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ㅡ 018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
원영 지음
2024, 불광출판사
능곡도서관
SF107530
220.4
원64ㅇ
원영 (圓映)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대승계와 남산율종' 에 관한 연구로 일본 하나조노 [花園]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상임 연구원과 교육아사리 (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교육위원 등을 역임하고 여러 대학과 사찰 등지에서 강의를 하여 자신의 공부를 주변과 나누었다. 또한 불교계 청년멘토링 프로그램인 '청년출가학교' 와 고3 수험생을 위한 '청춘캠프' 에 지도법사로 참여하여 젊은이들의 인생 상담자로 '마음 간호사'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북구 청룡암의 주지로 도량을 돌보면서, BBS 불교방송 라디오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와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한다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원영 스님의 불교대백과>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계율을 바탕으로 부처님 당시 출가 수행자들의 생활을 엿본 『스님의 라이프 스타일』, 행복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산문집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 등이 있다.
네이버 밴드 | '원영스님과 함께'
https://band.us/band/92499519
단숨에 얽히고 즐겁게 깨치는
원영 스님의 불교 수업
삼법인 (三法印)은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 이라는
현실 인식과,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는
엄연한 변화의 이치,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나 [我]라고
할 것이 없다는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터득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화로운 상태, 열반이다.
자신을 고통에 빠진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행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하게 생각되거나 고통스럽게 느낄 수 있어야 그로부터 벗어날 마음도 일어나는 법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기본은 현실적인 '고의 인식' 이 바탕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모든 의식작용은 무상하다.
이것이 첫 번째 근본진리이니, 사유라고 수행하라.
모든 의식작용은 고이다.
이것이 두 번째 근본진리이니, 사유하고 수행하라.
모든 의식작용은 무아이다.
이것이 세 번째 근본진리이니, 사유하고 수행하라.
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
이것이 네 번째 근본진리이니, 사유하고 수행하라.
비구들아, 이 네 가지 근본진리를 사유하라.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으며,
근심과 슬픔과 번뇌 같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ㅡ 『중일아함경』 23권
'고 (苦)' 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괴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기쁨이 간간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 기쁨이 사라지고 나면 기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자꾸만 떠올라 도리어 현재의 삶을 더 괴롭게 느낀다.
기브고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내 괴로움에 원인을 제공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고통이 찾아오면 고통의 원인을 대부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어떨 때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근심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괴로움 | 4 고 |
내용 |
생 (生) | 태어남 | |
로 (老) | 늙음 | |
병 (病) | 병듦 | |
사 (死) | 죽음 |
괴로움 | 4 + 4 || 8 고 |
내용 |
애별리고 (愛別離苦)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 |
원증회고 (怨憎會苦) |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괴로움 | |
구부득고 (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 |
오온성고 (五蘊盛苦) | 우리 몸이 느끼는 괴로움 |
첫 번째는 '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괴로움, 이것을 두 번째 원증회고 (怨憎會苦)라고 한다.
세 번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이것을 '구부득고 (求不得苦)' 라고 한다.
주머니 사정은 어렵고, 갖고 싳은 것은 사지 못하니 괴롭다. 이것이 구부득고 (求不得苦)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색 (色) · 수 (受) · 상 (想) · 행 (行) · 식 (識)이라고 하는 '오온 (五蘊)' 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오온성고다.
오온 | 다섯 가지 모음 | 몸과 마음 |
색 (色) | 물질, 형상 | 몸 |
수 (受) | 느낌 | 정신 |
상 (想) | 생각, 상상 | |
행 (行) | 의지, 의도 | |
식 9識) | 마음, 인식 |
오온이 깃들어져 있는 몸으로 인해서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행하고, 재생하고, 저장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는 자신의 업을 괴롭고 무겁게 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 즉 '오온성고' 라고 한다.
"지금 나의 몸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다. 머리카락, 털, 손톱, 발톱, 이빨, 살갗, 살, 힘줄, 뼈, 골수, 뇌, 더러운 형상은 다 땅으로 돌아가고, 침, 콧물, 고름, 피, 진액, 가래, 땀, 눈물, 정기, 대소변은 다 물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사대가 제각기 흩어지면 지금의 허망한 몸은 어디에 있겠는가."
ㅡ 『원각경』 「보안보살장」
소설도 꿈속의 이야기요,
꿈 또한 허망한 세상의 이야기니,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생 그대로가 소설이요,꿈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허망한 꿈 아닌 게 없다.
모든 것은 영원할 수도 없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도 진실한
존재의 생존 양식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당면해 있는 현실이나 처해 있는 조건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생 (生) | 생겨남 | ⇨ | 성 (成) | 생성됨 |
주 (住) | 유지됨 | 주 (住) | 머무름 | |
이 (異) | 변화함 | 괴 (壞) | 무너짐 | |
멸 (滅) | 사라짐 | 공 (空) | 흩어짐 |
곡식이 많은 집에는 먹을 사람이 없고
아들 많은 집에서는 굶주릴까 시름하네.
높은 관직에 앉은 이는 어리석기만 한데
재주 있는 이는 재주를 펼 길이 없구나.
충만한 복을 다 갖춘 집은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더디기 마련이네.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이 탕진하고
아내가 지혜롭다 싶으면 남편이 꼭 어리석네.
달이 가득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그 꽃을 떨구네.
무릇 세상만사가 모두 이런 것이지
나 홀로 웃는 이유를 아는 이 없다네.
有粟無人食 (유속무인식)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達官必準愚 (달관필준우) 才者無所施 (재자무소시)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至道常陵遲 (지도상능지)
翁嗇子每蕩 (옹색자매탕) 婦慧郞必癡 (부혜랑필치)
月滿頻値雲 (월만빈치운)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物物盡如此 (물물진여차) 獨笑無人知 (독소무인지)
ㅡ 『다산시문집』
이야기 하나 더!
아소까 왕의 참회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자 불교의 자비를 사회법칙으로까지 적용시켜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고 있는 아소까 (Asoka) 왕에 대한 이야기다. 전륜성왕의 모델로 일컬어지는 아소까 왕도 첫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빈두사라 (Bindusara) 왕의 100명의 자식 가운데 하나였던 아소까 왕은 형제였던 99명의 왕자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왕이 된 후에는 이웃 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정복 사업에만 몰두하던 전쟁광이었다. 전쟁에서만 무려 10만 명을 죽이고, 15만 명을 생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칼링가 (Kalinga)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긴다.. 황폐한 전쟁터를 바라보며 아소까 왕은 생각했다.
'이런 것이 승리인가? 이것은 정의인가, 불의인가? 이것이 용기라면 무고한 아이와 여자들을 죽이는 것이 용기인가? 내가 한 일은 제국을 넓히고 번성시키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다른 왕국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남편을 잃은 여인, 아버지를 잃은 아이, 아이를 잃은 부모, 이것이 승리의 징표인가? 시체에 몰려드는 독수리와 까마귀들은 죽음과 악의 사자들이 아닌가?'
그는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쟁의 참담함을 뼈저리게 느낀 아소까 왕은 무력에 의한 정복 활동은 중지를 선언하고, 이를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이후 그는 불법 (佛法, dharma)에 의한 덕치주의를 추구했다. 이로써 아소까 왕의 마우리야 왕조는 역대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이 되었는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뻗어 나갔고, 동쪽으로는 현재 인도의 아삼 (Assam) 주 일부까지 뻗어 나갔다. 서쪽으로는 현재 인도의 파키스탄 지역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는 헤라트 (Herat)와 칸다하르 (Kandahar) 지방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인도 내에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 제국을 완성한 아소까 왕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존중하였다. 다만 그의 통치 이념은 어디까지나 불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소까 왕이 남겨놓은 뛰어난 조각 예술로 장식된 석주 (石柱)가 지금까지도 그의 삶과 종교, 업적 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제아무리 위대하거나 모두를 떨게 하던 무서운 왕이었어도, 무상함을 깨닫는 순간 삶을 대하는 태도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 '참회' 는 그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상' 이란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 의 개념에는 부정의 느낌도 긍정의 느낌도 없다. 현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 파악' 일 뿐이다.
허무하구나, 모든 것이 폭풍 앞의 벚꽃이로다.
흩날릴 때까지는 한낱 봄날의 꿈일 뿐임을.
あだに見よ誰も嵐の桜花
咲き散る程は春の夜の夢
ㅡ 다케다 노부카쓰 (武田信勝, 1567 ~ 1582)
달과 꽃을 마음대로 다 보았으니
덧없는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月花を心のままに見つくしぬ
なにか浮き世に思ひ残さむ
ㅡ 도요토미 히데츠구 (豊臣 秀次, 1568 ~ 1595)
행운이 너에게 미소를 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When fortune smiles, and
full of mirth and pleasure,
The days are flitting by without a care,
Lest you shold rest with only earthly treasure,
Let these few words their fullest import! bear :
'This, too, shall pass away.'
너의 진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될 일도, 가장 웅대한 일도
지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함을 기억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When earnest labor brings you fame and glory,
And all earth's noblest ones upon you smile,
Remember that life's longest, grandest story
Fills but a moment in earth's little while :
'This, too, shall pass away'
ㅡ 랜터 윌슨 스미스 (Lanta Wilson Smith, 1856 ~ 1939, 미국 현대 시인)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Away)」
'마치 풀잎 끝의 이슬방울이 해가 뜨면
재빨리 말라버려 잠시도 머물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이슬방울 같다.
마치 큰 빗방울이 물에 떨어져 물거품이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잠시도 머물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물거품 같다.
마치 물 위에 막대기로 그은 선이
긋자마자 사라져 잠시도 머물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물 위에 그린 선과 같다.
마치 산의 계곡물이 재빨리 흘러
모든 것을 휩쓸어가며 잠시도 1초도
머물지 않고 돌진하며 소용돌이치며 흐르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산의 계곡 물과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삶은 이슬과 같고, 물거품 같고,
물 위에 그은 선과 같고, 산의 계곡 물과 같다.
인생은 짧고 제한돼 있고 보잘것없고
괴로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진리를 까달아라! 선을 행하라!
태어난 모든 것들에게 불멸이란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장차 후회하지 않도록
고요한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가르침이다.
ㅡ 『앙긋따라니까야』
자신의 실체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알게 함으로써, 나아가 보리심을 발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중생에 대한 자비를 구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한 가르침이 '제행무상' 이다.
생멸의 변화는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인연과 조건에 따라 저절로 생겼다가 저절로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무상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에, 달관의 자세도 가질 수 있다.
잊어버리면 또 배우고, 잊어버리면 또 인식하고, 그렇게 올바른 불교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도록 매번 잊을 때마다 반복하여 학습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수행' 이다.
이야기 하나 더!
부처님도 늙는다
『쌍윷따니까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연로하신 부처님께서 저녁 무렵에 명상을 마치고 양지쪽에 앉아 서쪽을 향해 등을 따뜻하게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본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다가가 손과 발을 문질러 드리며 말을 꺼냈다.
"부처님, 이상해요. 이제 부처님의 안색은 더 이상 맑지도 않고, 빛이 나지도 않으며, 사지는 주름지고 물렁해졌습니다. 등도 앞으로 굽어져 감각기관의 변화가 눈에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 당연하다는 듯 이르셨다.
"그럼, 그렇지. 아난다야. 젊은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병들게 마련이며,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란다. 안색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맑지 않고 빛나지 않는다. 나의 사지는 주름지고 물렁해졌고, 등은 굽고 감각기관의 변화도 눈에 보인단다."
오늘날 우리는 부처님을 32상 80종호를 갖춘 분으로 생각하지만, 생전의 부처님도 육신을 가진 인간인지라 늙고 병들어 입멸하셨다. 무상의 이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나는 이제 아주 연로하여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오직 나 자신만을 의지하고 나는 그대들을 떠난다.
부지런히 마음챙김을 가지고 계행에 굳건히 주 (住)하라.
차분히 가라앉은 생각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지켜라.
가르침과 계행에 부지런히 머무는 사람은
윤회를 벗어나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
ㅡ 『디가니까야』 16
우리가 무아 (無我)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이 몸뚱이 때문일지 모른다.
여기 내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는
우리가 믿고 싶은 존재로서의
영원불변한 자아란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 몸뚱이는 그저 오온이
조건에 따라서 결합된 형상일 뿐이다.
불교에서 이 세상을 비유할 때 '고해 (苦海)' 즉 '고통의 바다' 라고 하는 건,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해서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인연에 의지하지 않은 채 우리 삶에 들어와 존재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행위 주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어떠한 현상도 홀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체를 포함한 형상이나 물질과 정신적 기능을 합해 총체적으로 표현한 불교 용어가 '오온'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의 원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존재로서의 영원불변한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괴롭고 슬픈 느낌이나 기쁘고 행복한 느낌은 애초에 없었다. 자신이 접한 그 어떤 대상에도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감정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시계가 멈추듯이, 모든 것은 조건이 달라지면 그 역할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 쪽지
열반
열반 (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와나 (nirväna)' 의 음역이다. 니르와나는 nir (없어진) + vä (불다, to blow)의 과거분사로 '불어서 없어진', '불어서 꺼진 상태' 를 뜻한다. 예를 들면,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진 상태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무엇을 불어서 끈 것인가? 부처님은 '갈애가 소멸한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갈애가 만들어낸 '번뇌의 소멸' 을 말한다. 또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바로 열반' 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열반에는 '유여열반 (有餘涅槃)' 과 '무여별반 (無餘涅槃)' 이 있다. 유여열반은 남은 것이 있는 열반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6년 수행 후에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때 이룬 열반을 보통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아직 의지할 만한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유여의열반 (有餘依涅槃)' 이라고도 부른다. 유여열반을 얻은 부처님이 과연 무엇을 까달았는지 찾아보니, 율장 (律藏)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는 것이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존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것이든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이기에 무상하게 인연에 의해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였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 잠깐 존재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의 실상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연기의 실상을 깨달은 부처님은 자비심에 가득찬 눈으로 중생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유여열반의 상태에 이른 후, 무려 45년간 육신의 몸을 이끌고 때론 병고도 겪으며 수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중생을 제도하시다가 쿠시나가라 (⑤ Kusinagara, 구시나가라 拘尸那伽羅)의 사라쌍수 (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때의 열반을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완전한 '무여열반' 또는 '무여의열반 (無餘依涅槃)' 이라고도 한다. 무여열반에 들면 다시 태어나지도, 육도를 윤회하지도 않으며, 그대로 적멸 (寂滅)에 든다고 한다.
육신으로 인해 고통이 따르고,
마음이 있어 괴로움을 만든다.
그러니까 이 상태를 명확하게 아는 것,
고통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고성제 (苦聖諦)' 의 가르침이다.
현재 나의 상태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
그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것은 유익하며 거룩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여,
경계에서 멀어지도록 이끌며, 욕망의 집착을 놓음으로 이끌며,
바르지 않은 것을 버리도록 이끌며,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ㅡ 『쌍윷따니까야』 56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이와 같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다. 싫은 것과 싫은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집착의 대상이 되는 모든 오온이 다 괴로움이다."
ㅡ 『쌍윷따니까야』 6권
1. 태어남의 고통 : 생명이 시작되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
2. 늙음의 고통 :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몸이 변하고 무상함을 느끼며 알게 되는 괴로움
3. 병고의 고통 : 병이 들어 통증을 느끼는 괴로움
4. 죽음의 고통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주는 괴로움
5. 원증회고 :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괴로움
6. 애별리고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는 괴로움
7. 구부득고 : 아무리 갖고 싶어도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8. 오온성고 : 색 (色) · 수 (受) · 상 (想) · 행 (行) · 식 (識)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괴로움
사람이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다. 아프다는 걸 알아야 치료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가 불행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가 위대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ㅡ 파스칼, 『팡세』 중에서
삼독 |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세 가지 |
탐 (貪) | 먹고 싶고, 갖고 싶은 욕심 → 오욕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
진 (瞋) |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어서 생긴 분노 |
치 (癡) | '무상' 하고 '무아' 임을 모르는 어리석음 |
집성제 (集聖諦)의 핵심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나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고성제의 요점이라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집성제의 요점이다. 자신이 아파야 병이 난 줄 알고,
병이 난 줄 알아야 병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리고,
병이 난 것 같은데도 외면해 버리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불교에서는 '고' 의 반대말은 '락' 이 아니라, 고요한 세계, 평안의 세계, 열반의 세계라고 말한다. 괴로움의 반대는 괴로움이 없는 평온한 삶이라는 것이 불교적 사유방식이다.
"비구들아, 괴로움에 발생이라는 진리가 있다. 과보를 일으키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고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 그 갈애가 바로 원인이다."
ㅡ 『디가니까야』 22권
지식 쪽지
율장
'율장 (律藏)' 은 출가 수행자 개개인은 물론, 승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승가 규칙의 모음집' 을 말한다.
원래 출가 수행자들에게는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다. 그것을 가리켜 '율 (律, vinaya)' 이라고 하는데, 어원을 찾아보면 '제거하다 · 훈련하다 · 교육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그 안에 담긴 '제거, 규칙, 행위규범' 등의 의미를 받아들여 불교에서는 승가 운영을 위한 규칙을 가리키는 용어로 삼았다. 그러니까 율은 승가의 행동규범인 것이다.
이러한 율의 제정을 통해 출가자 개개인에게는 심신을 잘 다스리고, 번뇌와 악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바른 수행으로 이끌도록 한다. 또 승가의 입장에서는 원만한 운영과 승가 화합을 위해 필요한 규범들이 담겼다. 따라서 율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겼을 때에 합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율을 총괄하여 모아놓은 것이 바로 '율장' 이다.
"세 가지 청정함이 있다.
몸의 청정, 말의 청정, 생각의 청정이 세 가지다.
몸의 청정이란 무엇인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의 청정이란 무엇인가.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악담하지 않으며, 잡담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의 청정이란 무엇인가.
욕심 부리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ㅡ 『앙굿따라니까야』 3부 118
이야기 하나 더!
석가족에게 품은 원한
『중일아함경』 26권에 석가족이 멸망하던 때의 비참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처님 당시 석가족의 이웃 나라인 코살라 (Kosalā)국의 '위두다바 (Vidūdabha)' 라는 왕자가 있었다. 이 왕자는 파세나디 (Pasenadi) 왕의 아들인데,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그런데 이 위두다바 왕은 석가족에 깊은 원한이 있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아버지인 파세나디가 코살라국 왕이었을 때, 주변의 약소국들에게 공주를 바치게 한 적이 있다. 그렇게 각국에서 보낸 공주가 파세나디 왕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석가족은 코살라국이 신흥 강대국일지라도 왕의 출신이 낮았기 때문에 공주를 시집보내기 싫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괴를 내어 왕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파사바' 라는 여인을 공주로 속여서 코살라국에 보냈다. 파사바가 낳은 아이가 위두다바였다.
위두다바가 여덟 살이던 어느 날, 왕자는 어머니와 함께 석가족이 사는 카필라성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자신의 어머니가 공주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살라국의 왕비인 어머니와 왕자인 자신을 더러운 천민들이라고 하며 뒤에서 궁녀들이 흉 보는 걸 듣게 된 것이다.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왕자는 그 천대를 잊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신이 왕이 된 후, 다짐한 대로 지난날의 수모를 갚기 위해 제일 먼저 석가족을 멸망시키려 했다. 이윽고 왕은 원한을 갚겠다는 목적하에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으로 쳐들어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이 홀로 길을 나섰다. 부처님은 군대가 지나가는 길에 나가서 죽은 나무 아래 뙤약뼡에 앉았다. 위두다바 왕이 진군하다가 이러한 부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왕은 부처님께 왜 이렇게 뙤약볕 아래 앉아계시는지 여쭈었다. 부처님은 "그 어떤 나무 그늘보다도 내 종족의 그늘이 더 시원하다." 라고 대답한다. 위두다바 왕은 부처님이 석가족의 멸망을 가슴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하는 수 없이 퇴군하였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가서도 왕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진군을 했다가 번번이 중간에 부처님을 만나 포기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석가족을 치러가던 날이었다. 부처님은 더 이상 길에 나가 막지 않으셨다. 그리고 "전생의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 그물로 덮을 수도 없다." 는 말씀을 하셨다. 인연의 과보는 결국 받아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카필라성에 쳐들어간 위두다바 왕은 석가족을 멸망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석가족 대부분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렇게 원한을 푼 위두다바 왕은 일주일 후 시녀들과 함께 강가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다가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궁궐도 벼락이 쳐서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석가족이 몰살당하던 날, 부처님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긴 후, 제자들이 부처님께 무슨 인연인지 묻자, 부처님께서 석가족의 과거 인연을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 석가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어느 해 가뭄이 들어 물이 말라 연못 속 물고기들을 잡아먹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나왔는데, 이것 역시 삶아 먹었다. 이때 마을에 고기를 먹지 않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를 잡자 물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리면서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 큰 물고기가 바로 지금의 위두다바 왕이며, 석가족을 몰살시킨 군대는 죽은 연못의 물고기였다. 그리고 물고기의 머리를 때리던 아이는 부처님이었다. 그로 인해 부처님은 3일 동안 머리가 몹시 아팠다고 한다.
원한과 과보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서로 원한을 갚으려 한다면, 끝날 날이 없다. 어느 쪽에선가는 참아야 끝날 일이다.
멸성제 (滅聖諦)는 아픔의 원인을
다 제거햇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고요하고 안온한 최상의 상태,
적정 (寂靜)의 상태인 열반을 말한다.
열반의 원어인 '니르와나 (nirvāṇa)' 는
촛불을 훅 불어서 끈 것처럼,
활활 타는 모든 번뇌를 완전히
꺼버린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 열반의 성취야말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다.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번뇌의 재료들에 대해 이해하기를, 앞서 공부한 대로 '실재하지 않고 무상한 것' 이라고 인식하면 열반의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나의 잘못된 생각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것들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왜곡된 인식과 판단은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들고, 많은 번뇌와 악업을 만들어낸다.
욕심도, 성냄도 내려놓고, 어리석지 않다면, 번뇌 또한 소멸된다. 이 상태가 '열반' 이다.
"비구들아,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가 있다.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ㅡ 『율장대품』
도성제 (道聖諦)는 삶에서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
곧 멸성제로 가기 위한 방법을 말한다.
그 길에는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의 여덟 가지가 있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았고,
그 원인을 없애고 난 다음의 상태를 알았고,
그 다음에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팔정도 (八正道)' 라고 한다.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ㅡ 『맛지마니까야』 141
팔정도 | 여덟 가지 바른 길 |
정견 (正見) | 바른 견해 |
정사유 (正思惟) | 바른 생각 |
정어 (正語) | 바른 말 |
정업 (正業) | 바른 행위 |
정명 (正命) | 바른 생활수단 |
정정진 (正精進) | 바른 정진 |
정념 (正念) | 바른 마음챙김 |
정정 (正定) | 바른 집중 |
이 정도는 알아야죠!
간단하게 보는 부처님 생애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은 기원전 6세기, 북인도의 카필라성에서 석가족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숫도다나 왕 (Suddhodana, 정반왕 淨飯王), 어머니는 마야 (Maya, 摩耶)부인이었다. 어머니 마야부인은 아들을 낳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화엄경』에 보면 53선지식 가운데 마야부인이 나오는데, 마야부인은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실 때마다 부처님을 잉태하신다고 한다.
숫도다나 왕은 '모든 것을 성취한 자' 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싯다르타 (⑧ Siddhārtha)' 라고 지었다. 예언자 아시타선인은 장차 아이가 출가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요, 왕위를 받으면 전륜성왕 (轉輪聖王)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들이 출가할까 걱정이 된 왕은 왕자를 위해 계절별로 별장을 지어 주고 좋은 것만 보고 살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왕궁에는 병들고 늙어 추한 사람의 출입도 금하였다. 화려한 음악과 꽃, 맛난 음식, 아름다운 이들만이 왕자 곁에 있었다.
삶에 대한 고민
아무리 감추어도 세상을 다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왕자는 기어코 감추어진 세상을 보았다. 늙음과 병듦, 죽음을 마주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사문유관 (四門遊觀)' 이라고 표현했다. 17세기 되던 해, 왕궁을 벗어난 왕자는 동문 앞에서 늙은 노인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엔 남문 앞에서 병에 신음하는 환자를 보았고, 서문 앞에서는 장례 행렬을 보았다. 왕자는 큰 충격을 받았고, '왜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북문을 나서다가 초라하지만 맑은 모습을 한 수행자를 보게 된다. 왕자는 수행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수행자는 말했다. "저는 해탈하고자 하는 수행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왕자는 결심한다. '내가 갈 길이 수행자의 길이구나.'
궁을 버리고, 인연도 버리고
드디어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긴 날, 부처님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을 나섰다.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가 (出家, pravrayā)란 본래 '집으로부터 집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 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홀로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마 (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쁫따 (Uddaka Rāmaputta)' 라는 당시 유명한 두 스승을 찾아갔다. 이들에게서 각각 '무소유처정 (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 의 높은 경지까지 배우지만,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고 네란자라 강가의 고행림으로 홀로 떠난다. 그곳에는 다섯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곳에서 6년이 지나도록 극단적인 고행을 닦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뭔가 자신의 수행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부처님은 강물에 몸을 씻고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아 기력을 회복했다. 이를 본 다섯 고행자들은 부처님을 비난하며 떠났다.
깨달음을 이루던 날 밤
부처님은 자신의 수행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았다. 그러자 어렸을 때 부왕을 따라 농번기 행사에서 경험했던 선정체험이 떠올랐다. 그것을 바탕으로 고행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번뇌를 소멸시켰다. 사선정 (四禪定) 수행이 그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 을 깨달았고 '사성제' 를 통찰했다. 그리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켰다. 『사분율』에 의하면, 부처님은 '숙명통 (자신의 전생을 앎), 천안통 (남의 전생과 내생을 앎), 누진통 (모든 번뇌를 소멸)' 이 열리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던 날 저녁에 이미 사선 (四禪, 들숨과 날숨의 출입이 사라지는 경지)에 올랐는데, 그때 숙명통을 얻어 무수한 전생을 보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자 다른 생명의 전생과 내생이 모두 보이며 천안통이 열렸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누진통이 열리면서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생겼고,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지며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한다. 비로소 부처가 된 것이다.
사실, '부처' 라는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뜻하는 호칭이 아니다. '부처' 의 본래 표현인 산스크리트어 '붓다 (buddha)' 는 '깨달은 자' 를 뜻하는 단어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누구든 '부처' 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왕자 시절이나 수행자 시절에도 '부처님' 이라고 칭하였다.
전도의 첫걸음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미가다야 (Migadāya, 녹야원 摩野園)에서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가 처음으로 법을 설하셨다. 이를 초전법륜 (初轉法輪)이라 한다. 그 설법으로 안냐따꼰단냐 (Aňňatakoṇḍaňňa, 교진여 橋陳如)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었고,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승가가 최초로 성립했다. 그 후, 야사 (Yasa, 耶舍)와 54명이 젊은 청년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마하박가』에 의하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나는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그대들도 천신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라.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과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고
인간과 천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은,
바른 뜻과 의미를 갖춘 문장으로 법을 설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수행자의 삶을 보여주어라.
세상에는 마음에 먼지와 때가 덜 낀 자도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멀어졌지만,
만일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잘 알아듣게 되리라.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렐라 (Uruvelā)의 세나니 (Senānī) 마을로 가리라."
이것이 그 유명한 '전도선언' 이다. 당시 우루렐라에는 불을 섬기는 이교도들이 많았다. 깟싸빠 (Kassapa) 삼형제가 이끌고 있었는데, 각각 500명, 300명, 200명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 후 산자야 (Sañjaya)의 제자였던 사리쁫따 (사리불)와 목갈라나 (목련) 존자가 250명을 데리고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전도선언 이후 불교 교단은 급속도로 커졌다.
3개월 후 입멸에 들리라
부처님은 45년 동안 쉼 없이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부처님과 승가 교단은 북인도 최대의 종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처님도 연로해지셨다. 80세가 되었을 때, 부처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내용은 『대반열반경』에 자세히 나온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3개월에 걸친 여정이 여기 담겨 있다. 부처님은 3개월 전에 열반에 들 것을 미리 예언하셨는데, 특히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말씀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 늙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내 나이 이제 80이 되었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힘으로 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의 힘으로 가는 것 같구나. 아난다야,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느낌들을 소멸하여 여래는 항상 형상을 떠난 집중에 머문다. 오직 이때 여래의 마음은 더욱 안온하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이러한 말씀 후 여행 중에 대장장이 아들 쭌다 (Chunda)의 공양을 받으시고 몹시 앓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부처님은 마지막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향해 가셨다. 그곳의 사라나무 숲에서 수밧다 (Subhadda)를 마지막 제자로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유훈을 전하셨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다 소멸한다.
그러니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인천 (人天)의 스승이신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상수제자인 마하깟사빠 (Mahākassapa, 마하가섭 摩訶迦葉) 존자가 돌아온 후 다비식이 열렸다. 이후 부처님의 사리는 각 나라로 나누어져 사리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을 바탕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고통이 만들어졌는지
그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연기법은 모든 존재가
서로서로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관계성' 을 세우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此起故彼起 (차기고피기)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 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 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좋은 게 있으면 싫은 것도 있고, 평등이 있으면 불평등도 있게 마련이다. 내가 한 행동의 선악 여부에 따라 좋고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것까지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인 연기를 기반으로 한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출연하든 안 하든 항상 법계에 있었다. 여래는 다만 이것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 (正覺)을 이룬 뒤, 여러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일 뿐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이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ㅡ 『아함경』
"이렇게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얻겠는가? 완전한 행복은 다섯 감각기관 (몸)이 편안해질 때 얻어진다. 깊은 삼매는 잘 균형 잡힌 평온한 상태에서 얻어지고, 그 깊은 삼매로부터 최상의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ㅡ 『붓다짜리따』 12장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끊임없는 윤회에서 헤매면서 괴로워한다. 사람의 눈은 욕망과 어두움에 가려져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ㅡ 『율장대품』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러한 연기의 도리가 바로 나의 거룩한 제자가 진리를 철저하게 꿰뚫어보고 선명하게 보는 훌륭한 방법이다."
ㅡ 『쌍윷따니까야』 12
◎
깨달은 분이 설명하는 십이연기
『쌍윷따니까야』에 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노사 (늙음과 죽음)가 무엇인가? 여러 존재하는 것들이 노쇠하고 이가 빠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고 피부는 주름지고 원기가 줄어들고 감각기관이 퇴화한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여러 존재들이 죽어 오온이 흩어지고 버려지고 사라진다.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생 (태어남)이 무엇인가? 여러 존재들이 잉태하여 태어나 오온이 나타나고 감각기관이 생기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유 (존재)란 무엇인가? 세 종류의 존재가 있다. 감각으로 만들어진 존재 (욕계의 존재),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 (색계의 존재), 형상이 없는 존재 (무색계의 존재)다. 이것을 존재라 한다.
취 (집착)란 무엇인가? 네 종류의 집착이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애 (갈애)란 무엇인가? 여섯 종류의 갈애가 있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갈애, 들리는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이 바깥 대상을 접촉했을 때에 발생한 갈애가 그것이다.
수 (느낌)란 무엇인가? 여섯 종류의 느낌이 있다. 눈에 보이는 느낌, 귀에 들리는 느낌, 코에 대한 냄새의 느낌, 혀에 대한 맛의 느낌, 몸에 의해 만져지는 느낌, 마음에 의해 인식하는 느낌이 그것이다.
촉 (접촉)이란 무엇인가? 여섯 종류의 접촉이 있다. 눈의 접촉, 귀의 접촉, 코의 접촉, 혀의 접촉, 몸의 접촉, 마음의 접촉이 그것이다.
육입 (여섯 감각기관)이란 무엇인가? 눈의 감각, 귀의 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몸의 감각, 마음의 감각이 그것이다.
명색 (이름과 형상)이란 무엇인가?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의식 (주의집중)에서 온 것을 이름이라 하며, 지 · 수 · 화 · 풍의 네 가지 요소에서 온 것을 형상이라 한다.
식 (의식)이란 무엇인가? 여섯 종류의 의식이 있다. 눈으로 보고 일어난 의식, 귀로 듣고 일어난 의식, 코로 냄새를 맡고 일어난 의식, 입으로 맛보고 일어난 의식, 몸에 접촉함으로써 일어난 의식, 마음으로 느끼고 일어난 의식이 그것이다.
행 (형성)이란 무엇인가? 세 종류의 의도를 가진 형성이 있다. 행동으로 만들어진 형성, 말이 만들어낸 형성, 생각이 만들어낸 형성이 그것이다.
무명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 (中道)의 가르침은 쉽게 말해
차별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차별이 없고 극단을 피해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들,
분별하고 이름 지어 만들어낸 것들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중도다.
제아무리 고상한 종교적 쾌락이어도 지나치게 매어 있으면 극단적 쾌락임에는 분명하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까지도 포함해서 욕망의 끝으로 치닫는 것을 우선 내려 놓으라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천박하며 하찮고 고결하지 않고 유익함이 없으며,
지나친 고행에 몰두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저열하며 유익함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깨달았다.
중도는 통찰력을 주며, 최상의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중도인가?
중도는 바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八正道]이다.
바른 견해 [正見], 바른 사유 [正思惟], 바른 말 [正語],
바른 행위 [正業], 바른 생활수단 [正命],
바른 정진 [正精進], 바른 마음챙김 [正念], 바른 집중 [正定]이다.
이것이야말로 여래가 깨달은 중도로서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ㅡ 『쌍윷따니까야』 56
둥근 원을 떠올려보라. 어디서 선이 시작된다 해도 그 선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시작은 끝으로 이어지지만, 그 끝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입장에 따른다.
그것은 '있다' 와 '없다' 다.
만일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써
세상의 시작을 잘 관찰한다면,
세상이 '없다' 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써 세상의 끝을 관찰한다면
세상에 '있다' 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극단적인 가설이다.
모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제2의 극단적 가설이다.
인격을 완성한 사람은
두 가지 극단적 가설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에 의해 법을 설한다."
ㅡ 『쌍윷따니까야』 2
진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다. 일부만 보고 전체를 상상해서 말한다면 누구나 다 틀릴 수 있다.
◎
성철 스님의 중도법문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옮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고 그름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 [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ㅡ 성철 스님, 『백일법문』 중에서
바라밀은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와 고통이 없는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으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 방편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스스로 고통이 없는 세계로
건너는 행위이자 고통이나
불행에 빠진 다른 중생을 도와서
함께 건너는 마음, 즉 '자비심' 이다.
최종적으로는 '행위' 에 방점을 찍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잘 버리는 것이 보시바라밀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 지계바라밀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 인욕바라밀이고,
물러남이 없는 것이 정진바라밀이며,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선정바라밀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ㅡ 『반야경』 (T8, p. 325c)
육바라밀 | 내용 |
보시바라밀 | 아무런 조건 없이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 |
지계바라밀 | 계율을 잘 지켜 선행을 하고, 악한 업을 짓지 않는 것 |
인욕바라밀 | 온갖 고통과 번뇌를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 |
정진바라밀 | 끊임없이 바른 노력 (정진)을 하는 것 |
선정바라밀 |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집중하는 정신 상태를 이루는 것 |
반야바라밀 |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하는 것 |
보시바라밀은
탐욕과 이기심을 없앨 뿐만 아니라,
자신의 들끓는 번뇌와 욕심까지도
없애기 위한 실천이다.
보시를 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재물로 베푸는 재시 (財施)와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시 (法施),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무외시 (無畏施)다.
"장자여, 어떤 것이 보시에 대해 관대함을 구족함인가?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응해주고,
보시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한다.
장자여, 이를 일러 보시에 관대함을 구족함이라 한다."
ㅡ 『앙굿다라니까야』 4
'보시' 라고 하면 보통은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게 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힘이 되고 위안이 되어주는 것도 아주 큰 보시가 된다.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가 되어 돌아오고
나쁜 사람에게 보시하면 천 배가 되어 돌아오며,
착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10만 배가 되어 돌아오고,
욕심 없는 이에게 보시하면 10억만 배가 되어 돌아오며,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이 돌아온다."
ㅡ 『대지도론 (大智度論)』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수많은 유혹에 동요될 수밖에 없다.
세이렌만큼이나 강력한 유혹이
마음을 동요시키고, 인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더러는 진흙탕에 구르기도 하고,
더러는 고인 물처럼 썩어가기도 한다.
화가 부글부글 들끓기도 하고,
번뇌 망상이 잡초처럼 자라거나,
담쟁이덩굴처럼 쑥쑥 뻗어 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묶어줄 밧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율' 이다.
십선도 | 내용 | |
불살생 (不殺生) | 육체 [身] |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것 |
불투도 (不偸盜) | 도둑질하지 않는 것 | |
불사음 (不邪婬) |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 | |
불망어 (不妄語) | 언어 [口] |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
불기어 (不綺語) | 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 것 | |
불악구 (不惡口) | 험담을 하지 않는 것 | |
불양설 (不兩舌) | 이간질하는 말을 않는 것 | |
불탐욕 (不貪欲) | 마음 가짐 [意] |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 |
불진에 (不瞋恚) | 분노하지 않는 것 | |
불사견 (不邪見) |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 |
사소한 욕망이라도 점점 커지게 마련이니, 적절한 통제로 자신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제아무리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을 하고 인간 본성의 덧없음을 인식하며 수행해도,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삼취정계 | 내용 |
율의계 (律儀戒) | 불교 교단에서 제정된 모든 계율 |
섭선법계 (攝善法戒) | 선업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 |
요익중생계 (饒益衆生戒) | 다른 중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실천 |
인욕바라밀은 억지로 참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를 연민하고 포용하는 삶을 말한다.
멀게는 참는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다.
분노도, 원망도, 교만도 없이, 그 어떤 것도 참는
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행하는 것.
그러니 인욕바라밀은 일상의 인내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욕은 이보다 조금 더 범위가 넓다. 불교에서 감내해야 하는 '욕' 은 상대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모욕감과 감내할 수 없는 모욕감, 그리고 예상치 못한 병이나 자연스러운 늙음까지도 포함하여 전부 모욕의 범주로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굴욕적인 것만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오만하고 교만하게 만드는 요소까지도 알아차리라는 이야기다.
"나는 모든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타인을 위한 사랑과 자비와 함께
이기심과 탐욕 제거를 통해 달성되는
평화와 만족감에서 옵니다.
지구상 어디에서 왔건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애를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가 있건 없건 누구나 사랑과 자비를 행한다면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정진바라밀을 실천한다는 것은
선업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게으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지속해 가는 노력이며,
게으름과 방일에 물들지 않는 생활이다.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잠시 쉬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수행이 정진이다.
힘들 때 쉬어가는 것과 게으른 것은 다르다. 잠깐의 게으름이 잘못이 아니라, 게으름으로부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그 습관이 부끄럽고 무서운 것이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그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마라.
물과 우유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마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달아 너희를 위해 설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엇이든 진리대로 행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설령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임을 잊지 마라.
육신은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ㅡ 『열반경』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는 것이 정진이요,
부단한 정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이다.
헛된 생각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노력이 정진이라면,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 집중을 이룬 상태가 선정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지면
서서히 선정의 힘이 생긴다.
바람에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스님이 말했다.
"깃발이 흔들리는구먼."
다른 스님이 말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일세."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육조 혜능 스님이 말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닐세.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세."
ㅡ 『무문관 (無門關)』 제28칙 '비풍비번 (非風非幡)'
오개 | 마음을 가린 다섯 가지 덮개 |
탐욕개 | 끝없이 탐욕을 일으키는 번뇌 |
진에개 | 화를 내고 증오하는 번뇌 |
수면개 | 나태하고 무기력한 것이 만드는 번뇌 |
도회개 | 들떠 있어서 생기는 번뇌 |
의개 |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번뇌 |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니,
온갖 착한 행위에 이르는 길을 키워주네.
信爲道元功德母 (신위도원공덕모)
長養一切諸善法 (장양일체제선법)
ㅡ 『화엄경』 「현수품」
그대는 이미 번뇌의 불길을 다 소멸했으나
세상의 미혹한 불꽃은 오히려 더 치성하다.
마땅히 본원을 돌이켜 중생을 제도하여
다 바라밀행을 닦게 하여 해탈케 할지어다.
汝雖已滅煩惱火 (여수이멸번뇌화)
世間惑焰猶熾然 (세간혹염유치연)
當念本願度衆生 (당념본원도중생)
悉使修因趣解脫 (실사수인취해탈)
반야바라밀은
지혜를 찾는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수행을 통해
형성된 지혜로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중생과 함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중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지혜,
중생을 도울 방법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리석은 자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이는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알듯이
ㅡ 『담마빠다』
불교의 최종목표는 깨달음인 것 같지만, 목표점은 항상 그 너머에 존재한다. 중생을 향해 있다. 애써 성취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지혜도, 따지고 보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의 완성 또한 중생을 위함인 것이다.
지식 쪽지
사무량심
자 (慈) · 비 (悲) · 희 (喜) · 사 (捨), 이 네 가지 마음을 사무량심 (四無量心)이라고 한다. 사무량심은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보살이 가져야 할 네 가지 크고 넓은 마음이다.
첫째, 자무량심 (慈無量心)은 악의나 증오 없이 무한한 자애와 사랑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많은 사람들과 자애로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애심이 많은 사람은 이타심이 많고, 자무량심을 키우면 성내는 마음이 사라진다.
둘째, 비무량심 (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마음이다. 연민심이 많은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비무량심을 키우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희무량심 (喜無量心)은 다른 중생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며,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는 마음이다. 남 잘 되는 것을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잘 되면 그래도 괜찮은데,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배 아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함께 기뻐할 줄 알고, 희무량심을 키워 박수쳐줄 줄 아는 사람은 시기하는 마음을 잘 알아 내려놓을 줄 안다.
사무량심 (捨無量心)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고, 무한한 평정심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차별하는 마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평온하며, 사무량심을 키우면 교만한 마음이 사라진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그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마라.
물과 우유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마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달아 너희를 위해 설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엇이든 진리대로 행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설령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임을 잊지 마라.
육신은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ㅡ 『열반경』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불교 공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
"불교는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하기 쉬운 공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젊은 친구들에게 무상 (無常)에 대해 제가 열강을 하며 백날 이야기해도 그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 놀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즐거운 일도 많은데, 무상하다니 뭔 소리냐고 반문할 친구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릅니다. '인생이 무상하다.' 그러면, 제 말 한 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질지도 모릅니다."
_ '책을 마치며' 중에서
'읽은 책들 > 2024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ㅡ015 1001 마리 물고기] (0) | 2024.08.01 |
---|---|
[2024ㅡ013 바닷속 깊은 곳으로] (0) | 2024.07.03 |
[2024ㅡ011 예술, 인간을 말하다] 1ㅡ3 (1) | 2024.05.23 |
[2024ㅡ012 땅속 깊은 곳으로] (0) | 2024.05.18 |
[2024ㅡ011 예술, 인간을 말하다] 1ㅡ2 (0) | 2024.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