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한양도성박물관] 01

드무2 2022. 5. 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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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박물관] 01

 

 

 

 

 

관람일 : 2022년 5월 10일(화)

 

소재지 : 서울시 율곡로 283(종로6가 70)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

 

 

 

한양도성박물관

1396년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습니다. 지형과 한몸이 되어 축조된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입니다. 흥인지문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한양도성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입니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미래가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리플렛

[한양도성]2016재개관_4단리플렛(웹)_국문_축소.pdf
1.27MB

 

 

 

상설전시실 1 -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축소 모형과 영상을 통해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한양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순성 체험 코너에서는 곡면 영상을 통해 18.627km의 한양도성을 둘러보는 동시에, 순성할 때 유용한 정보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수선전도 首善全圖>

General Map of Seoul

 

'수선首善'이란 『시경詩經』에 '건수선자경사시建首善自京師始', 즉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실제 지형과 달리 서북에서 동남쪽이 짧은 방형方形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성 안과 밖에 다른 축적을 사용하여 도성 내부 공간을 부각시켰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64년 목판 인쇄본을 3배 확대하여 목판 위에 양각으로 재현하였다. 모본模本이 된 지도는 1824~1834년경 고려대학교 소장 목판(보물 853년)이 만들어진 이후에 전주에서 재차 간행된 것이다. 성균관에 건물 두 채가 더 그려져 있고 양철평梁哲坪과 궁동宮洞의 지명에 口가 둘러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지도의 내용 및 모양, 글자체까지 고려대학교 소장 목판과 완전히 일치한다.

 

 

 

寢廟所以奉祖宗而崇孝敬

宮闕所以示尊嚴而出政令

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

此皆有國家者所當先也

 

종묘宗廟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고,

궁궐宮闕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1394년(태조 3) 11월 3일

 

 

 

서울, 한양도성

 

인구 1천만 명, 면적 605㎢의 거대도시 서울은 매일매일 변화하는 새로움의 연속체이다. 해가 뜨고 서울의 하루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도시는 빠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서울의 전부는 아니다. 서울은  600년 두터운 과거가 오늘의 일상과 함께 공존하는 역사문화도시로서, 오래도록 도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 온 한양도성이 이를 증명한다.

1396년 조선의 수도 서울(한양)에 건설된 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자 도성민의 삶을 지키던 울타리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성의 기능은 없어지고 망각 속에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채 우리 곁에서 멀어졌지만 한양도성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과 복원을 통해 현대에 되살아나고 있는 한양도성은 사계절과 밤낮의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도 도성 안 서울 사람들을 품고 있다.

 

 

 

 

 

 

 

 

 

서울, 한양도성

    어제와 오늘

Chronology of Seoul and

                              Hanyangdoseong

 

 

 

 

 

 

1392 조선 건국

1394 한양 천도

1395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

       궁궐(경복궁), 종묘, 사직 완성

       도성조축도감 설치

1396 한양도성 건설(1차 : 1396. 1. 9~2. 28 / 2차 : 1396. 8. 13~9. 30)

1397 흥인지문 옹성 축조

1398 숭례문 완공

1399 개경 환도

1405 한양 재천도

1412 개천 공사

1413 시전행랑 건설(1412~1412)

       풍수지리설에 따라 숙정문과 창의문 폐쇄

       돈의문 폐쇄, 서전문 건립

       홍화문 수리

1421 도성수축도감 설치

       서전문과 옹성 수리

 

 

 

1422 무너진 석성 구간 보수, 토성 구간을 석성으로 개축

       서전문 폐쇄, 돈의문 건립

       성문도감 설치

1423 남산에 봉화 5곳 설치

1426 성문도감과 금화도감을 합하여 수성듬화도감 설치

1448 숭례문 개건

1451 한양도성 수축, 흥인지문 수리

1456 남소문 건립

1460 수성금화도감 폐지, 성곽의 수리는 공조로 이관

1467 한양도성 수축

1469 남소문 폐쇄

1479 숭례문 중수

1511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개칭

1592 임진왜란 발발(1592~1598)

1612 한양도성 수축

1618 한양도성 수축

1621 한양도성 수축

1623 한양도성 수축

1625 숭례문 여장 수리

1636 병자호란 발발(1636~1637)

1642 흥인지문 불탄 곳을 보수

1650 숭례문 비가 새는 곳 보수

       광희문 수리

       창의문 수리

       돈의문 수리

       흥인지문 수리

1658 숭례문 문짝 수리

1675 화재로 손상된 흥인지문 문짝 수리

1702 흥인지문 문루 수리

1704 한양도성 수축공사 시작

 

 

 

1711 북한산성 완성

       돈의문 홍예 및 문루 개축

       광희문 홍예 개축

1718 탕춘대성 축성 시작

1719 광희문 문루 개축, 현판 설치

1724 숭례문 여장 개축

       흥인지문 옹성 개축

1726 숙정문 문짝 수리

1738 소덕문 홍예 개축

1740 창의문 홍예 및 문짝 수리

1741 창의문 수리 및 문루 중건

1742 흥인지문 남쪽 문짝 수리

1743 흥인지문 북쪽 문짝 수리

1744 혜화문 홍예 및 문루 개축, 새로 편액을 걸음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 홍예 및 문루 개축

1745 흥인지문 아래가 비로 침수

1747 성랑 설치

1748 돈의문 문짝 수리

1751 『어제수성윤음』 반포

1752 흥인지문 남쪽 문짝 수리

1753 치성 설치

1755 흥인지문 북쪽 문짝 수리

1756 숭례문 문짝 수리

       창의문 문짝 수리

1760 청계천의 대대적인 준천

1772 왕의 거둥으로 숭례문 문루 남쪽의 여장 훼철

1793 흥인지문 자물쇠 고장

 

 

 

1836 숭례문 문루 지붕 수리

1837 흥인지문 문루 지붕 수리

1852 흥인지문, 광희문, 혜화문 문루 수리

1864 광희문 문루 수리

1867 도성문에 통행세 부과

1869 흥인지문 개건(1868~1869)

       돈의문 문짝 수리

       숙정문 문짝 수리

1873 흥인지문 옹성 수리

       도성문의 통행세 폐지

1881 흥인지문 문루 수리

1894 청일전쟁(1894~1895)

1897 대한제국 선포

1898 전차선로 개설

1899 흥인지문~돈의문 간 전차 개통

1902 숭례문, 돈의문 단청 공사

1904 러일전쟁(1904~1905)

1906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완전개방

1907 성벽처리위원회 설치

1908 숭례문 좌우 성벽 철거(1907~1908)

 

 

 

1910 대한제국 일본에 강제 병합

1911 흥인지문 북측 성벽 철거

1912 을지로(남대문~광희문)간 전차 부설로 광희문 부근 성벽 철거

       돈의문 밖 숭정동 일대 성벽 붕괴

1913 장충단~한강 간 도로부설로 남소문터 부근 성벽 철거

1914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1918)

       도로 확장으로 소의문 철거

1915 돈의문 경매로 매각, 철거

1918 흥인지문 문루 화재

1921 숭례문 성벽에 광고판 설치

1922 흥인지문 성석 도난

1925 경성운동장 건립으로 흥인지문~광희문 간 성벽 철거

       조선신궁 건립으로 남산 성벽 철거

1926 비로 돈의문 부근 성벽 10여 칸 붕괴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고적으로 등록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

1928 혜화문 문루 철거

       광희문 문루 철거, 재목 매각

1930 창의문 현판 도난

       비로 광희문 부근 성벽 6칸 붕괴

1932 경성측후소 이전으로 돈의문 북측 성벽 훼손

1933 경성운동장 뒤 인현공보 신축공사 도중 붕괴

       호우로 돈의문 부근(명동 52-3) 성벽 10칸 붕괴

1934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각각 보물 제1호와 제2호로 지정

1935 폭우로 혜화문 부근(돈암리 513) 성벽 붕괴

1936 한양도성을 고적으로 지정

1937 숭례문 출입 통제(통행제한)

1938 동소문로 부설로 혜화문 육측 철거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1945)

       남산에 황국신민서사지주 설치

1940 호우로 혜화문 부근 성벽 붕괴

 

 

 

1945 8 · 15 해방

1946 창의문 수리

1947 조선신궁 해체

1950 한국전쟁(1950~1953)

1953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숭례문 복구(1952~1953)

1955 경신중 · 고등학교 신축으로 성벽 철거

1958 흥인지문 보수(1956~1958)

       창의문 보수

1959 국회의사당 건립공사로 남산 성벽 철거

1960 창의문 고적 추가 지정

1961 창의문 보수

1962 목멱산 지역 성곽 보수 1,500m

1963 한양도성을 사적으로 재지정

       숭례문 해체 · 수리(1961~1963)

       흥인지문 보수

       인왕산 지역 성곽 보수 2,400m

       백악지역 성곽 보수 2,600m

1964 아시아반공연맹의 자유센터 건립으로 성벽 철거(1962~1964)

1966 퇴계로 연장공사로 광희문 부근 성벽 철거

1967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건립

1968 1 · 21사태

       서울 근교 9개 산악 18개 지점 민간인 통행 금지

1969 한양도성의 문화재보호구역 재지정 및 추가 지정

1970 남서울개발계획 발표로 강남개발 시작

       창의문 보수 및 단청공사

       숭례문 보수 및 단청보수

1972 창의문 주변 성곽 보수 1,228m 현저동~창의문~와룡동

       남산종합송신탑 설치로 성벽 철거

1973 숭례문 보수 및 단청 공사

       흥인지문 단청 보수

1974 '서울성곽 보수 정화 계획' 수립(1974. 8. 14)

 

 

 

1975 서울 한양도성 복원사업 본격적 시작

       광화문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1974~1975), 주변 성곽 복원

1976 삼청지구 성곽 복원 1,994m(1975~1976)

1977 광희지구 성곽 복원 32m(1976~1977) : 광희문 좌측

1978 성북지구 성곽 복원 1,355m(1976~1978) : 말바위 정상~보성중 · 고등학교 후문

       남산지구 성곽 복원 1,639m(1977~1978)

       장충지구 성곽 복원 1,053m(1977~1978)

1979 청운지구 성곽 복원 1,323.7m(1977~1979) : 1지구(창의문~인왕산) 668m,

                                                                2지구(사직터널 상부에서 서북쪽) 655.7m

1980 삼선지구 성벽 정비 1,037.3m(1979~1980) : 한국신학대학~동숭아파트

       청운지구 성곽 복원(추가) 200m(1979~1980)

1981 흥인지문 옹성 여담 공사

1982 동숭지구 성벽 정비 1.062.7m(1980~1982) : 동숭동~종로6가

1983 금호대로 확장공사로 성곽 7m 철거 및 장충지구 성곽 13.8m 정비

       숭례문 보수

       흥인지문 보수

       창의문 보수: 월단 대문 보수

1985 창신지구 성벽 하부 축대 보강 공사

       숙청문 보수 : 마루, 바닥 강회, 현판 단청

1986 삼청지구 성곽 보수 14.5m : 종로구 부암동 48-11

1987 동숭지구 성곽 보수 5m : 종로구 이화동과 성북구 삼선1동 경계

       창의문 북쪽(창의문~스카이 웨이) 성벽 10m 해체 보수

       창의문 보수 : 지붕 및 협문, 좌측 계단, 우측 계단참 석축

1988 서울올림픽 개막

       숭례문 지붕 및 계단 보수(1987~1988)

       흥인지문 단청 공사

       성북지구 성곽 보수 : 성곽 해체 보수 10m 여장 해체 보수 12.75m

       삼청지구 성곽 보수 : 성곽 하부 보강공사 9m

1989 창의문 단청공사

       삼청지구 성곽 보수 : 성곽 해체 보수 15.3m 여장 해체 보수 18.35m

       혜화지구 성곽 해체 보수 3m

1990 광화문 단청공사

       숭례문 보수

       청운지구 성곽보수(성곽 상부 16.2m, 하부 6.6m) : 창의문 좌측 70m 지점

       숙청문(지붕 변와 및 단청) 및 주변 성곽 보수

1991 청운지구 성곽 보수 8.5m

       삼청지구 성곽 보수 10m

 

 

 

1992 흥인지문 여장 보수

1993 창의문 보수 및 시민 개방

       인왕산 개방

       삼청 · 청운지구 성곽 보수 47.3m

       남산 제3봉수대 복원

1994 혜화문 북서쪽으로 13m 이전 복원 및 주변 성곽 106.5m 복원(1992~1994)

       남산지구 성곽 보수 91.4m

       여장 설치 93m(1993~1994) : 남대문로 5가 285번지 외(SK빌딩 동측)

1995 숭례문 성벽, 기단, 여담 줄눈 보수(1994~1995)

1997 숭례문 문루 지붕 해체 보수

       흥인지문 보수 : 동북측 홍예 석축, 남측 여장 및 옹성(1996~1997)

       인왕산 성곽 보수(1996~1997) : 성곽 해체 및 축조 58m, 여장 설치 30m(국사당~치마바위)

1998 인왕산 성곽 보수 45m(1997~1998)

       인왕산 성곽 보수 40m, 여장 신설 20m

       흥인지문 문루 및 북측 성벽 36.7m 보수(1997~1998)

       낙산 성곽 보수 10.1m : 한성대학교 뒤편

1999 혜화문 주변 성곽 보수 : 성곽 17m, 여장 3.6m

       삼청지구 성곽 보수 : 성벽 33m 및 여장 보수 14타(창의문~숙청문), 숙청문 보수

       흥인지문 보수 및 북측 날개 성벽 보수 27.5m

       주한 러시아대사관 건립 예정부지 내 유적 시굴조사

2000 흥인지문 여담 복원 설치

2002 FIFA 한일월드컵 개막

       인왕산 지역 성곽 여장 복원 22타(2001~2002) : 종로구 체부동 150(1타 = 3.15m)

       서소문지구 신촌 한양도성 유구 시굴조사(2001~2002)

       올리비타워(구 명지빌딩 : 중구 서소문 58-50) 신축부지 내 성벽 해체 이전 3.7m, 복원 · 정비 58.6m

2003 광희문지구(중구 광희동 2가 105) 성곽 보수 99.3m

       흥인지문 북측 성벽 보수(2002~2003) : 해체 후 시축 9.7m, 여장 보수 26.5m

       장충동 한양도성 시굴조사

2004 숙청문 및 성벽 보수

       청계천 유적의 오간수문지 발굴조사(2003~2004)

2005 청계천 복원사업(2003~2005)

       대한상공회의소 구간 내 한양도성 유구 시굴조사(2003~2005)

       대한상공회의소 시축(남대문로 4가 45) 성벽 복원 104m

       인왕산(7타), 카톨릭대 구간(2타) 성곽 및 여장 보수 · 정비 7타

       숭례문 광장 개방

       광화문 구간 성곽 복원 및 주변 정비(2003~2005)

2006 숙청문 개방

2007 흥인지문 서북 옹성 해체 보수(2002~2007)

       인왕산지구(사직공원~창의문) 성벽 복원 · 정비 381.8m(2006~2007) : 1단계

 

 

 

2008 남산 봉수대지 발굴조사

       인왕산지구(사직공원~창의문) 성벽 복원 · 정비 283.5m(2007~2008) : 2단계

       타워호텔 리모델링 부지 시굴조사(2007~2008)

       종로구 송필동 한양도성 발굴조사

       창의문 지붕변와 보수

       숭례문 화재(2008, 2. 10)

       광희문 성문 단청 및 문루 기와고르기

       숙청문 협문 보수

       동대문운동장 철거(2007~2008)

2009 남산 르네상스 계획 수립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 기본계획' 발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 건립 부지 내 발굴조사(2008~2009)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부분 개장 / 이간수문 및 성벽 복원 142m, 흔적표시 123m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발굴조사(아동광장)

2010 숭례문 복원정비사업 내 발굴조사(2008~2010)

       창덕여자중학교 증 · 개축 공사부지 내 발굴조사

       인왕산지구(사직공원~창의문) 성벽 복원 · 정비 300m(2008~2010) : 3단계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발굴조사(백범광장)(2009~2010)

       남산 회현자락 성벽 복원 · 정비(아동광장) 84m : 1단계(2009~2010)

2011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문화재 명칭 변경

       인왕산지구(사직공원~창의문) 성벽 복원 · 정비 206m(2009~2011) : 4단계

       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 보수 140m, 여장 정비 80m(2010~2011)

       인왕산 5단계 한양도성 복원정비 구간 시굴조사

2012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2012. 11. 23)

       남산 회현자락 성벽 복원 · 정비(백범광장) 244.9m : 2단계(2011~2012)

       인왕산지구(사직공원~창의문) 성벽 복원 · 정비 216m(2010~2012) : 5단계

2013 숭례문 복원(2010~2013) 및 개방

       광희문 관광자원화 사업부지 내 발굴조사

       청운대 구간 순심로 발굴조사

2014 한양도성 시장공관 구간 시굴조사

       흥인지문 북측 성벽 추정지역 발굴조사

       광희문 관광자원화 사업(2013~2014) 및 시민개방

2015 흥인지문 옹성 여장 103m 해체 보수(2013~2015)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발굴조사(중앙광장)(2013~2015)

       흥인지문, 광희문 주변 단절 성곽 연계성 회복공사

2016 남산회현자락 성벽 복원 · 정비(중앙광장) 480m(2013~) : 3단계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연결하는 남대문로

 

 

 

도성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청계천

 

 

 

네 산을 연결해 쌓은 한양도성

 

 

 

 

 

 

 

 

 

 

 

 

 

 

 

 

 

 

 

 

 

1396년(태조 5) 두 차례의 공사를 통해 쌓은 태조대 성벽

 

 

 

1422년(세종 4) 재정비하여 쌓은 세종대 성벽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 새로 쌓은 숙종대 성벽

 

 

 

순조대 성벽

 

 

 

 

 

 

 

 

 

도성의 정문 숭례문

 

 

 

옹성이 있는 흥인지문

 

 

 

숙청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돈의문

 

 

 

소의문

 

 

 

 

 

 

오간수문터

 

 

 

이간수문

 

 

 

 

 

 

 

 

 

백악산 지역(창의문~혜화문)

 

 

 

 

 

 

낙산 지역(혜화문~흥인지문)

 

 

 

흥인지문 지역(흥인지문~장충체육관)

 

 

 

 

 

 

목멱산 지역(장충체육관~백범광장)

 

 

 

 

 

 

숭례문 지역(백범광장~돈의문 터)

 

 

 

인왕산 지역(돈의문~창의문)

 

 

 

 

 

 

 

 

 

성곽마을

 

 

 

 

 

 

도성을 따라 돌며 경치를 감상하는 순성

 

 

 

 

 

 

 

 

 

 

 

 

 

 

 

서울 한양도성, 600년 역사를 잇다

Hanyangdoseong : Witness to 600 Years of History in the Capital

 

수도 서울의 600년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의 과거, 현재 그리고 수많은 기억들을 표현한 영상이다. 한양도성의 탄생에서 오늘날 천만 도시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담은 이 영상은 한양도성을 1 : 1,500으로 축소한 대형모형과 연동되어 도성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도성이 서울이다

Doseong is Seoul

 

자본주의 산업화 이전의 도시들은 대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인류가 수천년 전부터 지표상의 특정 공간을 성벽으로 둘러싼 것은 성벽 안쪽이 특별한 기능과 상징성을 가진 영역임을 표시하고, 그 영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양도성을 처음 축조할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도 "성곽은 안팎의 경계를 엄격히 하고 나라를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이라고 했다. 도성都城이란 왕이 거처하는 성으로서 여러 성 중에서 으뜸가는 성, 곧 모든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를 의미한다. 순 우리말 '서울'은 수도라는 뜻이니, 도성이 곧 서울이었다. 서울은 도성 안의 국가 중추 기능을 보존한 채 성벽을 넘어 현대 도시로 팽창했다. 현재의 한양도성은 국제도시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의 가치

The Value of the Hanyangdoseong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산의 능선에 성을 쌓는 축성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한양도성은 이를 계승하여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위엄과 효율을 극대화했다. 도시의 외곽선이 자연의 선형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내부의 가로 체계와 도시 구조도 자연의 형상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대로를 중심으로 인위적이며 기하학적인 도로망을 형성한 동시대 아시아 도시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한양도성은 다양한 지형과 지질에 따라 서로 다른 축성 기법을 사용했으며 무너진 구간을 보수할 때마다 진전된 기술을 도입했으니 한국 축성 기술의 발전 과정을 아로 새긴 문화유산이다. 또 출입, 보수, 관리, 순찰 등과 관련한 노동, 놀이, 예술의 배경이자 무대이기도 했다. 서울이 팽창하기 시작한 뒤 성벽 주변에 생긴 마을들은 오래된 문화유산과 공존하는 현대적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성벽에 기록된 도성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Hanyangdoseong Recorded in the Wall Itself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글자를 새긴 성돌로 요즘 말로 공사 실명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된 각자성석은 삼국시대 고구려 평양성에서 발견된 것이다. 한양도성의 전 구간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현재 297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태조대에는 천자문 자호字號와 소구간을 표시하는 숫자를 세종대에는 군郡 · 현縣의 이름을, 조선 후기에는 공사 시기 · 담당 군영명 · 공사 책임자 · 공사 감독자 등을 새겼다. 각자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군영등록 등 국가기록문헌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한양도성의 구간별 축성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 관리의 철저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록과 유물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준다.

 

 

 

 

 

 

각자성석 탁본刻字城石 拓本

Rubbings of Inscribed Stone Blocks

 

 1  정읍 | 세종대 | 낙산지역

 2  동복시 | 세종대 | 낙산지역

 3  조배시 | 세종대 | 낙산지역

 4  성세각이패장 | 숙종대 | 낙산지역

 5  일패변수양육헌 | 숙종대 | 낙산지역

 6  가경 9년 갑자 10월일 패장오재민 감관이동한 변수용성휘 | 순조대(1804) | 백악지역

 7  훈국책응겸독 시한필영 역장십인 | 숙종대 | 낙산지역

 8  삼패장사과 | 숙종대 | 낙산지역

 9  강자육백척 | 태조대 | 남산지역

 10  신축 3월일 감역관권예 (변)(수)이외준 좌○장사용 / ○○○  ○ / ○○ 50년 6월일 | 숙종대 | 인왕산지역

 11  진주 | 세종대 | 인왕산지역

 12  강희 45년 4월일 개축 | 숙종대(1706) | 낙산지역

 13  토산상말 | 세종대 | 인왕산지역

 14  일패두 | 숙종대 | 낙산지역

  

 

 

且體城修築處石面, 令繕工監,

監築官姓名, 卽爲開刻, 驗其勤慢 ···

 

또 체성을 수축하는 곳의 석면에는 선공감으로 하여금

감축관의 성명을 새기도록 하여

그의 부지런함과 태만 함을 징험할 수 있게 하고 ···

 

『광해군 일기』 1612년(광해군 4) 6월 4일

 

 

 

 

 

 

한양도성 둘러보기

 

 

 

백악지역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창의문에서 백악산白岳山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산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산이라 하여 백악산이라 불렸다. 북악산北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높으며(342.5m),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 · 21사태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한양도성의 서북쪽에 낸 문이다. 문 주변의 지형이 고려 수도 개경開京의 승경지였던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정북방의 숙정문이 늘 닫혀 잇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북문으로도 불렸다. 처음 세운 문루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고,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에 새로 지은 것으로서 현존하는 한양도성의 문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015년 대한민국 보물로 별도 지정되었다(보물 제1881호).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문으로 첫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유교의 오상五常에 따르면 북방은 '지智'에 해당하나 동 · 서 · 남의 세 문과 달리 북문에는 이 글자를 쓰지 않았다. 서울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데 북문에 까지 북방의 기운을 담으면 도성 안에 음기陰氣가 지나치게 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의 주장을 따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문루를 세우지 않았으며, 평시에는 폐쇄했다가 심한 가뭄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열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숙정문肅靖門으로 표기되었다. 1976년 전면 보수하면서 문루를 세우고 현판을 걸었다.

 

 

 

 

 

 

 

 

 

낙산지역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혜화문에서 낙산駱山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산이라 하며 낙타산駱駝山 혹은 타락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울의 좌총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124.4m).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 길을 걸으면 시기별로 달라진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성곽마을도 둘러볼 수 있다.

 

 

 

혜화문

 

혜화문惠化門은 흥인지문과 숙정문 사이에 낸 문으로서 동소문이라고도 하였다. 첫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1483년(성종 14) 창경궁 동문東門의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변경하였다. 1744년(영조 20) 홍예와 문루를 다시 지었다. 1928년 문루가 헐렸고, 1938년에 석축과 홍예까지 완전히 철거되었던 것을 1994년 원 위치 북서쪽에 새로 지었다.

 

 

 

 

 

 

 

 

 

장수마을

 

한양도성과 낙산공원에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낙산 자락에 토막집들을 짓고 모여 살면서 최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재개발 예정구역이었으나, 2008년 기존의 재개발 방식 대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면서 주민 스스로 마을을 가꾸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을기업을 통한 주택 개량과 골목길 정비 등 주민 참여형 마을 재생 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https://youtu.be/_pFputAanyI

 

 

 

흥인지문지역

 

 

 

흥인지문에서 장충체육관까지

 

흥인지문 구간은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을 지나 장충체육관에 이르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전 구간 가운데 가장 지대가 낮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터와 2009년 발굴 · 복원된 이간수문이 자리하고 잇다.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의 흔적이 사라지는데, 1930년대 주택단지 조성으로 성벽이 파괴된 지역이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흥인지문

 

한양도성의 동문으로 유교의 오상五常에서 동방은 인仁에 해당하므로 흥인문興仁門이라 이름붙였다.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2층 문루를 세웠으며, 왕이 도성을 출입할 때에 자주 이용하였다. 흔히 동대문으로 불렸다. 성문에 접근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성 바깥에 옹성을 쌓았으며, 현판에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써서 낮고 평탄한 지형상의 약점을 보완하는 의미를 담았다. 조선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이듬해 옹성이 완성되었으나, 지반이 내려 앉고 성벽에 균열이 생기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1869년(고종 6)에 전면 해체하고 규모를 확장하여 다시 지었다. 이때 원 석재 일부를 재사용하고 여장女墻은 벽돌로 쌓아 다채로운 외관을 갖췄다. 대한민국의 보물이다(보물 제1호).

 

 

 

 

 

 

오간수문

 

오간수문五間水門은 개천의 물이 도성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낸 수문이다. 개천의 폭에 맞춰 다섯 칸의 무지개 모양 문을 만들고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철책으로 막앗다. 수문 하나의 크기는 1.5m 정도였다. 1907년 개천의 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이유로 철책을 제거하였고, 이듬해 수문 위의 성벽도 헐었다. 수문터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461호이다.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을 숭례문과 흥인지문 사이의 동남문으로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인근에 잇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도성 안에는 매장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시체는 모두 성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1711년(숙종 37)과 1719년(숙종 45)에 각각 홍예와 문루를 다시 지었으나 1928년 문루가 헐렸다. 1973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남쪽으로 15m 옮겼으며 이때 문루를 새로 지었다.

 

 

 

 

 

 

 

 

 

이간수문

 

이간수문二間水門은 오간수문 남쪽에 낸 두 칸짜리 수문이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다가 도성 밖에서 개천 본류와 합류하는 물길을 위해 낸 문으로 오간수문과 같은 모양으로 축조되었다. 1925년 경성운동장을 건설할 때 수문의 석재를 스탠드의 기초로 사용하였다. 2007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도중 양호한 상태의 유구가 대량 발굴되어 수문의 하단부는 복원하고 상부는 새로 쌓았다.

 

 

 

 

 

 

 

 

목멱산지역

 

 

 

장충체육관에서 백범광장까지

 

남산구간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백범광장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270.9m)의 또 다른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을 뜻하는 '마뫼'의 이두식 표현에서 유래한다.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릴 수 있게 하였다.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는 태조때 성벽이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남소문 터

 

남소문南小門은 광희문 남쪽 남산 봉수대 동쪽에 있던 문이다.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오인한 예도 있으나 별도의 문이었다.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까지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고자 설치하였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56년(세조 2) 설치를 검토한 후 이듬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96년(예종 1) 통행에 큰 이익이 없고, 또 음양가陰陽家가 꺼리는 방위라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1914년 도로 확장 과정에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숭례문지역

 

 

 

백범광장에서 돈의문까지

 

숭례문 구간은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평지구간으로 성벽이 가장 많이 훼손되어 있다.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올리브 타워까지 이어지는 곳에 성벽의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고,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 네모반듯한 성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숭례문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유교의 오상五常에서 남방이 예禮에 해당하므로 숭례문崇禮門이라 이름 붙였다. 남대문이라고도 하였다. 유교적 도시 조영 원칙을 제시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따르면 제왕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봐야 했으니,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이었다. 군대 출정이나 중국 사신 영접 등의 국가적 의례를 위한 문이었기 때문에 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사이에 무지개 모양의 통로를 내었으며, 석축 위에 2층의 목조 문루를 세웠다. 현판은 세로로 걸었는데, 남방의 화기火氣를 억누르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공했고, 1448년(세종 30)에 고쳐지었으며, 1479년(성종 10)에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2008년에 방화로 문루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바로 복구공사에 착수하여 2013년에 완공하였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호이다.

 

 

 

 

 

 

 

 

 

 

 

 

소의문 터

 

소의문昭義門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낸 문으로 서소문이라고도 하였다. 첫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1738년(영조 14)에 홍예를 고쳐 쌓았고 다시 1744년(영조 20)에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문 이름을 '소의昭義'로 고쳤다. 동남쪽 성문인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는 장례행렬이 통과하는 문이었다. 1914년 문 주변의 성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다.

 

 

 

 

 

 

인왕산지역

 

 

 

돈의문 터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인왕산 구간은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仁王山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인왕산(339.9m)은 산기슭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잇어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초에는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1968년 1 · 21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 탕춘대성蕩春臺城 갈림길에서 성 바깥 길을 걸으면, 시기별 축성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 나온다.

 

 

 

돈의문 터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서문으로 1396년(태조 5)에 처음 건립되었다. 1413년(태종 13)이 문을 폐쇄하고 새로 서전문西箭門을 지어 서문으로 삼았으나 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이때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1711년(숙종 37) 홍예와 문루를 다시 지었으나, 1915년에 철거되어 현재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한눈에 보는 한양도성

The Hanyangdoseong at a Glance

 

한양도성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새 도읍지를 정한 1394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간 지속적으로 보수, 관리되어 온 성이다. 전체 길이는 18.627km, 성벽의 높이는 5~8m이다. 성벽은 백악,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 네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자연의 형상과 일체화 하였으며, 각각 독특한 건축미를 지닌 8개의 성문과 2개의 수문水門을 내었다. 성벽의 일부 구간에는 치성雉城을 쌓았고, 곳곳에 군사용 성랑城廊을 지었다. 19세기 말부터 전차, 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이 도입되고 도시의 영역이 성벽 바깥으로 확장됨에 따라 평지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산지의 성벽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현재 13.370km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세계의 수도 성곽 중 가장 길다.

 

 

 

 

 

 

 

 

 

수평 투영 길이.......................................................................18.627km

지형을 고려한 실제 길이....................................................19.151km

잔존 성벽 길이(육안 확인 가능 구간)............................13.370km

멸실 성벽 길이........................................................................5,257km

보수 및 복원공사 구간 길이(1961~2012년)...............12.854km

 

주요 시설

 

성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멸실), 숙정문, 소의문(멸실),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수문.........이간수문, 오간수문(멸실)

곡성.........백악 곡성, 인왕산 곡성

기타.........치성, 성랑, 봉수대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Inscribed Stone in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訓局 策應兼督役將 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都邊首 吳有善 一牌邊首 梁山昊 二牌邊首 黃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 日 改築(훈국 책응겸독역장 십인 사 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김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도변수 오유선 일패변수 양산호 이패변수 황승선 삼패변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월일개축)

 

해석 :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2년(1706) 4월에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남산 회현자락(중앙광장) 출토 성돌

 

2013~2015년 남산 회현자락의 중앙광장을 발굴조사하면서 발견한 성돌들이다. 성벽은 크게 몸체 부분을 이루는 체성體城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낮은 담장인 여장女墻으로 구분된다.

이 성돌들은 체성의 면석으로, 시기별로 다른 돌들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방식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잇다. 면석의 뒤에는 흙과 잡석으로 뒷채움하여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였다. 남산 회현자락은 조선신궁(1925)과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계획(1959) 등으로 한양도성 성벽이 대규모로 철거된 지역이다.

 

 

 

 

 

 

始築都城。 旣度城基, 分定字號, 始自白岳之東, 起天字, 終于白岳之西, 止弔字。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태조실록 권9  1396년(태조 5) 1월 9일

 

 

 

都城之役畢。 皆以石築之, 險地高十六尺, 次地二十尺, 平地二十三尺。

 

도성의 역사役事를 마쳤다. 성을 돌로 쌓았는데, 험지險地는 높이가 16척이요, 그 다음으로 높은 곳이 20척이요, 평지는 높이가 23척이었다.

 

세종실록 권15  1422년(세종 4) 2월 23일

 

 

 

始築都城。 先行告祭於三角山。 五軍門各遣將校, 浮石於蘆原、舟巖等地。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을 시작하기에 앞서 삼각산三角山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將校를 보내어 노원蘆原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다.

 

숙종실록 권39 1704년(숙종 30) 3월 25일

 

 

 

尹益烈, 以訓鍊都監言啓曰, 本局分授都城彰義門西邊 第六城廊近處體城七間許 今巳畢築。

 

윤익렬이 훈련도감의 말로써 아뢰기를, "본국에서 맡고 있는 도성 창의문 서쪽 제6 성랑 근처 체성 7칸 가량 무너진 곳은 이미 쌓기를 마쳤습니다.

 

승정원일기 1841책, 1801년(순조 1) 9월 12일

 

 

 

訓鍊都監啓曰 都城女墻修築之役, 令三軍門擧行事, 巳有定奪

 

훈련도감에서 아뢰기를, "도성의 여장 수축 공사를 3군문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도록 결정한 바 있습니다."

 

비변사등록 60책, 1710년(숙종 36)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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