로 하며 커리어를 쌓고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윤윤수 정준호 한채양

 

 

 

1968년 카투사로 입대한 윤윤수 회장은 서울의 한 미군 야전병원에 배치됐다. 입대 초기 미군 의사들의 의학 용어가 낯설어 무조건 “옛 썰 (Yes, sir)” 만 외치던 그에게 한 미군은 “잘 모르면 알아들을 때까지 물어보라” 고 했다. 이때 쌓은 영어 실력으로 미국 유통업체 한국 법인에 입사한 것이 ‘휠라 신화’ 의 출발점이었다. 윤 회장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해외 파트너와 자유롭게 네트워킹을 한 것이 나의 경쟁력이 됐다” 고 했다.

1970 ~ 8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영어 회화를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매년 2000명 안팎 선발하는 카투사 출신들이 그나마 영어 회화 능력자로 꼽혔다. 이들이 무역 회사나 기업의 해외 파트, 주한 외국 기업에 근무하며 우리 경제의 글로벌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롯데쇼핑 정준호 대표도 그런 경우다. 1984년부터 경기도 평택 미 육군 범죄 수사본부 (CID)에 근무했던 정 대표는 첫 직장이던 삼성그룹에 입사한 후 영어 회화 실력 덕분에 해외 브랜드 영업부에 배치됐다. 정 대표는 “1980년대 최고 인기 직장이던 종합상사에서 ‘수출 역군’ 소리를 듣던 상당수가 카투사 출신이었다” 고 말했다.

카투사들은 당시 효율적 미군의 조직 문화를 경험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스위스포트코리아의 김종욱 대표는 “1980년만 해도 한국은 돌아가면서 포상받는 것이 미덕이었는데, 미군은 정확한 인사 시스템으로 실적을 평가하고 상을 줬다” 며 “조직 관리 방법을 그때 배웠다” 고 했다. 카투사 복무 경험을 잊지 못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2013년 카투사연합회가 결성됐다. 연합회는 현재 소속 회원 수가 1만2000여 명이다.

카투사 출신들의 역할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연합회 명예회장인 김종욱 대표는 “연합회 차원에서 올해부터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미국 내 한국 기업에 잘 훈련된 미국 전역 군인을 취업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고 말했다.

 

☞카투사

카투사 (KATUSA ·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는 독특한 존재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는데, 카투사는 유일하게 미군 지휘체계에 편입돼 함께 근무하는 현지 부대다. 카투사는 6 · 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미국의 병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한국군을 미군 부대에 배치하며 태동했다.

 

이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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