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 작년 7월 26일 열린 쿠바 혁명 기념식. 미겔 디아스카넬 (왼쪽) 쿠바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 쿠바 대통령실
70년 전 <1953년> 첫 총성··· 카스트로 형제가 160명 이끌고 봉기했죠
2년 뒤 체 게바라 등 80명 혁명 준비
카스트로 "역사가 무죄 선고할 것"
1961년 초 미국, 쿠바와 국교 단절
오늘 (7월 26일)은 쿠바 혁명 시작일로부터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쿠바 혁명은 피델 카스트로가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이끌었던 무장봉기예요. 혁명은 1953년 7월 26일 시작돼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가 쿠바를 탈출하면서 끝났습니다.
'7월 26일' 은 혁명의 시발점이자 상징이 됐답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트로가 만든 혁명의 주요 조직이 '7월 26일 운동 (M-26-7)' 이었어요. 이 단체에는 2021년까지 실권을 잡았던 카스트로의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쿠바의 유명한 사상가 체 게바라도 가담했지요. 쿠바는 1959년부터 7월 26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매년 국가 차원의 다양한 행사를 열어요. 쿠바는 혁명 후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풀헨시오 바티스타. / 브리태니커
바티스타 독재 정권
쿠바는 미국과 남아메리카 사이 카리브해 서부에 있는 국가예요. 16세기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됐다가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후 독립했답니다. 1902년 쿠바가 공화국이 될 때까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어요. 미국은 설탕을 쿠바의 주요 수출품으로 삼고 대기업을 통해 쿠바 경제에 점진적으로 침투했어요.
쿠바는 정치적으로 독립한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부정부패와 금융위기로 몸살을 앓았죠. 이에 1924년 쿠바 대통령으로 선출된 헤라르도 마차도 모랄레스가 개혁을 실시하는데요. 그는 헌법을 바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고문 · 암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강화했어요. 학생과 노동자들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연일 벌였지요. 결국 1933년 군부에서 떠오르는 별이었던 바티스타와 부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쿠바 공화국의 첫 번째 독재자를 축출했답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여러 대통령이 나왔지만 바티스타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워놓고 배후에서 세력을 유지했어요. 그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에 재임했을 때 쿠바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고,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1952년 다시 대선에 출마할 준비를 하던 바티스타는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해 3월 쿠데타를 일으켜 유혈 사태 없이 정권을 장악했어요.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해 장기 독재의 길을 닦았지요.
▲ 작년 쿠바 혁명 기념식 모습. / 쿠바 대통령실
쿠바 혁명의 시작
피델 카스트로는 학생 시절부터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어나는 시위와 혁명 활동에 참여했어요. 1950년 쿠바 아바나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했지요. 그는 바티스타가 집권하기 전 쿠바 인민당 소속으로 의회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합니다. 1952년 6월로 예정됐던 선거에서 그는 아바나 지역 하원 후보였어요. 하지만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모든 선거는 취소되고 말았죠.
카스트로는 곧 독재에 맞서려는 계획을 세우고 1953년 새로운 쿠데타를 위한 반군을 조직했어요. 7월 26일, 그는 약 160명을 이끌고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어요. 그러나 쿠바 정부군의 반격으로 80명 이상 사살됐고 카스트로 본인도 동생 라울과 함께 체포됐죠.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역사가 내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라며 농지개혁, 노동자 문제 등 혁명 이념을 제시했어요. 하지만 그는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1955년에야 정치적 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바티스타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멕시코로 향했어요. 1955년 멕시코에서 피델은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쿠바 망명자 80여 명을 모아 혁명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7월 26일 몬카다 병영 공격 사건을 기념해 '7월 26일 운동 (M-26-7)' 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M-26-7은 이후 쿠바 혁명의 원동력이 됐답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농민들을 위한 토지 재분배, 공공 서비스의 국유화, 정직한 선거, 교육 개혁 등이었어요.
1956년 12월 조직원 80여 명이 쿠바 공습을 위해 요트를 타고 쿠바 동남부 해안에 진입했어요. 이 중 겨우 20여 명만이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진을 치죠.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저항 단체를 만들어 총파업과 게릴라전을 벌이며 바티스타 정권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쿠바 국민이 바티스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지쳐 카스트로에게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있던 게릴라 부대는 수백명으로 불어났고, 정부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쿠바 혁명 전쟁은 약 2년 동안 계속됐고 결국 정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1959년 1월 바티스타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가버립니다.
▲ 피델 카스트로. / 브리태니커
피델 카스트로 정권
혁명 내전이 끝난 후 1959년 5월까지 바티스타 정부 관련 인사 약 600명이 숙청됐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총리가 됐고 엄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 · 경제 체제를 채택했어요. 카스트로는 국민에게 약속했던 토지 · 산업의 국유화, 국민 소득의 공정한 분배, 민영 기업 통제 등을 실시했죠. 1960년 7월부터는 미국 등 외국이 쿠바에 소유하고 있던 기업과 은행·토지·산업시설을 국유화했어요.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했어요. 특히 석유 산업 국유화는 미국과의 주요 갈등 요소였어요. 게다가 미국 상품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양국 간 경제활동 대부분이 중단됐죠.
1960년 9월 카스트로는 국제연합 (UN) 총회에서 소련 공산당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를 공개적으로 포옹하고 4시간 30분 동안 미국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어요. 결국 미국은 1961년 초 쿠바와 공식 외교 관계를 단절했어요. 그 후 피그만 침공 (1961년 4월)과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 등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사건도 있었지요. 카스트로 집권 후 장기적인 경제 침체, 쿠바인의 대규모 탈출, 정권 교체를 위한 소요 사태 등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카스트로는 공식 사임한 2008년까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 체 게바라. / 브리태니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7월 26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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