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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17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방어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군과의 연결점을 제대로 이었지만,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고 강렬한 기세로 몰려오는 적 앞에서 왜관~포항을 잇는 Y축선 서쪽 끝의 국군 1사단 방어선은 여지없이 흔들릴 기세였다. 미군이 건넨 3.5인치 로켓포 … 더이상 탱크가 두렵지 않았다 경북 상주에서 다부동, 그리고 대구를 잇는 간선로는 적이 집중적으로 노린 공격선이다. Y선 동쪽 지역의 국군 방어선도 적의 강한 공세를 받고 있었지만, 1사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나는 15연대를 좌익, 12연대를 가운데, 11연대를 우익에 배치했다. 방어 전면은 21㎞였다. 사단의 예비 병력을 별도로 두지 않고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세운 것이다. 적의 공격에 한..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⑱ 반격의 칼을 갈다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⑱ 반격의 칼을 갈다 전선은 마침내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다. 1951년 1월의 일이다.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워낙 거셌고, 한 번 밀리기 시작한 국군과 연합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남하했다. 그러나 전열을 갖춰야 했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한 뒤에 반격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미 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가슴에 항상 수류탄을 걸고 다녔다. 워커 장군에게 뒤지지 않는 맹장(猛將)이었다. 그는 반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안성까지 밀린 뒤 ‘중공군 잘 아는 중국인’ 화교 수색대 투입 그는 부임 직후인 51년 1월 초에 중공군의 공세가 다시 불붙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의정부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국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⑰ 떨어진 6 · 25의 별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⑰ 떨어진 6 · 25의 별 월튼 워커 장군(지프 위에 올라선 사람)이 1950년 7월 낙동강전선의 국군 1사단을 방문한 모습이다. 지프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이다. 번쩍거리는 철모를 쓰고 전선을 누빈 워커는 낙동강 전선 방어로 북진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는 특급 소방수였다. 밀려오는 불길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그 앞으로 달려가는 특급 소방수. 그가 출동하면 불길은 맥을 못 추고 기세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6·25전쟁이라는 거센 불길 앞에서 그는 타고난 전사(戰士)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낙동강 전선 지킨 ‘불독 장군’ 워커 … ‘지프 사고 전사’ 날벼락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을 ..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⑯ 1·4후퇴 피란민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⑯ 1·4후퇴 피란민 1951년 1월 초 중공군의 공세로 아군이 한강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게 되자 미군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비행기에 태워 남쪽으로 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1 · 4 후퇴 당시 한 어린아이가 미 공군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 고무보트 위에 판자를 얹어 만든 임시 부교(浮橋·뜬다리)였다. 6·25 개전 초기에 한강 인도교를 끊음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적 치하(治下)에 그대로 남게 했던 그런 실수는 다행히 반복되지 않았다. 미 제1 기병사단의 포병사령관 찰리 파머 준장이 마포에 이 부교를 만들었다. 미 1기병사단의 공병이 그 작업을 했다. 파머 준장은 그 다리를 감독하는 지휘관이었다. 외침 때마다 수도를 ..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⑮ 밀리고 밀리는 전선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⑮ 밀리고 밀리는 전선 국군과 미군, 연합군을 한강 이남까지 밀어낸 중공군의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사진은 임진강 부근까지 내려온 중공군 포병들이 12월 31일 국군 등이 포진한 남쪽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전쟁에서 적에게 한 번 등을 보이면 이를 되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거센 물결에 떼밀려 하염없이 떠내려 가야만 한다. ‘크리스마스 공세’로 소강상태에 있다가 섣불리 중공군을 밀어붙이려 했던 게 아무래도 탈이었다. 힘겹게 들어섰던 평양을 다시 적의 수중에 내주고 밀리기 시작한 지 2주쯤 지났을까.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내가 그해 6월 25일 적을 처음 맞았던 임진강이 다시 눈..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⑭ 전시 사단장의 하루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⑭ 전시 사단장의 하루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백선엽 국군 1사단장(가운데)이 1951년 초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사단본부에서 참모·고문관과 작전회의를 마친 뒤 촬영한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말라리아는 고통스럽다. 낮에는 오한이 심하게 닥친다. 그래도 1950년 12월 당시에는 겨울이라서 증상이 덜했다. 여름의 말라리아는 지독하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점에 맞았던 말라리아는 때가 비록 겨울이었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여름보다 더했던 것 같다. 말라리아로 잠 못 든 새벽, 헤어진 노모·아내·딸 얼굴이 … 이럴 때면 늘 손에 조그만 버너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국군 1사단..

[6·25 전쟁 60년] “운산 수수밭서 격투 끝에 첫 중공군 포로 붙잡아”

[6·25 전쟁 60년] “운산 수수밭서 격투 끝에 첫 중공군 포로 붙잡아” 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 1호를 붙잡은 김대일씨. [신인섭 기자]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 연재되면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중앙일보는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증언석 형식을 통해 싣기로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속내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1950년 10월 24일 운산전투에서 첫 중공군 포로를 잡은 김대일씨의 증언을 먼저 싣는다. 첫 중공군 포로 를 잡은 경위가 구체적인 증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6·25를 말한다 - 나의 증언석 낙동강서 입대한 학도병 1기 78세 김대일씨 경..

6 · 25전쟁 60년 2021.05.28

[6·25 전쟁 60년] 중공군 개입한 첫 전투 한국전쟁서 국제전으로

[6·25 전쟁 60년] 중공군 개입한 첫 전투 한국전쟁서 국제전으로 중앙일보가 연재하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1950년 10월 말에 벌어진 운산전투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서막이었다. 당시 중공군 포로가 처음 잡힘으로써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군 1사단을 이끌고 평안북도 운산에 진출한 백선엽 사단장은 일선에 나가 있던 15연대에서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통해 중국의 개입을 확인했다. 김대일씨 참전한 운산전투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 백 사단장은 포로를 직접 심문한 뒤 1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밀번 군단장도 현장에 도착해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다. 밀번은 이 사실을 바로 도쿄(東京)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부의 더글러스 맥아더..

6 · 25전쟁 60년 2021.05.28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⑬ 12월 맥아더의 철수 결정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⑬ 12월 맥아더의 철수 결정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2월 5일 평양 동부 지역을 지나 남으로 후퇴하고 있다.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린 국군 1사단은 사리원을 거쳐 임진강까지 퇴각했다. 곧이어 시작된 중공군 3차 공세로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공산세력에 다시 내준 것이 ‘1·4 후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전황(戰況)이 다급해졌다. 1950년 12월 초, 국군 2군단이 무너지면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가 막힘이 없었고, 그 서쪽을 방어하던 미 2사단이 큰 타격을 받고 넘어졌다. 청천강 방어선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제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에 방어선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미군, 퇴각하며 군수품 태워 … 평양..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인디언이 적군을 잡았을 때 가하는 형벌이 있다. 먼저, 전사(戰士)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선다. 그 다음 적군 포로를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하고는 두 줄로 늘어선 전사들이 그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형벌이다. 이를 ‘인디언 태형(gauntlet)’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협곡’ 벗어나니 한 중대는 170명 중 10명만 살아 1950년 11월 30일,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남쪽의 길고도 좁은 계곡에 빠졌던 미군이 중공군에 당한 게 바로 이 인디언 태형을 연상케 한다. 미군은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힘들 정도로 깊은 늪 속에 빠졌다. 이곳에서 미 2사단은 2개 연대와 포병부대, 사단직할부대, 공병대대 등의 전력을 상실했다. 1950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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