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02
| 문자, 길을 열다
문자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인류는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맞게 그들만의 문자를 만들거나 받아들였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위대한 발명품을 기반으로 인류는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길을 열었다. 문화의 흥망성쇠와 함께 문자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였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문자는 바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새로운 문자가 차지했다. 그 중엔 유난히 전파력이 강한 문자들이 있었다. 문화적 역량이 뛰어나거나 생명력이 강한 몇몇 문자는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때로는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관계가, 때로는 종교적 신념이 전파력을 높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들의 교류도 문자의 확산을 부추겼다. 그 결과, 유럽은 라틴문자, 서아시아는 아랍문자, 인도는 데바나가리 계열의 문자, 동아시아는 한자가 자리잡았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사용한 문자는 사백여 종, 하지만 현재까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는 삼십여 종에 불과하다. 유구한 문자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지만, 생명력을 잃지 않은 한글! 대단히 독창적인 문자이며, 우리 문화를 꽃피운 밑거름이다.
원형 배 점토판
원형 배 점토판
기원전 2000 ~ 기원전 1600년
원형 배 점토판
고ㅡ바빌로니아, 기원전 2000 ~ 기원전 1600년
6.0 × 11.5 × 2.8㎝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소장
아카드어로 번역한 것이 이 점토판에 기록된 『아트라하씨쓰 신화』이다. 대홍수신화는 공통적으로 신이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하였고, 이를 알게 된 주인공이 배 (방주)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독교 『성서』의 「노아의 방주」는 주인공과 그가 섬기는 신의 이름은 다르지만,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신화와 그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홍수 이야기들은 주인공의 배에 대해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있는데, 원형 배 점토판은 이 배가 길이와 너비가 같은 원형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여 주목된다. 점토판의 제작연대는 필체와 문법을 근거로 고바빌로니아 시대로 추정한다. 특히, 9행의 IKU 기호의 표기법과 4행, 5행 등에 보이는 인칭 어미에 미음 받침 표기는 모두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특징이다.
[윤성덕]
| 쐐기문자, 선사에서 역사로
쐐기문자는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로,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문명에서 발명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강가의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갈대를 사용하여 문자를 기록하였다. 쐐기문자는 갈대로 그린 선이 쐐기 모양으로 보이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초기 쐐기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였으나 단어문자를 거쳐 점차 음절문자로 발전했다. 문자의 발전과 함께 사용 범위도 확대되어 처음에는 회계 기록용으로만 쓰이다가 나중에는 왕실의 문서, 문학작품 등에도 쓰였다. 아카드제국 Akkadian Empire (기원전 2350 ~ 기원전 2154, 악카드제국) 시기에는 서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수메르어 Sumerian language (슈메르어), 아카드어 Akkadian language, 고대 엘람어 Elamite language 등 10여 개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이 되었다.
쐐기문자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기원전 550 ~ 기원전 330) 시기 아람문자로 대체되며, 소멸되었다. 그러나 쐐기문자의 60진법 체계는 지금도 시간 단위에 사용되고 있으며, 쐐기문자로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 등은 서구문학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는 등 후대에도 그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연구자 노트
○ 사용 시기 : 기원전 3500 ~ 기원 후 100년
○ 사용 지역 : 서아시아와 주변 지역 (현대 이라크를 중심으로 이란, 튀르키예, 시리아, 지중해 동쪽 해안 지역)
○ 기록 언어 : 수메르어, 아카드어, 고대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고대 히타이트어, 우가리트어 등
쐐기문자는 이라크 남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이 발명하였다. 수메르인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농경생활을 시작하였고, 강가의 진흙과 갈대를 사용하여 문자를 썼다. 점토판에 새겨진 글자 모양이 쐐기를 닮아서 쐐기문자 또는 설형문자 (楔形文子)라 부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쐐기문자 문서는 약 기원전 3500 ~ 기원전 3400년경 사이에 기록되었다. 고대 도시 우루크 (Uruk, 우룩)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은 물품의 수량을 기록한 장부의 역할을 하였다. 초기 쐐기문자는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를 묘사한 그림문자였다. 그렇기에 초기문자는 특정한 언어를 기록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며, 기록자가 필요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쐐기문자는 기원전 3000년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첫 번째로 글자 모양이 선적인 형태로 단순화되어 점토판에 새기기 편해졌다. 선형문자는 점차 쐐기 형태로 고정되었다. 글자 형태가 추상적으로 변하자 물품의 겉모습과 상관이 없이 낱말이나 개념을 대표하는 글자인 어표 (Logogram)도 생겨났다. 두 번째로 문자가 점차 언어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글자가 물건과 상응하는 관계가 깨지면서 특정한 의미없이 소리를 표기하는 표음문자 (Phonogram : 음절문자, Syllabogram)가 사용되었다. 자음이 같아도 모음이 달라지면 다른 기호로 표기하는 관습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문장에서 주어 · 동사 · 목적어를 표기하기 위해 모음이 서로 다른 소리글자를 첨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쐐기문자가 문학적인 문장을 기록할 수 있는 필기 체계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쐐기문자의 변화는 기록하는 언어가 수메르어에서 아카드어로 바뀌면서 더 빨라진다. 수메르어는 쐐기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언어이다. 수메르어는 어떤 언어와도 발생학적으로 연관이 없는 고립어이다. 기원전 1800년까지 일상적인 구어이자 공식적인 문어로 사용되었다. 수메르왕국이 멸망한 이후 그 뒤를 이은 아카드왕국은 수메르의 문화 · 종교 · 문자를 계승하였고, 바빌로니아 (Babylon, 바빌리 : Bābili)와 아시리아 (Assirya, 앗슈르 : Aššur) 사람들에 의해 아카드어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아카드어는 아프리카 · 아시아어족 (AfroㅡAsiatic language)에 속하는 언어 (셈족어, Semtic language)로 수메르어와 어족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수메르어 서법과 아카드어 어법이 미묘하게 섞인 필기 체계가 형성되었다.
아시리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이 서아시아 지역을 정치적으로 제패하면서 아카드어는 이 지역에서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카드 쐐기문자 문서들은 시리아의 에블라 (Ebla)나 우가리트 (Ugarit), 아나톨리아 (Anatolia) 지방, 팔레스타인은 물론 이집트의 아마르나 (Amarna)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쐐기문자는 3000여 년 동안 서아시아 전역과 지중해 동부지역에 전파되었다. 고대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우가리트어, 에블라어, 히타이트어 (Hittite language), 루비아어 (Luwian language), 후르어 (Hurrian language) 등 10여 개의 언어가 쐐기문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쐐기문자는 기원전 7세기 이후 아시리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 시대 말기에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6세기부터 군림한 페르시아 제국이 제국 공용어로 아랍어를 채택하고, 아랍문자를 공식문자로 사용하자 그 사용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물론 쐐기문자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대 서아시아의 종교의식 및 점성술 등 특정분야의 문헌들은 계속해서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최후의 쐐기문자 기록물은 서기 75년경에 기록된 천문학 문서이다. 이후 쐐기문자는 19세기 서구 탐험가들에 의해 판독되기까지 오랜 기간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윤성덕]
원 쐐기문자 석판
복제품
수메르 회계 점토판
수메르 회계 점토판
기원전 2039 ~ 기원전 2037년
문자와 권력
쐐기문자의 해독
쐐기문자의 발견과 판독은 유럽의 학자들이 성서에 기록된 사건의 증거를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18세기 서양의 탐험가들은 페르시아의 옛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유적에서도 쐐기문자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학자들은 이 유적에서 발견된 쐐기문자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학자들은 이 유적에서 발견된 쐐기문자가 페르시아 문화 및 언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당시 페르시아어는 서양에 잘 알려진 상태였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의 국가 종교 (國敎)였던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을 설명한 '아베스타 주석 (ZendㅡAvesta)'이 1771년 유럽에서 출판되었다. 또한 7 ~ 8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사산 (Sasan) 페르시아 제국의 문어체 언어인 팔라비어 (Pahlavi language, Middle Persian) 문서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은 고대 페르시아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에 쐐기문자 해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를 최초로 해독한 사람은 그로테펜트 (Greog Friedrich Grotefend, 1775 ~ 1853)이다. 그는 쐐기문자 기호가 다른 언어들보다 적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문자가 알파벳 체계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비스듬히 그려진 쐐기 기호를 낱말을 구별하는 기호로 추정했다. 그는 팔라비어로 왕이 'xa - sa - a - ya -ea - i -ya' 임을 알고 있었고, 페르세폴리스의 크세르크세스 (Xerxes) 조각상과 다리우스 조각상의 명문 (銘文)에서 반복되는 기호 일곱 개를 찾아서 확인하였다. 그리고 '왕' 뒤에 나오는 낱말은 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는 헬라어, 히브리어, 아베스타어를 바탕으로 다리우스 (d - a - r - h - e - u -sh)와 크세르크세스 (kh - sh - h - e - r - sh - e)의 이름을 쐐기문자 기호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쐐기문자 중 일부가 음절문자라는 점을 알지 못했기에 그가 정리한 음가를 모든 문서에 적용할 수는 없었다.
쐐기문화의 완전한 해독은 헨리 롤린슨에 의해 이루어졌다. 롤린슨은 이란의 '바쏘툰 명문'을 해독하기 위해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밧줄에 매달려 공중에서 탁본을 떴다. 그로테펜트와 달리 롤린슨은 400줄이 넘는 고대 페르시아어 명문을 확보했다. 그는 헬라어 문서를 통해 왕명과 여러 민족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롤린슨은 페르시아어로 다리우스의 원래 이름이 '다리야부쉬 (Dariawus)' 임을 알고 있었고, 동시대 학자들의 도움으로 고대 페르시아어 해독에 성공하였다. 롤린슨은 바쏘툰 비문 조사 결과를 런던과 파리에서 발표하였으며 (1838), 자신의 연구 결과를 논문 ("Persian Cuneiform Inscription at Behistun. Deciphred and Translated")으로 출판하였다.
롤린슨의 연구를 바탕으로 웨스터가드 (Niels Westergaard. 1815 ~ 1878)와 노리스 (Edwin Norris, 1795 ~ 1872)가 엘람어 명문 해독에 성공하였고, 1844년 쐐기문자 기호 131개를 판독해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롤린슨은 1852년 아카드어 쐐기문자 500여 개를 확인하는 것도 성공하였다.
고대 서아시아에서 사용하던 쐐기문자와 아카드어를 완전히 해독한 해는 1857년이다. 이 때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 (Royal Asiatic Society in London)에서 쐐기문자 해독 대회를 주최하였다. 학회 측에서 당시 새로 발견된 '티글랏 필에세르 1세 (Tiglath ㅡ Pileser 1, 재위. 기원전 1115 ~ 기원전 1076)의 각기둥'을 롤린슨, 에드워드 힝크스 (Edward Hincks)
구데아의 점토 못
구데아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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