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인간]
Homo Natura
2021.12.16 一 2022.2.27
서울시립미술관
송상희 sanghee song
《자연스러운 인간》은 미디어아티스트 송상희(b.1970)의 개인전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의뢰한 커미션 작품 6점과 국내에서 미공개된 작품 1점을 선보인다. 송상희는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다양한 미디어를 수용하여 섬세한 서사 구조로 풀어내는 자신만의 시각 어법을 오랫동안 구축해 왔다. 작가는 신화, 언론 보도, 사록 등 여러 문헌자료를 집요하게 수집, 연구하거나 역사적 상흔이 남은 장소를 직접 탐방한 결과를 토대로 음악, 드로잉, 문학 등 타 예술 장르를 융합하며 주로 영상화하는 심미적 실험을 지속해 오고 있다. 개별적 레퍼런스들은 수평적으로 촘촘하고 창의적인 서사로 짜여 열린 결말로 제시되어 왔으며, 점점 전작에 걸쳐 거대한 서사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미디어 컨버전스 시대에 하나의 서사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고 다시 통합될 때 더욱 창의적으로 풍부해지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방식과 교차되는 바가 있다.* 동시에 색색의 천 조각을 어떠한 위계 없이 포개거나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하여 고유의 패턴과 아름다움을 지닌 수공예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연상시켜 작가를 ‘디지털 퀼트 메이커’라 칭하고 싶다.
지난 20여 년간 생의 어두운 이면의 근원을 문헌 탐구와 답사를 하며 파헤쳐 온 송상희의 작업 세계는 여러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초기 대한민국의 다양한 여성상에 대한 관심은 곧 그 여성이 속한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로 확장되어, 사회적 통념과 위계, 전쟁, 식민사관, 자본주의로부터 소외된 삶을 조명합니다. 이처럼 잊혀진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온 작가는 ‘자연스러운 인간’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조심스레 능동적인 말걸기를 시도한다. 본 전시 제목은 종래의 선악으로 대표되는 절대적인 이원론을 비판해 온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니체는 현실에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이라는 끔찍한 본바탕이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억지와 궤변으로 각자의 논리만 관철시키려 하는 모순을 종종보인다. 신자유주의라는 무한 경쟁 세상에 처한 인간에게 선과 악, 같음과 다름, 참과 거짓 같은 기준은 일견 분명해 보이지만, 실제 현실은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 속에 다면적인 개개의 인간 본성이 서로 얽혀 있다. 《자연스러운 인간》은 이러한 ‘끔찍한 본바탕’으로 되돌아가 자연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되돌아보고, 그 사이에서 공생의 실마리를 얻고자 기획된 전시입니다. 동시에 다양한 촬영기기와 정보 전달 매체를 비롯한 섬세한 드로잉, 오브제를 조합하여 참여자와 상호 영향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으며, 이는 미디어 간 경계를 초월한 예술적 메시지와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 이재현, 『디지털 시대의 읽기 쓰기』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제7장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http://www.digital.kyobobook.co.kr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파주: 아카넷, 2018), pp. 297-298.
〈사과〉
전시는 인류가 선악에 눈을 뜨게 된 계기인 금단의 열매 ‘사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3채널 영상작업 〈사과〉(2021)는 로켓 실험에 이용된 침팬지 ‘햄’, 카프카의 『변신』,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인공지능의 아버지였으나 성소수자였던 앨런 튜링처럼 역사, 문학 등에서 작가 스스로 궁구한 사과와 관련된 일련의 함의를 제시하면서 본질이란 과연 절대적, 불변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선악이라는 양가적 구분의 시발점인 사과가 전시 도입부에서 이분법적 판단에 대한 의심의 화두를 던지는 모티프로 활용되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대지의 노래〉
〈대지의 노래〉(2021)는 2008년부터 모아 온 영상 아카이브를 다채로운 미디어 기기로 선보이는 7채널 설치 작업입니다. 작가는 방사능이 휩쓸고 간 우크라이나의 도시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 원유 유출로 검게 변해버린 태안의 바다,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혼이 서린 일본의 오소레 산, 제1차 세계 대전 전사자들의 묘지인 프랑스의 베르덩, 노예 무역 거점지였던 탄자니아의 바가모요와 카나리아 제도 등을 탐방하며 감응한 바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여러 촬영 방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담는 카메라는 목걸이로 걸리거나, 대지에 직접 맞닿은 발처럼 신발에 부착됩니다. 또한 기름이 유출된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의 시야처럼 뱃머리 좌우에 설치되거나, 노예 무역 거점지에 지천으로 널린 망고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처럼 긴 장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바람개비 소리만 들리는 적막함 속에 지난 10여 년간 순례자의 길을 밟아온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대지의 흐느낌이 들려올 것입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꿈〉
〈꿈〉(2021)은 단채널 영상과 여러 오브제로 구성된 현대판 몽유도원도입니다. 지친 현실에서 이상향을 찾아 한 점의 불빛을 따라 떠난 꿈길에서는 복사꽃 가득한 봄날의 숲이 펼쳐지지만, 이내 활짝 핀 꽃잎은 작은 옷 껍질이 되어 고시원, 지하철역, 그리고 하천 위로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마천루 사이에서 비춰집니다. 국일 고시원 화재 사건,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망사건, 세 모녀 자살 사건과 같이, 빈곤과 소외로 세상을 등지고 잊혀진 이들을 상징하는 옷 껍질들은 현실에서는 물론 꿈의 세계에서조차 그 흔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한편, 전시장에 설치되는 우주의 역사를 간직한 소행성, 밀레의 〈만종〉, 클레의 〈산 정상 위에서〉, 그리고 말레비치의 〈아키텍톤〉 모작은 단채널 영상에도 등장하는 독립적인 오브제로서 텔레포트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횡단하며 우리를 순간 이동시킵니다. 이들은 모바일 기기에서 나누는 SF적 문자메시지와 짝을 이루며 기존 영상의 번외편처럼 서사를 풍부하게 합니다. 익명의 화자가 나누는 문자는 마치 먼 미래에서 과거를 반추하듯 오가며, 각 오브제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현생 인류의 비참한 존재상, 예술,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꿈 속 무릉도원에서마저 잊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맞서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서글프게도 그 실현은 묘연하기만 합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기거, 너 그리고 나〉
〈기거, 너 그리고 나〉(2018)는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2채널 영상 작품입니다. 한 채널에서는 제국주의 시대에 만든 엽서들과 이를 촬영한 장소로 추정되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채널에서는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만화 『2001 스페이스 판타지아』 중 인류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간 행성에 존재하는 의태 생물 ‘기거’에 대한 에피소드가 인용됩니다. 강한 생명체를 모방하며 생존을 이어가는 이 괴생물체의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 식민 시대는 물론 독립 이후 근대화, 민주화 과정을 걸쳐 여러 양상으로 표출되어 왔습니다. 상처로 가득한 우리의 발자취에서 끈질기게 반복해 나타나는 괴물은 ‘너인지? 나인지? 누구인지?’, ‘결국 현재의 우리 또한 또 다른 의태를 통해 생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추하게 합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신세계〉
델프트 블루 타일, 연필 드로잉, 분재 모형으로 구성된 〈신세계〉(2021)는 ‘진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인류 문명에 주목합니다. 서구와 아시아 간 교류의 상징인 델프트 블루 타일에는 무역으로 파생된 각종 산물이 소개됩니다. 향신료와 식재료, 희생당한 동물, 전파된 전염병, 여행 문학의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의 첫 페이지 등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헤르메스는 무역의 신이지만 도둑질의 신이기도 합니다. 또, 군사위성 밀스타(Milstar)와 화성 탐사로봇 오퍼튜니티의 등장은 이러한 착취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또 앞으로도 행해질 것을 암시합니다. 라이트박스에 설치된 6점의 연필 드로잉은 인간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의 폭주를 대변하며, 그 중 잭슨 폴록의 〈Number 32〉를 모사한 드로잉에서 이를 대표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공적으로 성장을 억제하여 길러진 분재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통제로 희생된 여러 존재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억압된 자유와 생명에 대한 의지는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과 대비되면서 묘한 감정의 미동을 일으킵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업고〉
〈업고〉(2021)는 세 가지 내용이 전개되는 연필 드로잉을 지그재그 형식으로 연결한 작품입니다. 첫째는 사람이 사람 혹은 동물을 업고 걸어가는 모습으로 탄생과 함께 짊어져야 할 각종 업(業)의 굴레를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원자, 원자핵의 발견이 원자폭탄까지 이어지는 발전 단계를 보여줍니다. 역사에서 과학적 진리의 발견이 공동선에 기여하기 보다 악의 도구로 변질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단편소설 『모자』의 내용입니다. 평소 두통과 정신병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길에서 우연히 모자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어 주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 모자를 눌러씁니다. 인간은 운명처럼 선과 악, 참과 거짓에 대한 인식의 틀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이것이 업과 같이 차곡차곡 쌓여지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더욱이 마을과 같은 공동체 안에서 이 과정이 집단화되면 그 결과는 더욱 당연시될 것입니다. 〈업고〉는 이러한 본연적 한계로 인한 인간의 굴곡지고 모순투성이인 숙명을 약 11m의 작품 길이보다 더한 무게감으로 표현합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말걸기〉
〈말걸기〉(2021)는 상처를 주고받은 우리가 서로 공생할 수 있을까를 되묻는 작업으로, 6개의 드론 스피커와 16개로 분할된 다중화면과 단일화면이 교차되며 대화를 이어가는 구조를 지닙니다. 작가는 무차별적 테러가 발생하거나 민족분쟁의 장소,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기억이 서린 광주 등 역사의 상흔이 어린 세계 곳곳을 몸소 찾아 서로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 사물, 풍경, 개인-국가의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당신’과 ‘나’의 존재와 서로에 대한 인식 그리고 상처의 정체에 대해 되묻습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에서 발췌한 텍스트에서는 인물들이 결혼식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만난 이들과 각자가 마주한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낯선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듯, 다중화면의 화자와 드론 스피커는 대화를 이어가고, 분할된 화면은 단순한 도형에서 코흐 곡선이 겹쳐지는 눈꽃 결정 모양으로 분화를 반복하며 궁극에는 녹아 흘러내리는 마그마가 나타납니다. 조각조각 나뉘어져 가는 화면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된 채 살아가는 현 시대의 불확정적 정체성과 상대적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의 단상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조심스레 소통과 융합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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