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드무2 2021. 5. 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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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인디언이 적군을 잡았을 때 가하는 형벌이 있다. 먼저, 전사(戰士)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선다. 그 다음 적군 포로를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하고는 두 줄로 늘어선 전사들이 그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형벌이다. 이를 ‘인디언 태형(gauntlet)’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협곡’ 벗어나니 한 중대는 170명 중 10명만 살아

 

 

1950년 11월 30일,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남쪽의 길고도 좁은 계곡에 빠졌던 미군이 중공군에 당한 게 바로 이 인디언 태형을 연상케 한다. 미군은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힘들 정도로 깊은 늪 속에 빠졌다. 이곳에서 미 2사단은 2개 연대와 포병부대, 사단직할부대, 공병대대 등의 전력을 상실했다.

 

 

 

1950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궤멸된 모습. [백선엽 장군 제공]

 

 

 

지금도 많은 미군이 그때의 참패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생지옥’이라는 상투적 단어로는 그 참상을 다 적기에 부족하다. 당시의 처절함은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지은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살림출판사, 정윤미·이은진 옮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책은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차량 한 대가…당하면 그대로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고, 몇몇 용감한 군인들이 나서서 차량을 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공군이 전면 공격을 가했다. 길 중간에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트럭이나 지프는 길이 좁아서 그들을 그대로 짓밟고 가야 했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직면하자 다들 다른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서 전우들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다녔다. 주변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부상을 입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다들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단장) 카이저는 직접 죽음의 고개를 정찰하려고 걸어가다 길가에 누워 있던 2사단 병사를 밟았다. 몸이 피곤해서 발걸음을 아무렇게나 옮기다가 실수로 밟은 것이었다. 밟힌 사람이 목청을 높여 “이런 나쁜 자식!”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깜짝 놀란 카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네”라고 말했다. 그 일은 그곳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편에 불과했다. 사방에 총에 맞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탱크 정찰팀의 샘 메이스 소위가) 탱크를 몰아 아주 가파른 커브를 도는 순간 거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약 4㎞ 앞에 ‘죽음의 고개’라 부르는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길을 뚫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그때 호송대가 아주 느린 속도로 길을 뚫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간신히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오는 몇몇 미군들마저 이미 큰 충격을 받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메이스의 눈에는 죽은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이들 2사단 병력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중에 서울 영등포에 재집결했다. 한 중대의 경우 170명 중 10명만 모습을 나타냈다. 한 대대는 600명의 대대원 중 150명만 살아 돌아온 것으로 책은 기록하고 있다. 미 2사단은 군우리에서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막대한 무기와 장비를 잃었다.



나는 육군 참모총장을 두 차례 지냈다. 두 번째 임기 때였던 1958년 한국 군사력 강화를 위해 방미했을 때다. 한국전에서 미군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포로로 붙잡혔던 윌리엄 딘 당시 24사단장(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샌프란시스코의 육군 장교회관에서 만났다. 군우리 전투에서 미 2사단을 이끌었던 로런스 카이저(1950년 4~12월 2사단장 재임) 당시 소장도 동석해 함께 식사를 했다.



딘 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포로로 잡혔을 때 사실 당신 신세를 진 일이 있다”고 말했다. 포로 수용소에서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백선엽씨를 아느냐”고 묻기에 “잘 안다”고 대답하자 감시병 몰래 모포와 음식 등을 갖다 줬다는 얘기였다. 그 인민군 장교는 내가 국군 창군 초기 부산의 5연대에서 근무할 때 부하로 데리고 있던 안흥만이라는 사람으로, 월북해서 인민군이 됐다. 우리는 웃으면서 여러 얘기를 나눴다. 6·25전쟁 전 그가 미 군정장관을 지낼 때의 이야기 등 화제가 다양했다.



그러나 카이저 소장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짙은 음영만 드리워져 있었다. 1950년 11월 군우리에서 당한 처참한 패배가 그의 뇌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나도 한마디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냥 떠오르는 몇 마디 인사말로 그의 상처를 위로하기에는 당시의 참혹함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카이저 소장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도 복잡해졌다. 전쟁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인가. 그 상처는 얼마나 깊고 두려운 것인가.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전쟁사 돋보기] 고류노프 중기관총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이 사용한 강력한 중(重)기관총 가운데 하나가 고류노프(SG-43) 기관총이다. 당시 매복한 중공군이 고류노프를 마구 쏘아 대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이 고전했다고 한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인 43년 구형 중기관총인 맥심(M1910 Maxim)을 교체하기 위해 개발했다. 직경 7.62㎜에 길이 5.4㎝의 탄환을 발사하는 고류노프는 사거리가 1㎞가량으로 미군 기관총의 1.5배에 이르렀다. 공랭식인 총신은 크롬이 도금돼 장시간 지속적인 사격이 가능했다. 2차 대전 후에는 전차와 장갑차에 장착하기도 했다.



중공군 사용한 주요 무기
사거리 1km 미군 1.5배

 

 

중공군은 고류노프 중기관총을 보병대대의 중기중대에 12정씩 배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기관총에는 바퀴가 달려 끌고 다니기에 편리했다. 북한군은 맥심 중기관총을 주로 사용했다. 중공군이 고류노프 중기관총을 소대마다 1정씩 할당해 언덕 위에 배치해 놓고 사수가 부사수의 지원을 받아 대량으로 사격한 것을 참전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고류노프 중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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