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2

드무2 2023. 11. 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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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2

 

 

 

 

 

 

 

 

 

제주의 인물 濟州 人物

제주 밖으로의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굶주리고 생활이 어려운 제주민을 위해 재산을 기부했던 거상 巨商 김만덕 金萬德 (1739 ~ 1812), '탐라사절 耽羅四絶' 이라고 알려진 고홍진 高弘進 (1602 ~ 1682), 진국태 秦國泰, 양유성 梁有成, 문영후 文榮後와 명도암의 유학자 김진용 金晉鎔 (1605 ~ 1663), 안병택 安秉宅 (1861 ~ 1936), 『탐라기년 耽羅紀年』을 저술한 김석익 金錫翼 (1885 ~ 1956) 등은 이웃과 나라의 어려움을 살핀 제국의 인물입니다.

 

 

 

 

 

 

입안 立案

조선 1893년

제주기 253, 2002년 김계연 기증

 

김진용 金晉鎔 (1605 ~ 1663)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1615년 (광해군 7) 제주에 유배 온 이익 李瀷 (1579 ~ 1624)에게 수학하였다. 1634년 (인조 12) 사마시 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1643년 숙녕전참봉 肅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귀향하여 학생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이회 李檜목사가 부임하였을 때 오현단 일대에 학사인 장수당 藏修堂이 건립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제주의 교육에 힘썼다. 이때 공적으로 1849년 (헌종 15)에 향현사 鄕賢祠에 추가적으로 배향되었다.

이 입안 立案은 1893년 제주목사 이규원이 제주의 유림 김진용의 묘지가 영구히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구획해 준 문서이다. 후손 김순문이 김진용 선생의 묘지가 손상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올린 소지에 답해준 것이다.

 

 

 

 

 

 

동야산고 東野散稿

김성익 金錫翼 (1885 ~ 1956)

20세기 전반

제주기 3, 2002년 김계연 기증

 

김석익의 시문집이다. 「완당 김정희 화상찬 畵像讚」, 「명도암 김진용 행장」, 「간웅 이익 적려유허기 謫廬遺墟記」, 「탐라인물고」, 각종 제문과 시 등이 있다. 특히 「탐라인물고」는 고려시대 고유 (高維)부터 한말 김중현 (金重炫)까지 제주인물 170여 명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김석익은 일제강점기 때 한학자, 서예가로 평생 붓을 들어 민족혼을 일깨우고 글을 통해 후진을 일깨워 애국정신을 고취해온 지식인이자, 제주학의 태두였다.

 

 

 

 

 

 

심재산고 心齋散稿

김석익 金錫翼 (1885 ~ 1956)

20세기 전반

제주기 1, 2002년 김계연 기증

 

김석익의 시문집이다. 「북행기 北行記」, 「양경천전 梁擎天傳」 등 인물전, 묘표 墓表 20여편, 제문 祭文, 만사 輓詞, 음기 陰記, 시 詩 등이 실려 있다. 시에는 제주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부심이 드러나 있고, 교훈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그의 풍모를 대변하고 있다.

 

 

 

 

 

 

 

탐라기년 耽羅紀年

김석익 金錫翼 (1885 ~ 1956)

1615년

제주기 290, 2002년 김계연 기증

 

김석익이 938년 (고려 태조 21)부터 1904년 (광무 10)까지 4권으로 나눠 제주역사를 기술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한국사 연대를 먼저 쓰고 중국 연호를 뒤에 쓰는 등 주체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다시는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없게 하려고 쓴 제주 향토사이다.

 

 

 

 

 

 

도장 印章

20세기 전반

제주기 22 ~ 26, 김계연 기증

 

김석익은 전각에도 뛰어나, 손수 다양한 도장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부해만고 浮海漫稿

안병택 安秉宅 (1861 ~ 1936)

1930년대

제주기 2224, 2018년 안성모 기증

 

안병택 安秉宅 (1861 ~ 1936)의 제자들이 스승의 사후에 흩어진 자료를 모아 필사하고 엮은 책이다. 안병택의 호가 부해 浮海라 책 이름을 부해만고라 하였으며, 그가 일생동안 후진을 양성하면서 저술한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안병택은 조선 말에 제주 조천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젊어서 전라남도 장성으로 이주하여 당시 호남 성리학이 대학자 기정진 奇正鎭 (1798 ~ 1876)과 그의 손자인 한말 의병장 기우만 奇宇萬 (1846 ~ 1916)에게 학문을 배웠다.그는 기정진의 사상을 계승하며 일제강점기의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교육을 통해 후학들의 정신을 가다듬고자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김석익, 고사훈 高仕訓 (1871 ~ 1910) 등 제주 지식인들에게로 이어져 근대 제주의 교육과 항일의식 등을 고취시켰다. 

 

 

 

 

 

 

탐라기년 서문 耽羅紀年序

안병택 安秉宅 (1861 ~ 1936)

1915년

제주기 270, 2002년 김계연 기증

 

김석익 金錫翼 (1885 ~ 1956)은 일제강점기 때 한학자 · 서예가로 평생 붓을 들어 민족혼을 일깨우고 글을 통해 후진을 일깨워 애국정신을 고취해온 지식인 이자 제주학을 정립한 인물이다. 김석익은 스승인 안병택으로부터 성리학적 유교 사상을 시사하고 1905년 을사늑약 乙巳勒約으로 나라가 기울어지자 기우만의 구국격문을 몰래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때부터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탐라기년 耽羅紀年』 등을 저술하였다. 김석익은 제주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람 타는 섬 濟州混亂期

1629년 (인조 7) 조선 정부는 제주 거주민이 육지로 옮겨 살아 제주 군인이 감소하자 제주인의 섬 밖 이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출국금지령은 200여 년 동안 지속된는데 결과적으로 제주인의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고 육지와 분리된 제주 특유의 섬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태풍과 홍수, 가뭄 등의 자연 재해는 제주인을 힘들게 하였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리들의 폐해와 제주 토호 세력의 수탈까지 겹쳐 삶의 어려움은 더해졌습니다.

 

 

 

 

 

 

 

 

 

 

 

 

을사늑약에 대한 격문 檄文

정재문 鄭裁重 (? ~ ?)

1905년

2002년 김계연 기증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재중 鄭裁重이 호남 湖南의 유생들에게 보낸 격문이다. 고종 황제가 이 늑약을 거절하였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유자 儒者들이 힘을 합하여 적들을 규턴하자는 내용이다.

 

 

 

 

 

 

제고경지문 祭高景志文

조선

제주기 255, 2002년 김계연 기증

 

의병장 고사훈 高仕訓 (1871 ~ 1910)을 제사지내는 제문이다. 고사훈의 자가 경지 景志이다. 일명 고승천 高承天이라고도 한다. 고사훈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장 최익현, 신돌석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를 모의하였다. 1910년 2월 창의격문 倡義激文을 작성, 살포하고 의병 모집 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군에게 잡혀서 순국하였다.

 

 

 

 

 

 

봉세관 관인 捧稅官 官印

대한제국

국립중앙박물관 / 본관 3385, 2016년 입수

 

대한제국기에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궁내부 내장원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도장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에 전국적으로 13도에 봉세관 捧稅官을 두어 여러 잡세 雜稅를 거두어 들였다. 제주도에는 강봉헌 姜鳳憲이 봉세관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의 지방관 및 백성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세금을 거두는 일에 천주교도들이 동원되어 1901년 제주민란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전남봉세관인 全南捧稅官印

2. 전남수조관인 全南收租官印

3. 독쇄관인 督刷官印

4. 제주사검위원 겸 독쇄관지장 濟州査檢委員 兼 督刷官之章

5. 전남사검위원 겸 독쇄관지장 全南査檢委員 兼 督刷官之章

6. 전남사검위원 겸 독쇄관지인 全南査檢委員 兼 督刷官之印

 

 

 

 

 

 

 

안병택이 고경지에게 보낸 편지 (「부해만고 浮海漫稿」)

안병택 安秉宅 (1861 ~ 1936)

1930년대

제주기 2224, 2018년 안성모 기증

 

안병택이 1905년에 고경지 高景志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경지와 함께 의병활동을 하는 김만석 · 이응호와 함께 기우만 奇宇萬 (1846 ~ 1916)이 강학하던 한천정사 寒泉精舍에 다녀온 후에 쓴 글이다.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편지에 내용을 자세히 적지 못하고 항일에 관한 이야기는 김여장에게 직접 들으라는 내용이다. 안병택은 고경지 · 김여장 등 제주의 의병들을 기우만과 연결시켜 주어 의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통계로 보는 제주

 

 

 

 

 

 

 

 

 

 

 

 

 

 

 

 

 

 

 

 

 

 

 

 

 

 

 

 

 

 

 

 

 

 

 

 

 

 

 

 

제주섬 사람들 濟州島人

용암 분출로 만들어진 화산섬 제주에서 농사는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바다와 산이 중요한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전복과 미역 등 해산물은 특산물이자 주요 교역품이었습니다. 한라산 주변 목장에서 기른 말 馬은 귤과 함께 중요한 진상품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이로 인해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거나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강인했던 제주섬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감귤봉진 甘橘封進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652ㅡ6호, 복제품

 

1702년 제주목 관아에서 진상용 감귤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귤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따뜻한 제주도에서 재배되는 과일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매우특별한 과일이었다. 그래서 제주에 부임한 관리는 감귤나무의 수를 일일이 기록하고 수확물을 거두어 한양으로 보냈다. 감귤을 운반할 때에는 짓눌려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짚단으로 싼 후 나무통에 넣어서 보냈다. 귀한 제주 감귤은 국왕이나 높은 관직의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다.

 

 

 

 

 

 

 

 

 

 

 

공마봉진 貢馬封進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652ㅡ6호, 복제품

 

1702년 6월 7일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진상에 필요한 말 (貢馬)을 점검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이날 어승마 御乘馬 20필, 연례마 年例馬 8필, 차비마 差備馬 80필, 탄일마 誕日馬 20필, 동지마 冬至馬 20필, 정조마 正朝馬 20필, 세공마 歲貢馬 200필, 흉구마 凶咎馬 32필, 노태마 駑駘馬 33필 총 433필을 점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매년 공출되는 공마의 종류와 수량, 쓰임새 등을 알 수 있다.

 

 

 

 

 

 

 

 

 

 

 

 

포작과 잠녀 鮑作 · 潛女 (海女)

제주의 바다를 터전으로 해산물을 잡는 남자를 포작, 여자를 잠녀라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제주의 포작과 잠녀들은 주로 바다에서 나는 귀한 해산물을 잡아 공물 貢物로 진상 進上하였습니다. 포작은 전복 및 바다고기를 잡는 어부 漁夫였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중한 군역까지 더해져 견디지 못하고 점차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후 전복 채취와 해산물 진상은 주로 잠녀 潛女들이 하였습니다.

 

 

 

 

 

 

 

물옷 潛水服

20세기

김순이 456, 2001년 김순이 기증

 

물옷은 해녀들의 잠수복을 일걸으며 적삼과 물소중이를 기본으로 한다. 흰색의 무명천을 이용해 잠녀들이 직접 제작하였다. 아래옷에 해당하는 물소중이는 옆에 달린 단추 매듭과 끈으로 여며 입었는데 임신 등 신체의 변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윗옷인 물적삼은 물의 저항을 적게 받기 위해 몸에 딱 붙도록 짧고 좁게 만들었다. 물수건은 머리카락의 정돈과 보온을 위해 썼으며 이후에는 머리에서 뒷목덜미 전체를 넓게 감싼 모자인 까부리를 착용하기도 했다.

 

 

 

아기물옷 潛水服

20세기

김순이 466, 2001년 김순이 기증

 

7 ~ 8세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물질을 배울 때 입었던 어린이용 물옷이다.

 

 

 

 

 

 

 

눈 (물안경) · 눈갑 (물안경갑) 水鏡 · 水鏡匣

20세기

김순이 472 · 476, 2001년 김순이 기증

 

물안경을 제주에서는 '눈'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2개의 '족쇄눈'을 쓰다가 알이 하나인 '왕눈' 을 쓰게 되었다. 눈갑은 눈 (물안경)을 보관하는 상자인데, 그 뚜껑은 소나무로 만들었다.

 

 

 

 

 

 

 

 

 

 

 

 

까꾸리 · 빗창 水鎌 · 鉤

20세기

김순이 477, 2001년 김순이 기증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도구로 잠수할 때 손에서 놓치는 일이 없도록 고무줄을 달아 썼다. 빗창은 주로 전복을 따는 데 사용했다. 맞춤 제작으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길이가 다르다. 까꾸리는 성게나 문어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끝이 날카롭고 뾰족하다. '호맹' 이라고도 부른다.

 

 

 

 

 

 

 

성게체 篩

20세기

김순이 480, 2001 김순이 기증

 

성게알을 까서 모을 때 껍질 등의 불순물을 거르는 도구이다. 판매용 체는 성게알이 뭉개지고 구멍으로도 빠져나가 알루미늄 그릇에 구멍을 낸 성게체를 이용하기도 했다.

 

 

 

 

 

 

 

고둥 螺角

20세기

김순이 486, 2001 김순이 기증

 

고둥은 소라껍질이다. 해녀들은 물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로 고둥을 불었다.

 

 

 

 

본조갱이

20세기

김순이 481, 2001 김순이 기증

 

작은 전복 껍질로, 물속에서 해산물을 발견했을 때 표시해 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보통 허리에 차고 다녔다.

 

 

 

 

 

 

 

테왁 · 망사리

20세기

김순이 483, 2001 김순이 기증

 

테왁은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부력 浮力 도구로 작업 도중 잠시 숨을 구르기 위해 사용하였다. 원래 박으로 만들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스티로폼을 사용했다. 붉은 천으로 감아 만들었다.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그물망으로 테왁에 매달아 한 세트로 사용했다.

 

 

 

 

 

 

 

 

 

 

공마 貢馬

제주말은 제주의 특산물로 공납되었습니다. 공남할 말을 기르기 위해 제주섬 중산간에는 10개의 목마장을 설치하였습니다. 제주목사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한 가지는 공마를 점검하고 수송하는 일이었습니다. 선택된 말은 조천 朝天과 화북 禾北의 포구에서 배로 실어 보냈습니다. 육지와 다른 운송 방법 때문에 제주섬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당벌립 笠

20세기

김순이 1254, 2001년 김순이 기증

 

'정당', '정동' 은 댕댕이 덩굴을, '벌립' 은 벙거지를 부르는 제주어로 한라산에 자생하는 댕댕이 덩굴로 만든 모자이다. 가시덤불도 막을 수 잇었으며 비올 때 우산 대용품으로 이용되어 목동 · 목자 (테우리), 사냥꾼, 농부들이 즐겨 사용했다. 대를 이어 사용했을 정도로 매우 견고했다.

 

 

 

 

갈옷 褐衣

20세기

김순이 205. 2001년 김순이 기증

 

갈옷은 감물을 들인 옷으로 상의는 '갈적삼', 하의는 '갈중이' 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뻣뻣하지만 입을수록 점점 부드러워지며 때가 잘 빠져 세탁에도 용이했다. 특히 땅에 달라붙지 않고 빨리 건조되며 항균작용이 있어 서민복이나 노동복으로 애용되었다. 감물 염색은 예로부터 일본, 중국, 타이 등 동아시아 지역에도 잇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말안장 · 발걸이 鞍裝 · 鐙子

20세기

제주 558, 2001년 구입

 

말을 장식하거나, 말을 부리거나, 말에 올라 앉기 위한 장비를 통틀어 말갖춤이라고 한다. 말안장은 말 등에 얹어 말잔등을 보호하고 사람이 편하게 탈 수 잇도록 만든 마구이며 말 양쪽 옆구리에 위치한 말걸이를 딛고 쉽게 말에 오를 수 있었다.

 

 

 

 

나막신 木靴

조선

제주 883, 2001년 구입

 

통나무를 파서 만든 신발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신었다. 앞뒤에 높은 굽이 달려 있어 비나 눈이 올 때 땅이 질척한 곳에서 이용하였다.

굽이 닳게 되면 새 굽을 바꿔 달아 오래 신었으며 굽이 없거나 굽에 징이 박힌 나막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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