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서소문역사공원]

드무2 2024. 9. 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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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

 

 

사계절 내내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서소문 역사공원은 박물관의 하늘광장 등 주요지점이 지상과 연결되어 존재함으로써 지하 문화 공간의 역사적 당위성과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5

 

 

 

서소문 밖 네거리 역사유적

 

1 성저십리의 번화한 공간

: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 상업적 농수산업과 수공업의 발달

 

조선시대에 소의문 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 間門이었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 · 마포 · 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 (충청 · 전라 · 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 내 번화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칠패시장과 서소문 밖 시장이 서로 이어지며 번성해 종루가상 鐘樓街上, 이현 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상업적 농업 ·  수공업이 성행하였다. 당시 서소문 밖과 칠패시장에서는 시전상인 외에도 평시서에 등록되지 않은 난전상인들에 의한 활발한 상행위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어물과 채소의 거래량이 많았다. 아울러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 義州路와 접해 있어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발전했다.

 

* 성저십리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한 지역으로, 도성으로부터 4㎞ (10리) 이내의 지

 

 

2 국가의 공식 처형지

 

서소문 밖 네거리는 당고개,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이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또한, 서소문 밖 네거리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깝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 인접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가 가능한 공간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소문 밖에서의 행형기록은 연산군 10년(1504)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죄인을 이곳에서 능지처참한 후 머리를 베고 시신을 전시하여 뭇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정조 사후(1800)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처형이 주로 이루어졌다.

 

*[예기]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오경(五經) 중 하나

 

 

 

<김효임 · 김효주 순교도>

 

3 한국 최대의 가톨릭 순교성지 |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부터 1873년까지의 병인박해기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1925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인물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이후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이다.

2018년 9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한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박해와 순교, 자발적 신앙 수용의 특별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79위 시복식>, 1925

 

 

4 일제강점기 이후의 서소문 밖 네거리

 

근대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이 지역은 철도 시설 용지로 수용되어 고립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근대 시기 도심의 발달과 함께 종래의 물류와 교통의 요지로서 서소문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이어온 서소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부근의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다. 또, 1927년에는 철로 안에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서소문 밖 네거리 조선시대 형장의 흔적이 사라졌다.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는 어물을 거래한 수산시장이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용산에서부터 만초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이곳 서소문 밖 시장에 드나들어 어물과 조개 등을 팔았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의 수산시장이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이전되었다.

이곳은 1973년에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로 인해 접근이 어렵고, 중구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공영주차장 등이 공원 지하에 건설되어 시민 휴식 공간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201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안에 따라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 본격화되어 마침내 2019년 6월 1일 지상의 역사공원과 지하의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문화 복합 공간으로 개관하였다.

 

*철도의 개통 1900년 경인선(서울-인천)의 개통, 1906년 경의선(용산-신의주)의 개통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저널에 소개된 한양지도, 1902

 

5 이야기 더하기 _____

  1. ❶ 임오군란의 주동자 원갑식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 효수(梟首)되었다. _1883년
  2. ❷ 동학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김개남은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사흘간 효수되었다. 그 외 안교선, 최재호, 성재식은 남벌원(현 충무로 부근)에서 처형된 후 염천교 근처 반석방(盤石坊)에 사흘간 효수되었다. _1895년
  3. ❸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저항하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서소문에 걸친 지역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이는 대한제국의 중앙군이 도성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유일한 전투였다. _1907년

 

 

 

 

 

 

 

 

 

 

 

 

 

 

 

 

 

 

 

서소문과 만초천 이야기

 

서소문 (소의문)은 조선시대 도성의 4소문 중 하나로 오늘날 서소문 고가도로의 시작점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희문과 더불어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는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전이 있었고 냇가를 건너는 흙다리가 있었으며 주변으로 취락이 형성되고 저잣거리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이곳은 조선시대 후기 죄수들을 참형하여 효시하던 장소였으며, 참형장 옆 우물은 뚜껑을 늘 덮어 두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죽일 때 열고 칼을 씻었다고 합니다.

 

 

 

 

만초천

 

서대문구 현저동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서대문사거리 ~ 서울역 ~ 원효로를 거쳐 한강으로 흐르는 약 7.7㎞의 만초 (덩쿨이 무성한 풀)가 무성한 물길로 『동국여지비고』에 만초천으로 기록되었으며, 만초천을 따라 미나리골, 조개, 칠패, 청파 등의 취락이 발달함.

1960년대 청파로 일대 도로확장과 1967년 복개가 시작되어, 현재는 그 물줄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됨.

 

 

 

만초천

 

"경성 서쪽의 무악에서 발원하여 도성을 돌아 남쪽으로 흘러 반송방에 있는 혁교 革橋, 돈의문 밖의 경영교 京營橋, 소의문 (서소문) 밖의 신교와 이교 坭橋, 숭례문 밖의 염초청 焰硝廳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화약을 만들던 관청), 청파동 남쪽에 있는 주교를 거쳐 만초천을 이루니, 서남쪽에서 용산강에 흘러들어간다." 《동국여지비고》 권2 만초천조 만초천은 도시화 사업으로 인해 1957년 복개되었다.

 

 

 

 

두께 우물터

 

만초천 옆 우물은 크고 깊으며 물이 많이 나서 늘 흘러 내려 한번도 품어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뚜껑을 늘 덮어두고 망나니가 사람을 죽일 때나 우물뚜껑을 열고 칼을 씼었다고 함.

 

수로 (두께 우물터 ~ 만초못)

 

먼 옛날 무악재에서 시작되어 한강까지 흘렀을 물길을 수로를 통해 표현하고 지금은 사라진 만초천의 느낌을 형상화 함.

 

 

 

 

 

 

 

이교

 

만초천을 건너는 흙다리가 있었으며 헌다리라고도 불렀음.

서소문고가도로 쪽 공원 진입부 바닥에 포장패턴 달리하여 흙다리의 느낌을 은유적으로 표현함.

 

 

만초못

 

만초천의 물은 한강으로 합치고 세월은 흘러 현재에 이르듯 우리가 서 있는 이 장소의 역사적 상징성을 살려 궁극에는 시간의 켜들을 담을 수 있는 연못을 만듦.

 

 

 

 

 

 

                         앞

 

 

 

                        뒤

 

 

 

 

서소문 밖 연대기 | 조완희

 

| 사람 人자와 서소문의 ㅅ자를, 벽을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의 군상으로서 형상화했다.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음영의

      흐름은 마치 오랜 자연의 변화를 보는 듯하다. 과거 서소문 밖 모든 사람과 현재 사람들과의 만남을 표현하고자 했다.

 

| 조선 후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작은 십자가들로 이루어진 칼 형상으로 역사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노숙자 예수

 

마태복음 (25. 30ㅡ40)을 묵상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이곳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티모시 슈말츠

215 × 92 × 72㎝, 청동주조, 2013 

 

 

 

노숙자 예수 | 티모시 슈말츠

 

얇은 담요를 얼굴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하는 노숙인의 모습이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발등에 못이 박혔던 흔적이 보인다.깨나다 작가 티모시 슈말츠는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에서 영감을 받아 노숙인의 모습으로 예수를 표현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든, 생존경쟁에서 낙오되어 노숙인이 된 사람이든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에 대한 상념을 일깨우고 있다. 노숙자의 모습을 한 예수상이 처음 어느 성당 앞에 설치되었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항의를 받아 철거되었다. 하지만 곧 로마 교황청에서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을 설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축복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황청에 이어 스페인의 마드리드, 아일랜드의 더블린, 싱가포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등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순교자 현양탑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부터 1873년까지의 병인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사람 중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44명은 한국 천추교 창설 200주년이 되던 1984년 5월 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성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1984년 현재의 공원 안에 일부 토지를 매입하여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이 헐리게 되었다. 이에 한국천주교회는 1999년 이곳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현재 44명의 성인과 복자 27명을 비롯해 진리를 입증하다가 희생된 수많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2014년 8월 16일 오전 8시 50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이곳 서소문 순교성지를 참배하며 시작하셨습니다.

 

서소문 순교성지 중림동 약현성당

 

 

 

 

"조선시대 국가 처형터인 이 땅은 천주교 신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은 곳입니다.

모든 영혼에게 평안한 안식을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마태오 복음 5장 6절

 

 

 

 

순 교 성 인

 

기해박해 (己亥迫害 · 1839년)        41위

병인박해 (丙寅迫害 · 1866년)          3위

 

성 정하상 바오로 (1795 ~ 1839. 9. 22)

성 김아기 아가타 (1790 ~ 1839. 5. 24)

성 박아기 안나 (1793 ~ 1839. 5. 24)

성 이조이 아가타 (1784 ~ 1839. 5. 24)

성 김업이 막달레나 (1774 ~ 1839. 5. 24)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1787 ~ 1839. 5. 24)

성 한아기 바르바라 (1792 ~ 1839. 5. 24)

성 박희순 루치아 (1801 ~ 1839. 5. 24)

성 남명희 다미아노 (1802 ~ 1839. 5. 24)

성 권득인 베드로 (1805 ~ 1839. 5. 24)

성 김노사 로사 (1784 ~ 1839. 7. 20)

성 김성임 마르타 (1787 ~ 1839. 7. 20)

성 이매임 테레사 (1788 ~ 1839. 7. 20)

성 김장금 안나 (1789 ~ 1839. 7. 20)

성 이광렬 요한 (1795 ~ 1839. 7. 20)

성 이영희 막달레나 (1809 ~ 1839. 7. 20)

성 김누시아 루치아 (1818 ~ 1839. 7. 20)

성 원귀임 마리아 (1819 ~ 1839. 7. 20)

성 박큰아기 마리아 (1786 ~ 1839. 9. 3)

성 권    희 바르바라 (1799 ~ 1839. 9. 3)

성 박후재 요한 (1799 ~ 1839. 9. 3)

성 이정희 바르바라 (1799 ~ 1839. 9. 3)

성 이연희 마리아 (1804 ~ 1839. 9. 3)

성 김효주 아녜스 (1816 ~ 1839. 9. 3)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1791 ~ 1839. 9. 22)

성 허계임 막달레나 (1773 ~ 1839. 9. 26)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1780 ~ 1839. 9. 26)

성 김유리대 율리에타 (1784 ~ 1839. 9. 26)

성 전경협 아가타 (1790 ~ 1839. 9. 26)

성 조신철 가롤로 (1796 ~ 1839. 9. 26)

성 김제준 이냐시오 (1796 ~ 1839. 9. 26)

성 박봉손 막달레나 (1796 ~ 1839. 9. 26)

성 홍금주 페르페투아 (1804 ~ 1839. 9. 26)

성 김효임 골룸바 (1814 ~ 1839. 9. 26)

성 최창흠 베드로 (1787 ~ 1839. 12.29)

성 조증이 바르바라 (1782 ~ 1839. 12.29)

성 한영이 막달레나 (1784 ~ 1839. 12.29)

성 현경련 베네딕타 (1794 ~ 1839. 12.29)

성 정정혜 엘리사벳 (1797 ~ 1839. 12.29)

성 고순이 바르바라 (1798 ~ 1839. 12.29)

성 이영덕 막달레나 (1812 ~ 1839. 12.29)

성 남종삼 요한 (1817 ~ 1866. 3. 7)

성 전장운 요한 (1810 ~ 1866. 3. 9)

성 최    형 베드로 (1814 ~ 1866. 3. 9)

 

 

 

 

순교복자

 

신유박해 (辛酉迫害  · 1801년)    25위

기묘박해 (己卯迫害 · 1819년)       2위

 

 

복자 최창현 요한 (1759 ~ 1801. 4. 8)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 ~ 1801. 4. 8)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 ~ 1801. 4. 8)

복자 최민공 토마스 (1744 ~ 1801. 4. 8)

복자 홍낙민 루카 (1751 ~ 1801. 4. 8)

복자 최민재 베드로 (1770 ~ 1801. 5. 14)

복자 윤운혜 루시아 (         ~ 1801. 5. 14)

복자 정복해 칸디다 (         ~ 1801. 5. 14)

복자 정인히 타내오 (         ~ 1801. 5. 14)

복자 정천상 가롤로 (         ~ 1801. 5. 14)

복자 강완숙 골룸바 (1761 ~ 1801. 7. 2)

복자 강경복 수산나 (1762 ~ 1801. 7. 2)

복자 김현우 마태오 (1775 ~ 1801. 7. 2)

복자 문영인 비비안나 (1776 ~ 1801. 7. 2)

복자 김연이 율리안나 (         ~ 1801. 7. 2)

복자 이    현 안토니오 (         ~ 1801. 7. 2)

복자 최인천 이냐시오 (         ~ 1801. 7. 2)

복자 한신애 아가타 (          ~ 1801. 7. 2)

복자 김종교 프란치스코 (1754 ~ 1801. 10. 4)

복자 홍필주 필립보 (1774 ~ 1801. 10. 4)

복자 현계흠 플로로 (1763 ~ 1801. 12. 10)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1760 ~ 1802. 1. 29)

복자 이경도 가롤로 (1780 ~ 1802. 1. 29)

복자 김계완 시몬 (           ~ 1802. 1. 29)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 1802. 1. 29)

복자 조    숙 베드로 (1786 ~ 1819. 8. 10)

복자 권천례 데레사 (1784 ~ 1819. 8. 10)

 

 

순교자

 

순교자 이승훈 베드로 (1756 ~ 1801. 4. 8)

순교자 황    심 토마스 (1756 ~ 1801. 11. 28)

순교자 옥천희 요한 (            ~ 1801. 12. 10)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1774 ~ 1801. 12. 10)

순교자 고동이 바르바라 (            ~ 1819. 8. 10)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 (1814 ~ 1866. 3. 7)

순교자 이희영 루카 (1756 ~ 1801. 5. 11)

순교자 김백순 (예비자) (            ~ 1801. 5. 11)

순교자 이함규               (            ~ 1801. 5. 14)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 (1776 ~ 1801. 6. 1)

순교자 홍정호               (            ~ 1801. 6. 1)

순교자 김한빈 베드로 (1764 ~ 1801. 11. 28)

순교자 김백심             (            ~ 1802. 1. 29)

순교자 김의호             (            ~ 1802. 1. 29)

순교자 변득중             (            ~ 1802. 1. 29)

순교자 송재기             (            ~ 1802. 1. 29)

순교자 장덕유             (            ~ 1802. 1. 29)

순교자 최설애             (            ~ 1802. 1. 29)

순교자 이용리 베드로 (            ~ 1866. 12. 14)

순교자 김경보             (            ~ 1868. 2. 16)

순교자 이재의 토마스 (1785 ~ 1868. 5. 28)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 (1794 ~ 1868. 5. 28)

순교자 권    복 프란치스코 (1812 ~ 1868. 5. 28)

순교자 조    로사 (             ~ 1868. 5. 28)

순교자 남    데레사 (            ~ 1868. 일자불명)

순교자 김백철         (            ~ 1868. 일자불명)

순교자 조계승         (            ~ 1868. 일자불명)

순교자 김창실 안토니오 (             ~ 1871. 5. 27)

순교자 김여강 (예비자) (              ~ 1871. 5. 27)

순교자 이돈호 (예비자) (              ~ 1871.5. 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 ~ 26절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 (西小門) 즉 소의문 (昭德門)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 (七牌) 시장으로 통하던 문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의 사형집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행해졌으며, "서소문 밖" 도 이러한 이유에서 1416년 (태종 16)에 서울의 주요한 형장으로 지정되었다. 이곳 형장의 위치는 서소문 밖의 비탈진 언덕 길 아래, 즉 현재의 서소문 공원 옆에 있던 이교 (坭橋, 흙다리)의 남쪽 백사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여년 동안 박해가 계속되면서 천주교회는 전국적으로 1만 명 내외의 순교자를 탄생시켜야만 했다. 특히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1801년의 신유박해 (辛酉迫害)이래 1871년 무렵까지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그중에서 44명의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여 선포된 103위 성인 (聖人) 가운데 포함되었다. 이로써 서소문 밖은 성인 44명이 순교의 영광을 얻은 거룩한 믿음의 터전이요, 또 다른 성인을 낳게 될 약속의 터전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 성인 탄생을 기리기 위해 1984년 이곳 서소문 공원 안에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이 헐리게 되었고, 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오늘 이 자리에 새 순교자 현양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 현양탑을 세우는 목적은 천주교회 44명의 성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진리를 증거하다가 희생된 수많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들의 위대한 정신과 믿음을 후손에게 전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인과 순교자들을 본받아 하느님 말씀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1999년 성령강림절에 이 탑을 이곳에 세운다.

 

천주교 서울대교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1999

 

제작자 : 가톨릭조형예술연구소 (대표 조광호)

제작기간 : 1997년 4월 ㅡ 1999년 5월             

 

 

 

 

뚜께우물 (망나니 우물)

 

조선시대 국가 공식 처형장소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뚜께우물 터이다. 우물이 크고 깊으며 물의 양이 많아 늘 흘러내려 평상시에는 우물의 덮개를 덮어 두고 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다고 전해진다. 사형 집행 당시, 망나니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칼날에 뿜어 대며 죄인 주위를 돌면 가족이나 친지들은 품삯 이외의 돈을 더  던져주곤 했는데 이를 '행하 行下' 라고 불렀다. 가급적 고통을 주지 말고 단칼로 죽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뚜께우물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개정 蓋井 우물이라는 명칭이 되었고, 주변 마을의 이름도 "개정동" 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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