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상시
서소문본관 2층 천경자컬렉션전시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그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천경자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이름으로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꿈과 사랑,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情恨)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은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하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세계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전시는 이처럼 자전적(自傳的)인 성격을 가지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자기고백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영혼의 여행자’,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다채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 기증이 지닌 참뜻이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재조명될 천경자 상설전시에 대한 관람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섹션 1.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와 해외여행지에서 본 이국여인의 모습을 그린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와 같은 작품으로 구성된 섹션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린 다양한 모습의 여인들이 자리한다.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짙은 한의 정서는 천경자에게 있어 슬프지만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에서 ‘달콤한 한’이 깃든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여인의 시 Ⅰ〉
<여인의 시 I>, 종이에 채색. 59.5×44cm, 1984
The Poetry of a Woman I color on paper, 59.5×44cm, 1984
<여인의 시 Ⅰ>(1984)는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2점 연작으로 제작되었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여인 누드를 화폭에 적극적으로 등장시키며 특정 모델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자유로운 표현으로서 누드를 그렸다. 1969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해외여행에서 지속적으로 원시성, 원시미를 탐구했는데, 이는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모습과 관련된다. 나체 여인의 등장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을 여성으로 보는 모체회귀와 연관된다. 여인의 얼굴과 눈망울에는 고독감이 가득하다. 여인은 메마른 대지 위에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꿋꿋하게 서 있다. 다른 그림 속에서 여인과 함께 있던 나비, 새, 동물 등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외로운 여인을 위로해 주는 것은 담배이다. 평상시 천경자는 담배를 즐겼고, 담배는 삶의 고독을 달래주는 위안이었다.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상은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 고고하게 살아온 천경자의 모습이자 생애 대한 애착과 생명감을 상징한다. 천경자는 여인을 통해서 대자연을 포용한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여인의 시 Ⅱ〉
<여인의 시 II>, 종이에 채색, 60 ×44.5cm, 1985
The Poetry of Woman II, color on paper, 60 ×44.5cm, 1985
<여인의 시 Ⅱ>(1985)는 인간과 자연, 현실을 벗어나 초현실적인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점 연작으로 제작되었다. 여인은 광기 가득한 금빛 눈으로 팔을 벌린 채, 장미를 가슴에 품고 떠오르는 형상이다. 구름 사이로 여인을 등장시켜 현실과 상상이 공존하는 공간을 연출한 것은 작가 스스로 추구해왔던 ‘해방된 세계에서 떠오르는 여인’을 보여준다. 여인의 눈매와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초월적 여인상을 보여준 <황금비>(1982)와 동일한 모습이다. 장미는 그의 삶에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품에서 함께 존재해 왔다. 천경자는 장미처럼 자신을 방어하는 가시를 예술에 비유했고, 가시에서 핀 장미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담아 화려하고 향기 그윽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여인의 시 Ⅱ>는 현실을 넘어서 고독과 한을 승화시킨 작품이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종이에 채색, 43.5 × 36cm, 1977
The 22nd Page of My Sad Legend color on paper, 43.5 × 36cm, 1977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는 고독과 저항, 한을 응축시킨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다. 여인은 천경자의 상징인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쓰고,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하얀 동공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표현했고 푸른빛의 그림자 가득한 눈매는 광기에 찬 매서운 눈초리로 바뀌었다. 더욱 무표정해진 얼굴, 유난히 긴 목의 여인은 강렬하고 섬뜩한 마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눈동자는 우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이 무렵 천경자는 현실을 너머 4차원에서 온 듯한 초월적인 여인상, 마녀를 투영한 여인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1974년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서 왕들의 이마에 있는 코브라 장식과 다양한 형태의 뱀 그림들을 보고 모티브를 얻었고,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구원의 여인상, 영원한 여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고독한 여인을 달래주는 수호신이면서 동시에 천경자 자신이다. 여인은 인생을 체념하고 속죄하는 초월적 태도를 보여주며, 고독과 슬픔, 한을 넘어선 천경자의 모습이다.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종이에 채색, 40 × 31.5cm, 1989
A Female Acrobat of Jamaica, color on paper, 40 × 31.5cm, 1989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는 이국적 풍정과 극적인 상상력으로 변용시킨 여성인물화이다. 천경자는 1989년과 1993년에 카리브해 연안, 자메이카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열대나무와 앤슈리엄, 히비스커스 꽃을 배경으로 표범무늬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천경자 자화상 <알라만다의 그늘Ⅱ>(1985)가 연상된다. 화면은 평면화, 단순화된 듯 보이지만 색의 중첩에 의한 균질한 붓터치, 톤을 바꿔가며 겹겹이 쌓아 올린 색면이 음영효과와 깊이감을 부여한다. 눈동자와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에는 금분이 선명하게 채색되어 강렬한 마녀이미지를 강조한다. 마치 입체 화장을 한 것 같은 얼굴은 윤곽이 강조되어 인위적으로 보이며, 코끝은 한층 더 동그랗게 도드라진 모습이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정형화시켜 표현했다. 보편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한 모습이다.
〈엔자〉, 〈스카프를 쓴 엔자〉
<엔자>, 종이에 채색, 13.5 × 12cm, 연도미상
Enza, color on paper, 13.5 × 12cm, no date
<스카프를 쓴 엔자>, 종이에 채색, 27 × 24cm, 연도미상
Enza in a Scarf, color on paper, 27 × 24cm, no date
<엔자>와 <스카프를 쓴 엔자>는 이국 여인을 소재로 그린 여성인물화이다. 천경자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디’, ‘엔자’ 등의 특정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켰다. 작품의 배경은 풍경적 요소보다는 실내로 한정되며 애완용 개나 카드 등이 여인과 함께 있다. 여인은 소파에 앉아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화려한 원색 무늬 옷과 장신구들은 장식적인 느낌을 강조해 준다. 천경자는 이국 여인의 얼굴을 정형화시켜 표현했는데,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눈두덩에 적, 녹, 청색 같은 강렬한 원색을 겹겹이 채색하였고 코를 크고 넓적하게 강조했다. 여인이 정면, 측면 또는 반측면을 취하는 것과 상관없이 금분을 가득 채운 눈동자는 정면을 향해있으며 눈꺼풀 밖으로 뛰어나올 듯이 과장되어 있다. 마치 입체 화장을 한 것 같은 얼굴은 뚜렷한 음영 표현으로 윤곽이 강조되어 인위적으로 보인다. 여인의 콧잔등이 하얗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황금의 비>(1982)에서부터 얼핏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표현은 천경자가 ‘아름다운 여자’하면 떠올리던 동네 미친 여자들이거나, 평소 화장하기를 좋아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된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채색화와 기행회화로 구분 없이 천경자 여성인물화에서 정형화된 표현이며 회화적으로 강조되는 인상이다.
〈그라나다 두 자매〉
<그라나다 두 자매>, 종이에 채색, 46 × 38cm, 1993
Two Sisters of Granada, color on paper, 46 × 38cm, 1993
<그라나다 두 자매>(1993)는 그라나다의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1989년과 1993년에 카리브해 연안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두 자매는 열대나무 아래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화면은 평면화, 단순화된 듯 보이지만 색의 중첩에 의한 균질한 붓 터치, 톤을 바꿔가며 겹겹이 쌓아 올린 색면이 음양효과와 깊이감을 부여한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에는 금분이 선명하게 채색되어 장식성을 강조한다. 코끝은 한층 더 동그랗게 도드라진 모습이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정형화시켜 표현했다. 보편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눈두덩에 적, 녹, 청색 같은 강렬한 원색을 겹겹이 채색하였고 코를 크고 넓적하게 강조했다.
〈꽃무리 속의 여인〉
<꽃무리 속의 여인>, 종이에 채색, 27 × 24cm, 연도미상
A Woman in a Bouquet of Flowers, color on paper, 27 × 24cm, no date
<꽃무리 속의 여인>은 꽃을 동반한 여성인물화이다. 천경자는 60년대 초중반부터 초상화 형식의 여성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성인물화는 두상 또는 흉상으로 반측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모습이다. ‘꽃과 여인’이라는 영원한 테마가 하나의 전형을 이루어 가는 시기이며,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과 달리 뾰족한 턱,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오똑한 코를 지닌 서구적인 인물표현이 특징이다. 천경자 작품의 여인상 하면 떠오르는 목이 길고 가느다란 눈썹의 서늘한 눈매를 가진 모습이 이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여인상은 채색화보다는 1965년 전후로 그려진 삽화와 스케치에서 많이 확인된다. 턱을 들고 손에 괴고 있는 모습, 머리에 꽃장식을 한 모습, 가늘고 긴 손가락 표현 등이 특징이다. <꽃무리 속의 여인>은 빠르고 율동감 있는 붓질, 자유롭고 힘찬 선의 흐름, 평면적이면서 간결한 형태 표현으로 1960년대 천경자 여성인물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병이 된 마돈나〉
<화병이 된 마돈나>, 종이에 채색, 38 × 45.5cm, 1990
Madonna Who Became a Vase, color on paper, 38 × 45.5cm, 1990
<화병이 된 마돈나>(1990)는 유명 스타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196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좋아했던 유명 스타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환상 속에 표상되었던 여인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여인들이다. 천경자는 실제로 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평생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할리우드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마릴린 먼로에 이어 팝의 여왕 마돈나를 소재로 선택했다. 그레타 가르보는 소녀시절 천경자의 심볼이었다. 작가는 여배우 이미지를 1968년작 <청춘의 문>에서 처음 등장시켰다. 여배우 이미지 삽입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불만에 대한 도전을 표출한 것이다. 꽃을 가득 꽂은 화병에 매혹적인 마돈나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됐지만 눈망울에 우수가 가득하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신비감은 한결 다듬어진 붓터치와 색채에서 비롯된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애상은 여성이라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지 못한 유명 스타의 삶에 천경자 자신의 한을 대입시킨 것이다.
섹션 2. 환상의 드라마
“작품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
‘환상의 드라마’ 섹션은 작가의 꿈과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자전적 성격의 채색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젊은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사랑의 상처로 인한 뼈아픈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렸던 천경자의 대표작 〈생태〉(1951)에서부터 안정된 생활의 행복감이 깃든 화사한 파스텔 색조의 그룹 인물화 〈여인들〉(1964), 그리고 보티첼리의 작품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 기행〉(1973)까지. 과거의 추억과 오늘의 꿈, 미래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 이 섹션은 시기에 따른 작가의 감정 변화가 녹아든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생태〉
<생태>, 종이에 채색, 51.5 × 87cm, 1951
Life Form, color on paper, 51.5 × 87cm, 1951
<생태>(1951)는 처절한 삶의 현실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얽히고설킨 수십 마리의 뱀이 화면 중앙에 모여 있다. 뱀의 동세, 머리, 눈망울, 표피의 질감 등의 꼼꼼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천경자는 광주역 앞 뱀집을 찾아가 유리상자 속에 수십 마리의 뱀을 넣고 직접 관찰하여 스케치했고, 이 작품을 25일 만에 완성했다. 작품의 뱀은 원래 모두 서른세 마리였으나, 사랑했던 뱀띠 연인의 나이를 맞추기 위해 두 마리를 더 그려 넣어 서른다섯 마리가 되었다. 천경자는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 개인전에서 <생태>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천경자 스스로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라고 했다.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의 내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뱀을 소재로 그림으로써 여동생의 죽음, 사랑, 이혼,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삶의 역경을 극복하려 했다. <생태>는 삶의 시련,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천경자 예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자전적 의미가 나타난 최초의 징후;로 꼽히는 대표작이다.
〈여인들〉
<여인들>, 종이에 채색, 126 × 111cm, 1964
Women, color on paper, 126 × 111cm, 1964
<여인들>(1964)은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자유로운 변용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작품이다. 수틀 앞에 하늘빛 · 보라빛 옷을 입은 세 여인이 앉아 있고 머리에는 면사포를 쓰고 있다. 여인들 앞에는 흰나비와 꽃무늬가 있고 수틀 아래 붕어들이 맴돌고 있는 형상이다. 1960년대 초중반은 천경자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작품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면사포를 쓰고 있다. 면사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부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욕구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평면적이고 간결한 형태 해석, 자유롭고 활발한 붓의 율동감, 힘찬 선의 흐름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 · 사물의 흐트러진 윤곽선과 거친 표면질감이 특징이다. 천경자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 유행했던 추상미술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필묵에 의한 선의 개념과 색채를 결합시키고 사실적인 형태를 구현했으며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여인들>은 1965년 동경 이토화랑 개인전과 미술잡지 『미즈에』에 원색도판으로 소개되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백야〉
<백야>, 종이에 채색, 134 × 94cm, 1966
White Night, color on paper, 134 × 94cm, 1966
<백야>(1966)는 초시간적인 세계를 기억 속에 되살려 설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청 · 녹 · 보라 계열의 소용돌이치듯 거칠게 채색된 원형상은 숲속에 모여 앉은 부엉이와 동일시되어 밤의 세계를 상징한다. 노란 눈의 부엉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비가 날고 있고, 백색 빛이 가득한 가운데 분홍빛 구름이 흘러가는 장면은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은밀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백야는 간접적으로 설화성을 드러내준다. 작가는 청색을 1960년대 설화성을 강조한 작품에서 자주 사용했다. 또한 이 색은 천경자가 숙원의 지옥도를 그리기 위하여 환상했던 죽음의 색채이기도 하다. <백야>는 1966년 《현대작가초대전》(9.4-9.13, 경복궁미술관) 출품작이다.
〈초혼〉
<초혼>, 종이에 채색, 153 × 125cm, 1965
Invocation of the Spirit of the Dead, color on paper. 153 × 125cm, 1965
<초혼>(1965)은 바다에서의 토속적인 제사를 주제 삼은 작품이다. 천경자는 넓게 펼쳐진 광경을 화면에 3단 수직구도로 구성했다. 상단에 위치한 원삼을 입은 귀신같은 환상의 여자에서부터 바닷물 속으로 휘몰아치듯 꿈틀거리는 커다란 물고기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한다. 중간층에 멀리 전설적인 배가 떠나고, 아랫부분의 깊은 바다에는 괴기스러운 커다란 물고기가 이빨을 드러내며 용솟음치는 형상이다. 천경자는 전통적 소재를 작품화하면서 조선시대 원삼자락과 샤머니즘에서 색채미를 찾았다. <초혼>에서 작가는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작품의 주요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명도 · 채도를 적절하게 사용한 화면은 조화롭게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다. 동양적 소재와 색채 사용을 통한 현대적인 화면구성과 정신적인 표현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독자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 무정〉
<아! 무정>, 종이에 채색, 40 × 31.5cm, 연도미상
Les Miserables, color on paper, 40 × 31.5cm, no date
<아! 무정>은 뉴욕 브로드웨이의 극장 광고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지나다보면 타임스퀘어를 중심으로 온갖 광고판과 연극 · 뮤지컬 간판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작품명 ‘아! 무정’은 빅토르 위고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또 다른 이름이자 1950년대 한국 유행가의 제목이다. 천경자는 소설 속 주인공의 불행했던 삶에 공감했고, 유행가를 즐겼다. <누가 울어>처럼 유행가 제목에서 비롯된 작품명이 있다. 화면 중앙에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의 광고판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광고판은 특징을 살려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천경자식 화법으로 미국의 공연예술을 설명해준다.
〈이탈리아 기행〉
<이탈리아 기행>, 종이에 채색, 90.5 × 72.5cm, 1973
Trip to Italy, color on paper, 90.5 × 72.5cm, 1973
<이탈리아 기행>(1973)은 피렌체의 인상을 바탕으로 3년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197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전통의 맥락에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고, 이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에는 여정 중 천경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도상이 등장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보티첼리의 화집, 오른쪽에 프라 안젤리코의 <이집트로의 피신>(1451-52) 엽서와 왼쪽 상단에는 천경자의 기행 스케치화 <베니스 산마르코 사원>(1970)이 놓여있다. 특히 천경자는 피렌체에서 보았던 보티첼리 작품 <봄>(1478)에 매료되었다. 화집을 소재로 채택한 것은 보티첼리 작품 <봄>을 보았던 순간 느꼈던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나타낸다. <이집트의 피신> 엽서는 아프리카를 향한 열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경자 자신의 그림을 삽입하여 이탈리아 여정의 감흥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장갑, 매니큐어를 칠한 손, 트럼프, 술병 등 주요 도상들은 이 작품에서 처음 단체로 등장하여 말년 작품까지 지속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감정 상태, 술병은 고독했던 여정, 손은 신체의 일부를 나타낸다. 천경자는 소재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대변한다. 꽃, 동물 · 식물, 특정 사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고 상징성을 도모했다. <이탈리아 기행>은 1970년대 천경자 회화양식 형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이다.
〈자살의 미〉
<자살의 미>, 종이에 채색, 137 × 95.5cm, 1968
The Beauty of Suicide, color on paper, 137 × 95.5cm, 1968
<자살의 미>(1968)는 인생의 아픔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천경자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속에 비친 하늘에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 순간의 공포를 뱀이 허물을 벗는 생리, 고목에 움이 트는 생리, 인간에게서는 구할 수 없는 생리에 빗대어 작품을 구상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공포를 구름과 수선화에 대입시켰다. 그는 커다란 믹서 속에 수선화를 담고 자기 자신을 갈아대는 아픔을 이야기한다. 믹서를 돌리면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되는 현상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수선화는 갈기갈기 찢긴 형상이 아니라 활짝 피어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얀 수선화는 천경자의 혼이다. 이것은 생을 갈구하는 마음,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순간을 나타낸다. 천경자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마음을 작품 속에 담아내었고, 소멸과 생성, 모체회귀를 갈구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카바레 뉴욕〉
<카바레 뉴욕>, 종이에 채색, 24.5 × 27.5cm, 1990
Cabaret in New York, color on paper, 24.5 × 27.5cm, 1990
<카바레 뉴욕>(1990)은 뮤지컬 카바레의 공연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미국의 공연예술에 심취했는데 뉴욕에는 다 같이 웃고 노래하며 즐길 수 있는 흥겹고 건전한 분위기의 카바레가 많이 있었다. 천경자는 이곳에서 뮤지컬, 밴드 공연 등을 함께 즐기며 스케치를 했다. 카바레에는 각양각색의 화려한 옷차림의 여성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현란한 조명 장식 아래 아코디언을 켜는 여인.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한 무희를 제외하면 누가 가수이고 관람객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입가에 웃음이 가득한 즐거운 표정이다. 인물 표현에 있어 각각 다른 표정과 시선처리. 현란한 의상까지 표현하는 섬세함이 드러난다. 천경자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꿈과 환상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캣츠〉
<캣츠>, 종이에 채색, 31.5 × 40cm, 1988
Cats, color on paper, 31.5 × 40cm, 1988
<캣츠>(1988)는 뮤지컬 캣츠의 공연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뉴욕을 방문할 때면 뮤지컬, 서커스 등 공연을 보러 갔다. 어린 시절 화려한 의상을 입고 곡예하는 소녀가 눈부시고 황홀해 보였고, 곡마단의 소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이 갈망했던 배우들의 ‘광기나 습기’를 작업과정에 빗대어 표현했을 만큼 공연예술에 심취했다.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하든지 공연이 펼쳐지는 곳을 찾아가 스케치를 즐겼다. 천경자는 미국의 공연예술에 매료되었고,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한 뮤지컬 장면을 반복적으로 화폭에 담았다. 작가는 어둡지만 환상적인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배우들의 모습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냈다. 뮤지컬 주인공들의 각각 다른 표정과 시선처리, 현란한 의상까지 표현하는 섬세함, 역동적인 화면 구성에서 공연예술에 대한 천경자의 열정이 드러난다. 고양이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 뮤지컬의 주제를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꿈과 환상의 세계를 구현해냈다.
섹션 3. 영혼의 여행자
‘영혼의 여행자’ 섹션은 1969년부터 남태평양에서 시작해 인도, 중남미, 미국,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그린 기행회화로 구성된다. 작가에게 여행은 타국의 사람들과 자연, 풍물을 발견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원초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교감의 현장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원시의 땅을 찾아 나섰던 작가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마음껏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여행에 집중했다. 여행 초기의 감흥과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와 같은 스케치에서부터 1970년대 후반 이후의 화려한 색채와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플라사 메히코〉(1979), 〈푸에블로족〉(1988)까지, 완성도 높은 채색작품들과 살아 움직이는 듯 순간의 강렬함을 간직한 작가만의 독특한 기행회화를 감상할 수 있다.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 종이에 펜, 26 × 23.5cm, 1969
At the Gauguin Museum in Tahiti, pen on paper, 26 × 23.5cm, 1969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는 고갱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기념비(석상)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폴 고갱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타히티 여행을 선택했다. 천경자의 기대와 달리 고갱의 집과 미술관에는 작품은 없고 인쇄물과 유품만 남아 있었다. 고갱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천경자의 시야에 가장 먼저 포착된 것은 야자수 잎으로 씌워 놓은 석상이었다. 빠르게 펜으로 그려나간 야자수 잎과 석상의 형태는 천경자의 필력을 드러낸다. 굵은 펜과 콩테로 기념비에 음영을 주어 형상의 볼륨감을 강조했다. 천경자는 같은 장소에서 시야에 포착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여러 점 스케치했다. 이 작품은 석상의 정면을 스케치한 것이며 반측면에서 그린 작품도 남아 있다.
〈세네갈〉
<세네갈>, 종이에 펜, 17 × 23.5cm, 1974
Senegal pen on paper, 17 × 23.5cm, 1974
<세네갈>(1974)은 다카르 조각들을 간결한 선묘로 표현한 스케치화이다. 천경자에게 세네갈 다카르는 세련되고 멋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삭막하고 가난한 도시였지만 아프리카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회화와 조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경자는 세네갈 다카르의 세련된 멋을 원시미 가득하게 표현했다. 어느 곳을 돌아보든지 바다가 보였고 예술이 싹터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수준의 회화와 조각이 존재했다. 천경자는 세네갈의 조각과 땀땀춤에서 원시성을 발견하고 작품에 표현했다.
〈페루 이키토스〉
<페루 아키토스>, 종이에 채색, 33.5 × 24.5cm, 1979
Iquitos, Peru, color on paper, 33.5 × 24.5cm, 1979
<페루 이키토스>(1979)는 아르마스 광장의 성요한 성당을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여행하기 위해 이키토스로 향했고 이곳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 성요한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빨간 지붕과 노란 벽면의 원색대비를 이루는 건축물이다. 달빛 주변으로 검은 새무리가 날아다니고, 성당의 색채는 채도를 낮추어 어둠의 시간을 표현했다. 천경자는 성당 정면에서 첨탑이 잘려진 구도를 선택했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고딕양식의 특징을 강조한 조형감각이 드러난다. 사물의 세부묘사가 색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색의 중첩으로 깊이감을 주고 있다. 채색방식의 변화는 대상의 뚜렷한 형태감과 함께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를 예고한다. 귀국 후에 채색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기행회화가 현장스케치에서 채색화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플라사 메히코〉
<플라사 메히코>, 종이에 채색, 33 × 24cm, 1979
Plaza Mexico, color on paper, 33 × 24cm, 1979
<플라사 메히코>(1979)는 멕시코에서 투우 경기 장면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투우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플라사 메히코를 찾아갔다. 플라사 메히코는 세계 최대의 투우 경기장으로 멕시코 문화를 상징한다. 지역의 대표적인 풍물과 문화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에 투우 경기 일정상 관람을 서둘러야 했다. 전경의 관람객들을 중심으로 시선을 따라가면 원형 경기장 안에 투우사와 소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원근을 강조한 꽉 채워진 관중석 인물들, 날뛰는 소들의 어정쩡한 움직임, 승리를 환호하며 던진 모자들의 표현은 투우 경기의 생동감을 강조해준다. 투우사 복장의 금사 수 장식, 소 안장 등을 섬세하게 채색하여 장식적 요소를 강조한다. 천경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투우사와 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투우는 라틴민족의 국기(國技)이며, 최고의 오락이지만, 천경자는 정열이 넘치는 경기. 무엇인가 설레게 하는 음악, 고전적 의식 등에서 꿈을 꾸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이곳에서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남겼다.
〈뉴델리〉
<뉴델리>, 종이에 채색, 24 × 33cm, 1979
New Delhi, color on paper, 24 × 33cm, 1979
<뉴델리>(1979)는 뉴델리 동물원에서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뉴델리에서 스케치하기 위해 동물원부터 찾아갔다. 화려한 새들과 흰 호랑이, ‘힉힉’거리는 표범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는 그가 학창시절부터 동물 · 곤충을 그리는 데 흥미를 가졌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던 환경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시야에 포착된 동물들을 하나의 화면에 구성했다. 배경은 보라색으로 채색하여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각각의 소재들은 사생을 기반으로 묘사되었지만 색과 구도는 천경자의 조형감각으로 표현되었다. 이국적 풍경을 극적인 상상력으로 변용시킨 독특하고 개성 있는 천경자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갠지스 강에서〉
<겐지스 강에서>, 종이에 채색, 24.5 × 33cm, 1979
At the Ganges River, color on paper, 24.5 × 33cm, 1979
<갠지스 강에서>(1979)는 해가 뜰 무렵 갠지스 강변에 몰려든 힌두교도들을 그린 작품이다. 신성한 곳으로 알려진 갠지스 강 상류에는 화장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승려들, 거지들, 꽃을 파는 여인들, 남녀 할 것 없이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 화장터 주변에 놀고 있는 개나 소들 등 갖가지 광경이 펼쳐진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동물 등 모든 것이 공생 · 공존하고 있다. 천경자는 갠지스 강이 지구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원시에 대한 향수와 인간 본능을 달래주는 태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다. 작가는 시야에 포착된 장면들을 하나의 화면에 구성했다. 멀리 보이는 사원을 배경으로 인도 사람들의 갖가지 일상을 원근과 관계없이 상하좌우 나열하듯 그려 넣었다. 화면은 평면화, 단순화된 듯 보이지만 색면에 의한 음영처리로 깊이감을 주고 있다. 채색면 사이사이에 펜으로 그린 스케치 선이 드러난다.
〈탱고를 찾아서〉
<탱고를 찾아서>, 종이에 채색, 24 × 27cm, 1979
Searching for Tango, color on paper, 24 × 27cm, 1979
<탱고를 찾아서>(1979)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미니토 거리 풍경이다. 라 보카 지구 카미니토 거리는 탱고의 발상지로 환락가였다. 단조로우면서도 애상이 흐르는 탱고는 천경자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삶의 수단이었다. 천경자는 탱고를 스케치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향했지만 탱고를 제대로 스케치할 수 없었다. 거리 뒷골목은 가난이 묻어났고 판자집 벽에 원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화려한 색감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고 있지만, 가난한 하층민을 상징하듯 벤치에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에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진다. 스케치 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채색되었지만 선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는 판자집 벽면의 슬레이트 같은 굴곡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천경자는 벽면을 채색한 후 톤을 바꿔가며 가로줄을 그려 넣었고, 이는 벽면에 음영효과를 줄 뿐만 아니라 스케치에서 보여주었던 선의 유희와 동일시된다. 반면 인물, 골목길, 하늘 등은 단순한 색면으로 표현하여 형형색색의 건물들과 장식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뉴욕 센트럴 파크〉
<뉴욕 센트럴 파크>, 종이에 채색, 31.5 × 41.5cm, 1981
Central Park, New York, color on paper, 31.5 × 41.5cm, 1981
<뉴욕 센트럴 파크>(1981)는 센트럴 파크의 겨울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가 13년 만에 다시 뉴욕을 찾은 이유는 큰딸이 살고 있었고 둘째 딸이 워싱턴에서 대학원 졸업을 앞둔 개인적인 일정 때문이었다. 센트럴 파크 나목들 사이로 빛바랜 지붕과 아이스크림 가게는 풍경화에 좋은 점경(點景)이 되어 주었고 가수 존 레논이 살았던 고급 아파트는 원경이 되었다. 발굽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흰색, 검정색의 관광마차와 멀리 콩사탕을 먹고 있는 다람쥐를 전경에 그렸다. 스케치하는 동안 천경자는 고인이 되어버린 작가 김환기와의 인연을 떠올렸고, 몸서리쳤던 전위미술도 지나가버린 뉴욕이 겨울 한파 때문에 더욱 차갑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화면은 전반적으로 낮은 제도의 중간색으로 채색되어 천경자의 감정과 계절감을 대신해 준다. 몇몇 사물에 사용한 붉은색과 다람쥐는 시각적 유희를 제공해준다.
〈괌도〉
<괌도>, 종이에 채색, 37.5 × 45cm, 1983
Guam Island, color on paper, 37.5 × 45cm, 1983
<괌도>(1983)는 목각신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1983년 남동생 규식과 함께 괌을 여행했다. 그가 괌을 여행한 이유는 14년 전 남태평양 사모아와 타히티에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웠던 풍물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그곳의 무희들을 스케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화면 중앙에는 대나무와 코코넛 잎을 엮어 만든 전통가옥 앞에 목각신이 세워져 있다. 천경자는 토속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스케치를 했다. 층층이 쌓아 올린 지붕과 대나무 벽, 목간신은 채색에 의해 세부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톤을 바꿔 가며 겹겹이 쌓아 올린 색면은 화면에 음영효과와 깊이감을 부여한다. 색을 중첩시킨 채색방식은 뚜렷한 형태감을 강조하며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상을 보여준다. 작품 속 하얀 개는 천경자의 애완견 꽃순이와 닮아있다. 천경자는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생활상을 보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과 과거를 떠올리곤 했다. 열대수목이 우거진 밀림을 보면서 청춘 시절 보았던 전쟁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고, 목각신 옆의 웅크리고 있는 검정개를 보며 갑자기 죽은 꽃순이가 떠올라 애상에 젖어 작품 한편에 담아내었다. 괌도를 그린 동일한 구도의 작품이 1점 더 남아 있다.
〈푸에블로족〉
<푸에블로족>, 종이에 채색, 31.5 × 40cm, 1988
Pueblo Tribe, color on paper, 31.5 × 40cm, 1988
<푸에블로족>(1988)은 산 아래 납작하게 늘어서 있는 푸에블로 촌락을 그린 작품이다. 1987년 천경자는 막내 아들과 함께 두 번째 미국 남서부 지역 여행을 했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주, 텍사스주에 부락을 이루어 사는 미국 원주민 부족들을 말한다. 대부분의 부족들은 뉴멕시코주에 정착해 살고 있으며 현대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옛 관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미국 원주민과 이들의 현대 후손들의 문화가 섞여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인접한 애리조나주는 선인장이 많은 사막의 풍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경에는 진흙과 짚을 으깨 만든 벽돌 건물로 이루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정착지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는 깃털과 장신구로 치장한 인디언 남녀가 서 있고, 전경에는 선인장에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다. 푸에블로 촌락은 비교적 미국 인디언의 주거형태와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토착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천경자는 화폭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섹션 4. 자유로운 여자
‘자유로운 여자’ 섹션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1984)를 포함한 다수의 수필집과 천경자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9), 해외 스케치 여행의 과정을 그림과 함께 담아낸 『아프리카 기행화문집』(1974) 등의 출판물을 선보인다.
글 쓰는 일은 작가에게 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책들은 당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를 만큼 그림 못지않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문학예술인 천경자’가 들려주는 감각적이면서도 솔직한 언어 속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열정이 녹아난다.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人生이 떠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神)은 한 인간이 어느 만큼이나 열렬하게 자기 삶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그 운명의 문은 열리리라고 믿는다.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을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자유(自由)』라고 쓴다.
『내 슬픈 전설』이라는 말이 왠지 좋았고 나이 만49세 때 아마튜어가 아코디언을 켜듯 쓰기 시작한 글이어서 49페이지라 덧붙여 책이름을 지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내 생애는 몇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있는 것일까.
一 천경자, 『자유로운 여자』(집현전, 1979)
나는 지금 나의 인생 전부의 어느 선에 서 있는지 모르나 지나간 날을 생각해 보니 별로 후회할 일도 없이 무던히 살아왔다는 자부를 갖는다. 나의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母情)」이라는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된다. 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을 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서식을 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영원히 미완성이 될지 모를 꿈을 향해」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었다.
나는 이 화문집에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 오고 또 감수해 갈 나의 꿈과 사랑과 모정을 담아 본 것이라 하겠다.
1980년 3월 천경자
一 천경자, 『꿈과 바람의 세계』(경미문화사, 1980)
뱀
더러는 '뱀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 조로 내가 소개되는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십여 년 전에 '유리케이스 속에 든' 뱀을 스케치해서 작품을 한 일이 있다.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 그걸 사람들은 야릇한 호기심으로 대하는 것 같고 나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뱀을 그리는 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저러나 뱀은 분명히 매력 있는 동물이다.
요즘 나의 작품 주제에는 '꽃'이 많고 '여인'이 많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받을 시절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오면 나는 그야말로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흘려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기쁨, 고뇌를 맛보게 했다는 창조의 요술사, 요기로운 광채와 지성의 뱀님을 한 번 더 그려볼까 한다.
一 천경자, 『캔맥주 한 잔의 유희』(문화서적, 1981)
화가의 일생은 초기, 중기, 만기의 3기로 쪼개어 볼 수 있다. 초기는 보인 그대로 자연을 묘사하게 되고, 중기에 비로소 느낌을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꿈과 상상의 우물을 파 그걸 표현하는 완숙기에 들어갔다가 죽는다고나 할까?
물감을 으깨고 붓을 놀리고 하는 것이 나의 일상생활이나 노상 꿈을 파먹고 산다고 할만도 하다. 왠일인지 해가 갈수록 성미가 더 꼼꼼해져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던히도 맴돌고 헤매어야 한다. 나의 타고나지 못한 비천재(非天才)의 탓을 한탄도 해 보지만 그러나 나일론 깔깔이 같이 기계에서 쉽게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는 누에가 뽕을 먹고 자라 실오라기를 뿜어내어 누에고치가 되어 명주나 비단이 짜여 나오는 식으로 모체(母體)의 태반(胎盤) 냄새가 나는 것이라야 한다고 나는 늘 자위해 보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기를 더욱 사랑한다. 글 없는 나는 있을 수 있어도 그림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천경자
一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자유문학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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