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02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大韓帝國愛國歌樂譜(왼쪽)
프란츠 에케르트가 자곡, 민영환閔泳煥(1861 ~ 1905)이 작사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이다. 자주독립국가, 황제에 대한 충성심, 애국심 등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1902년 이후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복제
훈삼등태극문훈장勳三等太極紋勳章(오른쪽)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 ~ 1916)는 대한제국 군악대 초대 군악대장으로 초빙된 독일인 음악가이다. 에케르트는 군악대의 발전과 대한제국 애국가 작곡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 3등급 훈장을 받았다.
대한제국기
내각왕복문內閣往復文(왼쪽)
대한제국 말 내각內閣에서 접수한 통첩通牒과 조회照會 등 각종 문서를 모은 것이다. 군악대의 탑골공원 연주회 개최를 알리는 공문이 있다.
1908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복제
스테레오 뷰 ㅡ 서울의 주요 거리를 지나는 황실관료(오른쪽)
황제의 기사단장이 말을 타고 한양 중심가를 지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기사단장 앞으로 군악대가 보이고 뒤쪽으로 관료들이 뒤따르고 있다.
1904년
광무 10년(1906) 기념 연주회 후 팔각정에서 대한제국 군악대
『동명東明』 14호 | 1922년 | 국립중앙도서관
각부군내첩各府郡來牒
1895년(고종 32)에서 1907년(융희 1)까지 중앙, 지방의 각 기관이나 민간단체에서 내장원內藏院으로 보낸 문서를 모은 것이다. 문서 중에 팔각정 건립에 필요한 강화석을 요청한 공문이 포함되어 있다.
1902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복제
파고다공원 석탑 신설 배치도パゴダ公園 石塔 新設 配置圖
탑골공원에 종교적 석탑을 화단 점경물로 배치하면서 작성한 도면이다. 공원 조성 이후 도시공원으로서 기본적인 휴게 시설을 갖춘 탑골공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 국가기록원 복제
팔각정 건립 전 탑골공원八角亭 建立 前 塔골公園(맨 위)
『조선에서EN CORÉE』 에밀 부르다레Émile Bourdaret | 1904년
팔각정 건립 중인 탑골공원(1903년 가을) 八角亭 建立 中 塔골公園(가운데)
『코레아 1903년 가을』 바츨리프 세로셰프스키 | Wacław Kajetan Sieroszewski | 김진영 외 역
팔각정 건립 후 탑골공원八角亭 建立 後 塔골公園(맨 아래)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공원, 탑골공원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탑골공원에는 일반인이 입장할 수 없었다. 경성 최초의 도시공원이라는 수식어와 맞지 않게 제한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탑골공원은 조선총독부에서 관리 · 운영하였다. 총독부는 탑골공원이 도시공원으로서 기능을 갖추도록 근대적 요소를 도입하여 운영하였다. 적벽돌로 담장을 축조하고, 벤치 · 화단 · 전등 · 온실 등 공원 관련 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야간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경성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 이면에는 도시풍의 오락을 권장하면서 기존 조선의 전통 여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3 · 1운동 이후 일제는 탑골공원이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라고 여기면서 경계하였고, 관리도 소홀히 하였다. 1930년대가 되면서 탑골공원은 도시공원으로서 지위를 점차 회복하였다. 초파일, 음악회 등 주요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일본제국주의와 관련한 강연회, 위령제 등 황국신민 정신을 강요하는 창구로도 활용하였다.
공원에서 누리는 근대문화
탑골공원에서는 경성 사람들이 근대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경성 도시공원 중 최초로 끽다점喫茶店이라고 하는 근대 상업 시설이 '카페 파고다(塔茶園)'라는 이름으로 들어섰다. 새롭게 건립한 음악당에서는 음악 연주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특히 대한제국 군악대에서 이어진 경성악대가 연주했던 납량 음악회는 약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인기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조선에서도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시험방송을 위해 탑골공원에 스피커를 설치하였는데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1930년대에는 공원에 라디오탑을 설치하여 라디오 체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하였으나 내면에는 중일전쟁 발발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을 촉진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용산 음악당龍山 音樂堂(왼쪽)
기존 탑골공원의 바가지형 음악당을 철거하고 1916년 용산주차군사령부龍山駐箚軍司令部에 있던 가제보Gazebo형 음악당을 이설移設하여 새롭게 건립하였는데 이설하기 전 음악당 모습이다.
10층 석탑 옆 음악당十層石塔 側 音樂堂(오른쪽)
용산에 있던 가제보형 음악당이 탑골공원으로 옮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06 ~ 1938년
탑골공원 내 카페 파고다塔골公園 內 塔茶園
『매일신보』 1914년 6월 7일 | 국립중앙도서관
경성방송국 사진엽서京城放送局 寫眞葉書(왼쪽)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다. 경성방송국은 서울 정동 1번지에 있었다. 개국 초기에는 일본어 방송 위주였으나 후에 일본어, 조선어 방송을 분리한 이중 방송을 실시하였다.
일제강점기
JODK 강연집 제1집 JODK講演集 第1集(가운데)
경성방송국에서 편찬한 강연 모음 제1집이다. 당시 실업가. 조선총독부 국장, 교수 등의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1928년
조선유람가朝鮮遊覽歌(오른쪽)
백우용白禹鏞(1883 ~ 1930)이 작곡한 조선유람가 악보이다. 백우용은 대한제국 군악대에서 활동하면서 에케르트에게 서양음악을 배웠다. 대한제국 군악대 해산 후 이왕직양악대를 거쳐 민간인 중심의 경성악대를 조직하였다.
1947년
팔각정
탑골공원의 중심에 위치한 팔각정은 1903년에 만들어졌다.
최초 건립 목적은 군악대를 위한 연주공간이었다.
1919년에는 3 · 1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이후에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었다.
1989년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팔각정 기념물에 투영되고 있는 영상을 통해 여러 기억이 중첩된 탑골동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개벽』 26호『開闢』 26號
3 · 1운동 이후 천도교 지원으로 발행한 민족주의 성향의 종합잡지이다. 방정환은 '잔물'이라는 필명으로 경성에 있는 여러 공원을 둘러본 소감을 실었는데, 탑골공원 방문 기사가 첫 번째로 실려 있다.
1922년 | 국립중앙도서관 복제
1922년 여름밤의 탑골공원
어린이 운동가 소파 방정환方定煥(1899 ~ 1931)은 여름밤의 탑골공원을 산책하면서 보았던 공원의 모습과 정취를 글로 남겼다. 당시 탑골공원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비록 일제의 감시와 방치 속에서도 여전히 경성사람들에게는 만남과 사색의 장이었다. 영상 속에서 탑골공원을 걸으며 그 시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3 · 1운동의 시작점
탑골공원은 3 · 1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민족대표 33인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맞춰 탑골공원 인근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1926년 순종 황제의 인산에 맞춰 6 · 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 · 1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에는 무장한 군대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탑골공원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황폐화되었으며, 1927년에는 폐쇄설이 돌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민족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각인되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義菴 孫秉熙 先生 傳記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독립선언서를 출판한 보성사를 창립히였고, 교육 · 문화 사업에 힘썼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 받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출소 후 이듬해 사망하였다.
1967년
천도교 창도 제80회 천일기념회天道敎 創道 第八十回 天日記念會
1940년 4월 5일
천도교청년당 제8회 전당대회天道敎靑年黨 第八回 全黨大會
1934년 4월 4일
천도교 행사 사진天道敎 行事 寫眞
천도교 행사와 관련된 사진으로, 뒷장에는 3 · 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 15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외에도 장지연, 한용운, 방정환 등 독립운동에 힘썼던 당대 지식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천도교가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 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48인三一運動 主導 民族代表 四十八人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
민족대표 48인의 사진으로, 당시 일본 법정에서는 민족대표 33인 외에 3 · 1운동의 계획과 조직에 가담한 인물을 포함한 48인을 핵심인물로 보고 있다.
3 · 1운동 후 탑골공원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일본 군대
『한국의 사정The Case of Korea』 정한경鄭翰景 | 1921년
폐지된다는 탑골공원(오른쪽 아래)
『시대일보』 1926년 5월 7일
봄을 맞는 이 공원··· 아 3월을 맞는 팔각정··· 팔각정아 기억하겠느냐?
그 때의 그 일을?··· 그 때가 벌서 5년이구려.
우리들이 그대의 품에서 크게 소리치며 벅적거리든 때가.
「봄을 맞는 탑동공원」, 『개벽』 33호, 1923년
3 · 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
독립선언서는 최남선崔南善(1890 ~ 1957)이 기초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세계인권과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복제
경성고등보통학교 제7회 졸업앨범京城高等普通學校 第七回 卒業生記念帖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촬영한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모습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7년
고종장례 사진엽서故李太王殿下御葬儀光景繪葉書
3 · 1운동은 원래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장례 당일을 택하는 것은 고종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 의견과 2일은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3월 1일에 실행하였다.
1919년
경성사람들의 휴식공간
탑골공원은 경성에서 새로운 형태의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1913년부터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하였고 곧이어 야간에도 개방하였다. 1916년 종로 야시장이 개장開場하면서 야시장 중간에 위치한 탑골공원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며 도심 속 야경을 즐기고 휴식을 취하였다. 1920년대 탑골공원은 3 · 1운동의 영향과 경성부로 관리권 이관이 늦어지면서 잠시 퇴락頹落하였으나 여전히 경성에서 유일한 조선인 중심의 도시공원이었다. 1930년대에는 요리집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어린이 놀이터를 조성하면서 아동공원으로 전환을 시도하였지만 여전히 사주쟁이, 룸펜Lumpen(노동자 · 부랑자), 어린이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공원으로 존재하였다.
키노시타 서커스 우대권木下 circus 優待券
경성일보 애독자를 대상으로 발행한 것으로 탑골공원 근처에서 개최한 서커스를 볼 수 있는 우대권이다.
일제강점기
파고다공원 부채パゴダ公園 扇
일제강점기
크리스마스 씰 도안 ㅡ 연 날리는 어린이聖誕節seal 圖案
영국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 ~ 1956)가 그린 크리스마스 씰 도안으로 탑골공원에서 연 날리는 어린이를 그렸다. 멀리 팔각정과 10층석탑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경성의 근대미 그림엽서 ㅡ 경성 파고다공원京城近代美 畵葉書 ㅡ 京城パゴダ公園
스케치 형식의 그림엽서로 경성의 풍경과 민속생활 모습을 함께 그렸다. 엽서 중 탑골공원과 그곳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탑동공원 각소 수선도塔洞公園 各所 修繕圖
탑골공원이 도시공원으로서 조경, 편익 등 대부분의 휴게시설이 정비된 이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도면이다.
1910년 이후 | 국가기록원 복제
(탑골공원) 뒷문을 보고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
어효선魚孝善, 『파고다공원의 귓문 밖』, 『내가 자란 서울』, 대원사, 1990년
탑골공원 어린이 놀이터(왼쪽)
『조선일보』, 1934년 12월 28일
야시장 열던 밤 탑골공원에서(오른쪽)
『매일신보』, 1917년 5월 3일 | 국립중앙도서관
(탑골) 공원 안에 심어 놓은 나무보다
낮잠자는 룸펜이 더 많으니
누가 이곳을 공원처럼 생각한 것인가!
소제부消除夫, 「추기지상대청결秋期紙上大淸潔」
『별건곤別乾坤』, 56호, 1933년
서울의 눈꼴 틀리는 것(왼쪽)
『동아일보』, 1929년 6월 5일
팔각정 주변에서 휴식 중인 사람들(오른쪽)
일제강점기
경성안내 ㅡ 인천 · 개성京城案內 ㅡ 仁川 · 開城
1934년
경성 명소 유람버스 영업안내京城 名所 遊覽バス営業案內
1930년
경성관광안내와 관련된 홍보물로 탑골공원을 경성의 명소 중 한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민족정신 회복의 장
해방 이후 탑골공원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손상되었던 민족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최근까지 이어졌다. 3 · 1운동 발상지로서 가치를 드높이고자 1960년대에 3 · 1독립선언기념탑, 손병희선생 동상 등을 건립하였다. 기존 전통 시설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10층석탑(1962)과 대원각사비(1963), 팔각정(1989)을 문화재로 지정하였고, 90년대에는 보존을 위한 보호시설을 설치하였다. 한편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3 · 1운동 기념식, 휴전 반대 궐기대회 등 정치 · 문화 · 종교와 관련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1991년에는 탑골공원의 보전가치를 인정하여 사적 제354호로 지정하였고, 동시에 그동안 혼용했던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확정하였다.
독립선언문을 인용한 달력獨立宣言文 引用 曆
1962년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에서
금일 오인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 건설에 유(有)할 뿐이요···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신 운명을 개척함이요.
세계 네째의 강대한 군대이며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재개 야망을 분쇄해주는 대한민국 국군은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희망이다.
3 · 1절 홍보포스터三一節 弘報 poster
1960년
3 · 1독립선언기념탑 제막식三一獨立宣言記念塔 除幕式(맨 위)
1963년 | 국가기록원
최초 공원 서쪽에 세워졌던 기념탑은 1967년, 1979년 등 탑골공원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위치가 바뀌었다가 현재는 서대문독립공원에 위치해 있다.
3 · 1절 33인 합동추념식三一節 民族代表 三十三人 合洞追念式(가운데)
1967년 | 서울기록원
손병희 선생 동상 제막孫秉熙 先生 銅像 除幕(아래)
1966년
원각사지10층석탑을 복구하는 미군(위)
1946년 | 국립중앙박물관
탑골공원 휴전회담 반대 궐기대회(아래)
한국은행권 천원(왼쪽)
한국은행권 오백원(오른쪽)
탑골공원 기념우표, 복권
1971년, 1979년
대원각사비 보호각 건립 공사 시행문大圓覺寺碑 保護角 建立 工事 施行文
1998년 | 서울기록원 복제
대원각사비 보호각 설계도大圓覺寺碑 保護角 設計圖
1997년 | 서울기록원
원각사지10층석탑 보호각 설계도圓覺寺址十層石塔 保護角 設計圖
1996년 | 서울기록원
해방된 서울과 탑골공원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에서는 6 · 25전쟁이 발발하였다. 서울의 공원 중 산 · 구릉에 조성되었던 곳은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잇었으므로 전투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도심에 위치했던 탑골공원 역시 수차례의 시가전에서 음악당, 놀이터 등 시설물이 파괴되는 등 피해가 컸다. 일제는 탑골공원을 일본 제국주의를 강요 · 홍보하는 장소로 이용하였지만,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도시공원으로서 가치 있게 존재하였다. 탑골공원은 민족의 지난 아픔과 자랑스러운 기억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10층석탑 등 문화유산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고, 독립정신 등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고,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존재감은 더욱 높아졌다. 시민을 위한 도시공원으로서 역할에도 충실하였다. 공원과 상업시설이 결합하면서 주변으로 다양한 편의시설이 만들어졌고 도심 속 대표 휴게공간이자 문화시설로 자리 잡았다.
탑골공원 중수重修와 아케이드
1966년 서울시는 탑골공원 정비를 위한 중수계획을 발표하였다. 역사적 기념물은 보존하고, 휴식처 · 연못 등을 새롭게 조성하여 공원으로서 기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정문은 강릉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국보 제51호)을 본떠 삼일문으로 새로 지었다. 공원 서쪽에 자리했던 종로도서관을 이전, 3 · 1독립선언기념탑은 동쪽으로 옮겨 서 ~ 북쪽 전체를 아우르는 아케이드를 건립하였다. 아케이드 안쪽 벽에는 3 · 1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민족대표 33인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아케이드는 1983년까지 존속하였다가 공원재정비사업으로 철거, 해당 부지는 공원과 도로로 편입되었다. 아케이드 철거 시 부착되어 있던 3 · 1운동 기념부조는 북쪽 담장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파고다 아케이드 후면 벽체 설계안arcade 後面 壁體 設計案
1967년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탑골공원 아케이드 전경塔골公園 arcade 全景(왼쪽)
1976년
아케이드 외관과 내부arcade 外觀, 內部(오른쪽)
1968년 | 서울기록원
아케이드 철거 전 탑골공원arcade 撤去 前 塔골公園
1975년 | 국토정보지리원
아케이드 철거 후 탑골공원arcade 撤去 後 塔골公園
1988년 | 국토정보지리원
공원쪽 아케이드 벽면에 새겨진 3 · 1운동 조각
1969년
이 조각들은 1984년 아케이드 철거 시 공원 북쪽 담장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탑골공원 중수 시행문塔골公園 重修 施行文
1967년 | 서울기록원 복제
중수 이후 탑골공원重修 後 塔골公園(왼쪽에서부터 첫 번째)
1969년
탑골공원 중수 준공식塔골公園 重修 竣工式
1967년
중수 공사 중인 탑골공원重修 工事 中 塔골公園
1967년 | 서울기록원
탑골공원 중수 계획도塔골公園 重修 計劃圖
1967년 | 서울기록원
탑골공원 정문 및 담장 중수공사 보고서
1967년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탑골공원 중수공사 현장일지塔골公園 重修工事 現場日誌
1967년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1922년 여름밤의 탑골공원
어린이 운동가 소파 방정환方定煥(1899 ~ 1931)은 여름밤의 탑골공원을 산책하면서 보았던 공원의 모습과 정취를 글로 남겼다. 당시 탑골공원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비록 일제의 감시와 방치 속에서도 여전히 경성사람들에게는 만남과 사색의 장이었다. 영상 속에서 탑골공원을 걸으며 그 시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의 탑골공원 에필로그
탑골공원은 1983년 정비를 통해 조성된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주로 노인층이 방문하고 있는데, 경제악화로 어려운 노인들이 증가하면서 저렴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원과 주변 상업시설을 방문하고 있다. 또한 도시 개발로 강남, 홍대 등지에 청년층이 즐겨 찾는 새로운 문화공간이 조성되면서 젊은 방문객이 줄어들었다. 2001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모든 연령층이 즐겨 찾는 도시공원으로 재정비하고자 하였으나 현재는 다시 노인층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탑골공원은 많은 사람과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채 변함없이 자리해 오고 있다. 지금은 비록 예전처럼 활성화된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으로서 그 가치를 다시 한번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탑골공원 수묵담채화塔골公園 水墨淡彩畵
탑골공원을 주제로 한 창석蒼石 이억영李億榮(1923 ~ 2009)의 수묵 담채화이다.
2002년
파고다공원 정비계획 조감도パゴダ公園 整備計劃 鳥瞰圖
1983년
탑골공원 주변 파노라마 사진塔골公園 周邊 panorama寫眞
탑골공원 주변 전경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촬영하였는데 공원 주변의 소소한 풍경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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