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빛의 섬, 눈부신 마을] 01

드무2 2023. 4. 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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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섬, 눈부신 마을] 01

 

 

 

 

 

 

양기훈 작가의 백리백경전 (百里百景展)

빛의 섬, 눈부신 마을

 

 

일시 2023. 3. 20 (월) ~ 31 (금)

장소 서울메트로미술관 1관 (3호선 경복궁역 6번 출구 B1)

 

주최 | 주관 제주특별자치도 중앙협력본부

 

 

 

양기훈 작가의 말

 

제주의 빛은 마을마다 그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관광 (觀光)! 빛이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는 행위. 회화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마을풍경 속에서 마을이 지닌 잠재력과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부족하나마 첫 결실을 이루었습니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마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풍경입니다.

조상대대로 이웃해 살아온 사람들의 공공자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고 색을 칠하는 과정은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그 마을이 이룩해 온 모든 삶의 역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그리려 노력한 것입니다.

 

공통된 테마는 빛입니다.

이곳 섬 제주의 시간성을 표현하는 태양광선의 변화. 여명에서부터 일몰 이후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빛의 변화를 맞이하는 마을들의 특성을 도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관찰해 뒀다가 이번 기회에 표현했습니다. 마을은 일상의 공간입니다. 그 마을 주민들이 평생을 바라보며 살아온 장면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이로움도 없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당연함, 아무 거리낌 없이 생각하는 그 속에 숨쉬는 문화정체성을 주목하려 했습니다. 그림으로 등장한 시각적 요소를 통해 다시금 애향의 빛을 더욱 밝게 비출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숨길 수 없습니다.

 

설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대대손손 살아갈 공간.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긴 끈을 숱한 가름들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 그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를 화폭에 그려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다는 고요하고 산이 일렁이는 곳

수채화 79 × 35㎝ 금능리

 

 

 

관점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바라 봄'이기도 하다. 풍경화가 보유한 감성적인 요인이 있다면 관점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 평소에 필자가 섬 제주의 독특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명소로 생각하는 위치와 시간. 바닷가엔 방금 전 일몰이 완료되었지만 한라산 영실기암 위에서부터 백록담까지는 아직도 햇살을 받고 있다. 금능리 해안가 원담에서 한림공원 숲 지역을 아우르는 수평구도 위에 펼쳐지는 오름들과 한라산은 출렁이는 파도다. 저녁이라 해풍과 육풍이 교차하는 시간에 잠시 바람은 고요하고. 멀리 펼쳐지는 곡선의 향연은 흡사 일렁이는 파도와 닮았다. 그런 느낌을 선물하는 곳.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는 이유가 세상에 주관적 관찰로 기여하는 경우가 된다면 이런 그림을 제시하는 일이다. 자연적인 원담 기능을 해주는 금능모래해변의 검은 투뮬러스가 채색하지 않은 조용한 바다를 상징하는 흰색과 명도 대비돼서 근경의 강렬함을 표현하였다. 저 검은 원담에서 백록담까지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과정. 인공구조물과 건물은 생략했다.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는 느끼게 하는 한라산과 오름들의 출렁거림은 악보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엉뚱한 소망이 있다면 저 검은 암반지대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앉아서 교향곡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저 배경의 흐름이 확연하게 심포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금능리가 보유한 이 엄청난 경관자원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크나 큰 보람이요 소명의식의 발로다.

 

<출처 : 한라일보>

 

 

 

 

 

 

펄랑가름 풍경

수채화 79 × 35㎝ 금능리

 

 

 

빛은 시간성의 산물이라는 회화적 관점이 있다. 지금도 꾸준하게 추구되는 인상주의적 과제이기도 하거니와 같은 사물도 '언제' '어디서'라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것. 보통 풍경화에서 지붕 위에는 하늘이 그려지게 되지만 금능리에서 조감도처럼 조금 위에서 내려 보면 바다가 하늘을 대신하여 배경에 자리잡게 된다. 그것도 오후 다섯 시 정도에 태양을 등지고 바라보면 금능모래해변이 보유한 옥색에 가까운 파란 색이 신비감을 극대화시키며 펼쳐진다. 광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해와 바다 사이에서 그려낸 그림. '펄랑'이라고 하는 바다로 뻗어나간 해안가 마을 특유의 조간대 공간을 주제로 그린 것은 똑 같은 염분을 가진 바닷물임에도 바닥에 방대한 모래가 깔려 있는 곳과 그러하지 않은 곳의 차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다. 두 개의 바닷물 사이에 들어선 집들은 대부분 외벽을 흰색으로 칠해 있어서 화면 전체에 밝은 청량감을 불어넣어준다. 겨울이라 누런 풀잎들이 태양광선을 받아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소박하면서도 파격적인 구도 속에서 바닷가 마을의 조용한 일상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일. 전체적인 색채대비를 위하여 집들의 형태는 단순화시켰다. 원근법의 방식이 조금은 동양화적인 요소가 동원된 측면이 있어서 어떠한 정한과 여유로움이 드러나게 된다. 바닷가에 살면서도 늘 바다가 그리운 그런 아이러니를 그리려 하였다. 지붕과 지붕들이 끊임없이 무언의 대화하는 이웃사촌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정겨움.

 

<출처 : 한라일보>

 

 

 

큰단물의 의미

수채화 79 × 35㎝ 함덕리

 

 

 

아이러니란 이런 것, 눈부시게 밝은 모래 해변에 현무암은 상대적으로 어두워야 함에도 오히려 태양광선의 내리쬐는 강도를 몇 배 더 증폭시켜준다. 그 실증적 풍광이 여기다. 용암이 흘렀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투뮬러스 지대에 용천수가 솟아나고 있음을 발견한 옛 함덕리 조상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수원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 귀한 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담을 견고하게 쌓고. 해변 풍광과 함께 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어떤 치장도 없고 그냥 현실적인 선택에 의한 실용적 단순미. 자세히 보면 파도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화면 왼쪽 파도가 밀려오는 곳에는 용암의 흐른 자국이 확연한 암반이고 오른쪽은 깨져서 밀려난 돌들이 널려 있는 상황이다. 모를 일이다, 수 백 년 전에 저 용천수 주변에 쌓여 있던 돌들이 파도에 무너져 널려있는 것은 아닐까? 바닷물과 만나 옥색 바다를 만드는 모래. 거기에 정오의 햇살을 받는 현무암. 그 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제주섬 해변의 숱한 바닷가 담수원들이 있으나 이런 배경색과 대비되어 시각적 풍요를 형성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시대에 풍경이 가지는 차별성은 또 하나의 소중한 미의식으로 다가온다. 해수욕장이라는 공간 속에 마치 하나의 조형물처럼 조상들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저 둥근 물공동체 울타리를 그리려 하였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원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다양한 포토존의 역할을 지닐 수 있도록 출중한 사진작가들의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 한라일보>

 

 

 

어느 집터, 그 세월의 단면도

수채화 79 × 35㎝ 함덕리

 

 

 

주제를 부각하기 위하여 가끔 이런 스타일의 그림이 부득불 필요할 때가 있다. 무대에서 모두 떠들면 그건 공연이라고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집담 뒤에 건물들은 판화적 개념으로 단색화 처리하여 주인공의 메시지 전달 위치를 설명하는 역할로 단순화시켰다. 함덕리 주민이라면 뒤에 보이는 집들의 외곽선만 보고도 대충 위치를 짐작할 것이다. 이 큰 마을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의미 있는 풍경을 찾다가 길가에 잇닿은 집터 공간. 철거가 이뤄진 상태다. 하지만, 집담이 있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지난 세월의 타임캡슐이 돼주고 있는 것. 시멘트가 서민들의 생활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 1970년대 초 이전, 흙으로 돌틈을 막으며 쌓았던 초가 벽의 흔적이 벽이었던 곳 속에 보이고 있다. 최소 두 세대 전에 있었던 초가집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필경 지붕을 개량해서 살았을 것이다. 저 집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놀라운 것은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건물 벽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힘을 모아야 운반과 이동이 가능했을 그 무게.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집터이자 마당을 화면 가득 여운으로 남겼다. 농도에 의한 원근감으로 공간미를 충족시키고.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다. 그렇다면 이 풍경속에 있었던 건물은 가족사가 되는 것이다. 이 공간을 그냥 놔두지 않을 터. 다시 어떤 새로운 역사가 지어지나? 끊임없이 발전하는 함덕리의 오늘을 과거 속에서 그리려 하였다.

 

<출처 : 한라일보>

 

 

 

일출봉 우뭇개의 황금절벽

수채화 79 × 35㎝ 성산리

 

 

 

일출봉 절벽이 얼마나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지 느낄 수 있는 곳. 또한 찬란한 햇살을 눈이 시리도록 담아낼 수 있는 바닷가는 여기다. 연필 하나로 바닷물에 젖은 바위와 거기에서 반사되는 빛까지 표현해야 이런 일출의 시간성을 화면에 가져올 수 있다. 언제였을까? 저 무너져 내린 풍화의 절벽. 혹시, 4·3 당시에 이곳에서 자행됐던 학살 장면을 보고 가슴이 무너지듯 저렇게 아파했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기억을 덮으려 하지만 다시 떠오르는 진실의 빛이 모두 드러나게 한다.

새해가 이렇게 밝았다. 모든 사물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닐지언정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이런 아침이 있어서다. 채색의 필요성은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일이지만 물에 젖은 돌과 저 절벽의 윤곽들을 더욱 섬뜩하게 남길 방법은 연필선이 중첩해 공간의 본질을 끄집어낸 이 상황 이상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하겠다. 가령, 컬러사진의 강점도 있겠지만 흑백사진의 장점도 있는 것과 같은 비교를 그림이라는 영역에 대입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거니와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길이라면 끌려갈 만 하다. 만약에 채색을 하게 되면 그림의 제목이 바뀔 것이다, '황금 절벽'이라고. 떠오른 태양이 일출봉 절벽에 금가루를 뿌려 도금을 한 분위기다. 바다에서 반사된 빛이 절벽의 명도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으니 뚜렷한 명암이 그 존재감을 고조시키고,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는 이 시간에 자연의 일부가 된 저기 앞에 큰 돌덩이 하나가 필자다.

 

<출처 : 한라일보>

 

 

 

자연을 표현한 하얀집

수채화 79 × 35㎝ 성산리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쭉 뻗은 대나무도 미세하게 휘어져 있는 것처럼. 직선이 만들어내는 효율성은 경제적 가치 때문에, 표준화 된 품목들의 결합이 용이해 각이 진 모습으로 보편화 됐다. 그 반대의 상황, 곡선이나 불규칙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비용과 노동량의 대폭적인 증가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이런 집을 바닷가에 지었다는 것은 특수한 목적에 의해 추구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공간에서의 곡선을 건축물의 아름다움으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성산리에서 미의식이 가장 뛰어난 건물. 자연을 닮으려 했고, 표현하려 노력한 그 귀중한 가치를 그렸다. 우도 도항선 대합실 겸 유람선, 잠수함 매표소 건물. 유명 관광지다운 품격이 느껴진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망라하여 비례에 맞게 구현했으니 건물이기에 앞서서 하나의 예술품을 접하는 기분이다. 구름이 많이 낀 날, 햇살이 없으니 건물에는 명암 구분이 희박하다. 오직 하얀 색으로 칠해진 건물이기에 수채화로 그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멀리 보이는 일출봉에서부터 근경 바닥, 하늘에 짙은 회색 구름까지 돔형에 가까운 집을 표현하기 위해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다. 관광지라면 최소 이정도의 정성을 보여주는 건물들이 많아야 하겠다는 주장을 그리려 했다. 작위적으로 빼버린 것들과 일부러 집어넣은 요소들이 그림의 맛을 강화하고 있다.

 

<출처 : 한라일보>

 

 

 

인성리에서 바라보는 단산

수채화 79 × 35㎝ 인성리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 단산만큼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오름은 필자가 아는 한 없다. 단산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바라보면 하늘과 이어지는 선들이 각기 다르다. 어떤 오름인들 그러하겠지만 대부분 그 오름이 가지는 느낌은 보유하고서 변화를 준다. 하지만 단산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경이로움이 있다. 방위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거리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제공하는 신비함이 있다. 절벽과 산등성이의 조화로움이 가장 품격 있게 느껴지는 위치가 인성리 주거지역이다. 그림과 같은 산의 실경을 병풍처럼 치고서 살아가겠다는 조상들의 욕구가 역력하다. 오후 4시 정도의 태양광선이 서쪽에서 비출 때 명암오케스트라는 장엄한 심포니를 연주한다. 오페라 무대에서 자연의 메시지를 노래하는 무대의 배우들과 그 앞에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나무들. 단산과 근경의 나무 사이에 살짝 보이는 농경지의 모습이 오히려 밝게 다가온다. 산의 존재감을 뚜렷한 명암 속에서 얻어내고 어두운 부분에서 산의 깊은 에너지를 표현하려 하였다. 상록수에서부터 활엽수까지 각종 나무 수종들이 햇살을 받아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회화적 완결성을 신명나게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은 너무도 소중한 시각자원이다. 수채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고마운 위치다. 태양광선과 자연이 만나서 어떠한 아름다움을 생성 시킬 수 있는 것인지 회화적 감성을 가지고 도전하게 만들어준 참으로 고마운 시간.

 

<출처 : 한라일보>

 

 

 

 

 

 

이웃하여 사는 모습

수채화 79 × 35㎝ 인성리

 

 

 

마을 안길을 걸어가다가 비교적 너른 공터에 주차공간이 마련되어져 있고 차분하게 들어선 집들과 담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감흥이 일어났다. 해가 등뒤에 있어서 명암법을 가지고는 존재감을 평면 속에 구현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려움이 발생시키는 극복 방안에서 야릇한 창작욕구가 생성되었다. 눈높이 기준 소실점은 하늘과 땅이 화면의 상하 절반 지점에 있도록 하고 그 사이에 집이라는 인간의 영역은 마치 도면의 입면도처럼 좌우로 흘러가게 하는 것. 형태에 주안점을 두었던 테두리 선 긋기 방식을 판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사물과 사물에 투입하여 담채가 지닌 담백함을 얻어내는 일. 평면화에 가까운 회화적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공간감은 하늘과 땅의 명도조절로 형성시키고 화면 구성은 물상들의 면적 대비에 의하여 박자요 화음을 그려내는 시도다. 돌담 한 줄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산다는 것.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다양한 문화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모습이 보여주는 증거와 같은 본질이 있다면 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유서 깊은 마을이라 저 이웃들의 조상님들 또한 저렇게 이웃하여 살았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삶이 대를 이어서 전해지는 감동의 세월들. 눈부시다는 것은 명암이 도드라지지 아니하고서도 시각적 대비효과에 의하여 발생시킬 수 있다는 동양적 논리를 수채화 속에서 느끼려 하였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한 듯하지만 정감을 느끼게 하는 다소 거친 선들 속에서 저 이웃들의 순박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출처 : 한라일보>

 

 

 

 

 

 

토끼섬 문주란 자생지

수채화 79 × 35㎝ 하도리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9호. 1962년에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여기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국가적인 관점에서 일찍 자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어린시절 화북동 바닷가에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저 동쪽 별방 앞바다에 토끼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토끼만 살아서 그 섬의 주인이 토끼다. 그 토끼들은 문주란만 먹고 산다.' 아이들을 놀려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지만 그 동화같은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토끼섬을 직접 풍경화로 그렸다. 토끼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겨울이지만 문주란의 초록 잎들이 보이니 분명 토끼가 있어야 하거늘 달나라로 이민이라도 갔나?

수평구도의 전형이다. 하늘과 바다 사이를 가르는 산과 같은 섬. 그 아래 펼쳐지는 세상. 소중한 가치를 품은 작은 섬이 전하는 메시지는 문주란이다. 그리고 저 표류식물 문주란은 바다의 위대함을 전하고 있다. 아프리카가 원산지라고 한다면 인도양에서부터 어떤 뿌리가 파도와 해류를 타고 태평양까지 와서 다시 북상을 거듭한 끝에 제주의 부속도서(?)인 토끼섬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것. 섬을 그리는 방법은 바다를 그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바다의 색이 그 섬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모래가 쌓여있는 방향에서 그린 이유는 겨울하늘 빛이 섬 아래 바다에 비치면 그 빛이 고려청자의 색깔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을 감싸는 바다색을 국보급 컬러로 그려야 직성이 풀릴 듯 하여 겨울바다와 함께 그렸다. 바닷속 모래가 빚어낸 색이다.

 

<출처 : 한라일보>

 

 

 

 

 

 

별방진성 입구에서

수채화 79 × 35㎝ 하도리

 

 

 

제주의 돌문화가 망라된 듯한 곳이다. 성담에서 밭담과 집담, 축담이 한 화면에 들어와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상황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구도가 파격적이다. 진성의 성담이 근경에서 햇살을 받지 못하고 마치 판화의 음각처럼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다. 전봇대 두 개가 세로 선을 형성하고 그 뒤로 마을이 보인다. 지붕들의 뒤편에 아주 작은 성담의 모습까지 돌의 크기가 원근을 추동하는 시각적 역할을 하고 있다. 멀고 가깝다는 의미가 공간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심정적으로 주는 메시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정오가 조금 지난 상황에서 역광에 가까운 풍경을 택한 것은 돌담 위에 그려지는 강렬한 선을 그리기 위해서다. 그리는 내내 제주의 돌담문화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생각했다. 밭담과 집담들은 오래 전에 쌓은 것들이라 바닷가에서 날아오는 해수 염분에 검어졌지만, 10여 년 전에 복원공사를 해서 축조한 매끈한 성담은 아직도 회색이 밝은 편이다. 어두운 부분이 많아서 대비효과에 의하여 햇살의 강도는 더욱 눈부시게 느껴지고, 돌과 집들의 절묘한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저 태양광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현재의 관점에서 그리는 행위는 짜릿한 흥분을 제공한다. 사람이 살기 위하여 필요한 돌. 살아남기 위해 쌓아야 했던 제주 현무암의 역사를 한 폭의 풍경화에 담을 수 있는 곳은 여기다. 저 성담을 쌓으며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여기 조상님들의 통곡소리는 풍경화라서 그리지 못했다.

 

<출처 : 한라일보>

 

 

 

 

 

 

윤슬 눈부신 곽지해변

수채화 79 × 35㎝ 곽지리

 

 

 

곽지패총의 조개껍질들은 모두 이 바닷가에서 나왔다. 2000년 전부터, 누군가 이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서 생명을 유지하고 그 껍질을 버렸으니 썩지 않는 그 껍질이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가 됐다. 위대한 기억의 바닷가. 역사는 뭍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시작됐다고 했던가? 땅의 것으로만 살수 없고, 바다의 것으로만 살수 없으니 땅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살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경험의 축적. 저 모래알 같은 경험들이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에 이리 쌓이고 저리 쌓이며 살아간다. 내일도 오늘처럼. 화산섬의 모래해변이기에 검은 현무암과 모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검은색은 따스한 느낌을 줘야 하기에 물감이 아니라 먹으로 그렸다. 먹색은 물과 만나서 명도를 높이면 따스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다와 모래 그리고 돌들이 화면 속에서 원근감을 충족시키며 만날 수 있는 구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필자가 아는 한 곽지해수욕장의 이곳 뿐이다. 가장 큰 매력은 검은 현무암과 이런 화음을 형성하며 독특한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데에 있다. 태양광선이 부서지는 지점을 모래와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특정한 것은 시간성의 무의식적 투영이라고 강조하고 싶어서다. 가까운 과오름이 화산분화하며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와 만나 이렇게 식었으며 숱한 세월의 풍화를 거치며 결국 오늘의 이런 모습을 갖게 됐다. 저기 검은 용암의 흐름과 떨어져 나간 바위 하나하나에도 시간성이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자연의 이치가 숨어있다.

 

<출처 : 한라일보>

 

 

 

 

 

 

어떤 나무와 집들의 만남

수채화 79 × 35㎝ 곽지리

 

 

 

이사무소가 있는 주변에 깔끔하게 아스팔트로 주차장까지 마련된 마을공동체의 중심공간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길. 오래된 팽나무가 서 있다. 자동차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임에도 그대로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200살은 더 사셨을 것 같은 고목. 화면의 가운데 있는 슬레이트집이 초가이던 시절부터 모두 봤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으로 지붕이 개량되고, 돌담이 시멘트벽돌로 바뀌는 과정들까지. 함께 살았던 모두를 기억하고 있을 나무. 그러기 때문에 자동차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가치관. 겨울임에도 유독 저 나무 밑에 풀들은 초록으로 싱그럽다.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해 신명나게 그렸다. 화면의 구도가 파격적이다. 장대저울 구조다. 왼쪽으로 왕창 쏠린 나무와 중심과 오른쪽에 배치된 집. 그 무게에 황금비 지점을 중심으로 평형을 유지하도록 색과 명도를 살렸다. 왼쪽 돌담 뒤 비닐하우스와 멀리 보이는 빌라들이며 최근 10년 어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집들이 아주 작게 보인다. 변화가 밀려오고 있음을 암시하듯이. 변화는 온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하였으니 분명 온다. 그러기에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의 가치 또한 그 무게만큼 가치를 지닌다.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가치가 그러한 소명의식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렸다. 변화와 전통이 공존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오늘이라는 너무도 쉽고 평이한 목표가 이렇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출처 : 한라일보>

 

 

 

 

 

 

아부오름의 아침 인상

수채화 79 × 35㎝ 송당리

 

 

 

분화구를 그린다는 것. 그것도 아침에 떠오른 해를 맞이하는 분화구. 하나의 거대한 해시계를 그리는 것이 된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그렸다. 상투적으로 바라보던 시선과는 달리 풍경화를 그려야 하는 목적에 의해 움푹 파인 오름을 그리는 것은 화면 구성에 거대한 고민을 가져왔다. 가로 세로 비례 속에 이 거대한 공간을 넣어야하고 빛과 어둠의 배분을 황금비 속에서 찾아야 하기에 중첩되는 딜레마가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분화구이기 때문에 명암이 솟은 오름과 반대여서 서로 치고 받으며 존재감을 증폭시켜 준다는 것이다. 하늘의 어두운 부분은 오름이 햇살을 받는 위치이고 태양이 있는 위치의 하늘이 밝아서 오름의 그늘진 부분을 더욱 어둡게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근경의 누런 풀들은 12월의 느낌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니 고맙고. 듬성듬성 작은 나무들이 분화구로 내려가는 경사를 표현하기 좋다. 문제는 저 맨 밑바닥 아직도 초록이 있는 운동장 같은 공간이다. 어두운 그림자 지역에 있으면서도 분화구라는 현실을 표현해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자잘한 나무들을 생략해서 그렸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니까. 생략할 권리가 있다. 전체적인 신비감이 완성돼가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대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했다. 지구라는 별에는 화산이 폭발하며 그 폭발이 있던 자리에는 우주를 향해 이런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화산섬 제주의 본질 중의 하나를 송당리에서 그렸다. 맨 앞의 소나무가 너무 도드라지다.

 

<출처 : 한라일보>

 

 

 

 

 

 

눈부신 마을 안길

수채화 79 × 35㎝ 송당리

 

 

 

풍경이 화면이라는 테두리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결과물이다. 어떤 공간의 일부분을 가져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12월의 송당리. 겨울임에도 초록을 잃지 않은 돌담 원근이 뚜렷한 길을 걷다가 오래 전에 걸었을 때 느꼈던 그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길을 잘못 찾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밭담과 함께 있던 커다란 삼나무 방풍림들이 잘려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농가의 모습, 큰 길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나무가 양쪽에 있어서 아치처럼 가지가 이어져 있고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어러한 눈부신 풍광을 맞이했다. 화면을 대각으로 구분하여 절반이 그늘이니 상대적으로 밝은 부분은 더욱 명도가 높아지게 된다. 햇살의 의미를 그리는 일은 풍경화가 지닌 본연의 의무이기도 하거니와 송당리가 보유한 식생자원과 삶의 공간을 함께 그리는 희열을 겨울 햇살 속에서 누리고자 했다. 돌담이 생성시키는 원근감보다 빛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원근감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리는 행위는 광량의 차이를 감지해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 미세한 차이들을 통해 현실감을 증폭하는 작업인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발생시키는 대비효과는 크게 2박자의 울림으로 단순한 리듬감을 선물한다. 저 속에 숨어있는 작은 변화들이 화면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면서 그렸다. 빛을 그리기 위해 나뭇잎 하나도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출처 : 한라일보>

 

 

 

 

 

 

예촌 팽나무의 겨울

아크릴화 79 × 35㎝ 신례1리

 

 

 

마을 중심 거리에 있어서 오랜 풍파를 이겨온 팽나무. 마을 어르신에게 예를 표하는 듯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 삼나무 그늘에 있는 나무의 평면화된 형상과 오후의 햇살을 받은 나무의 존재감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깊이를 발생시킨다. 공간감이 생성됐음을 의미하는 징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렸기에 하늘의 면적이 크게 등장한다. 밭담과 집담의 정겨운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밭담은 돌이 생긴 모양을 그대로 살리며 투박하게 쌓았지만 집담은 구멍이 없도록 정으로 때리며 각을 잡아서 반듯하게 쌓아올렸다. 돌담을 통해 밭과 집의 차이가 드러난다. 밭담은 그늘 속에 있고 집담은 햇살을 받는 상황이 이러한 계절에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공존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상징하는 마을의 역사성을 그리려 했다. 겨울 추위가 주는 시련에 의해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일지언정 저 굵기에서 풍기는 기백은 이 곳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들의 자신감이요 포부와 같은 느낌을 투영하려 했다. 섬 제주의 빛은 어러한 삶의 동반 존재들에 의해 더욱 눈부시다는 것을 입증해가는 과정이다. 화면의 깊이는 삶의 깊이와 동치 시키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했다. 세필로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그리며 얻는 회화적 희열을 만끽한다. 세상에 필요에 의하지 않은 공간은 없다는 가르침을 되새김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단순한 원근 구도를 나무를 우러르는 시각적 위치에서 파격을 발생시켰다. 이 마을의 일상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듯이.

 

<출처 : 한라일보>

 

 

 

 

 

 

신례1리의 겨울 한라산 풍경

아크릴화 79 × 35㎝ 신례1리

 

 

 

한라산 능선 오른쪽 위에 보이는 사라오름에서부터 신례1리는 발원해 내려온다. 그 곳까지 이 마을 조상들의 삶의 영역이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한라산 아래 하얀 부분은 구름이 아니다. 공기의 온도차이가 발생시키는 냉기다. 그 냉기가 감도는 한라산 공기의 빛깔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오후의 햇살이 여기 삼나무 우거진 마을 안에서는 포근함으로 와닿는다. 실제 기온은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쌀쌀하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의 느낌은 온난하게 그리고 싶은 반항적 욕구가 생겨난다. 감귤 밭이 많은 지역이라 방풍림도 풍성하다. 줄지어 선 삼나무와 집들이 어떤 면적 대비를 보여주며 한라산이라고 하는 신령스러움을 위에 얹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고민하다가 이런 선택을 했다. 가장 큰 역경은 사라오름까지 이르는 과정 그 거리감을 물감과 붓이라고 하는 도구만 가지고 표현하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아크릴물감이라고 하는 빨리 마르는 성질의 지원군이 있어서 몇 회에 걸친 중첩 칠하기에 의해 미세한 색의 차이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추위가 매서워도 태양 빛 아래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느낌을 그리려 했다. 삶의 공간과 대자연의 기후 상황을 화면에 가져오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독특한 구도 때문이다. 빛을 반사하는 정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삼나무와 집, 그리고 한라산 능선이라고 하는 거리감이 주는 현실성을 그림이라고 하는 도구로 체포하기 위해서다.

 

<출처 : 한라일보>

 

 

 

 

 

 

산방산 남쪽 절벽

수채화 79 × 35㎝ 사계리

 

 

 

색을 넣으면 시각적으로 사실에 가까우나 형태가 지닌 본질에 두꺼운 껍질을 씌우는 일이 되곤 한다. 섬 제주를 대표하여 태평양을 바라보는 기상이 느껴지는 산방산 남쪽. 바닷가에서 산방산을 보면 시시각각 태양광선의 변화에 따라 만물상이 연출된다. 오직 빛과 형태에 의해서 본질이 드러나는 경우를 그리려니 연필소묘의 강점을 동원해야 했다. 절벽의 미세한 흐름들이 연필선의 동선에 의하여 광선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칠했을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절벽의 동세가 사라지고 마는 것. 색을 칠하지 않아도 연필소묘의 맛에 의하여 햇살은 더욱 눈부실 수 있다. 초겨울 오후 4시 상황. 햇살의 두께가 산방산의 서쪽에서부터 밀려든다. 그 영향으로 산은 거대한 명암의 농도 차이에 휩싸이게 되고 숨은그림찾기 절벽은 하나하나의 형상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람의 얼굴에서 동물의 모습과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시각 경험들이 절벽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닷가 저 멀리 태평양을 향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웅장하다. 이토록 아름답고 품격 있는 절벽을 보유하고 있는 사계리가 부럽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절벽을 상상력의 보고로 여긴다. 장엄한 매력과 함께 안온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저 모습에서 웅대한 꿈이 대붕의 날개처럼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바다와 지척인 곳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을 바라본다. 그것도 오묘한 절벽의 힘을 느끼면서. 산의 전체 모습 못지않게 어떤 부분을 그리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출처 : 한라일보>

 

 

 

단산이 보이는 풍경

수채화 79 × 35㎝ 사계리

 

 

 

11월의 눈부신 햇살을 반사해내는 사계리의 소박한 모습. 모두가 있다. 길과 집과 밭, 그리고 산, 돌담. 덩치는 큰데 나뭇잎이 다 떨어진 활엽수와 키는 작으나 끊임없이 짙은 초록을 보유하고 있는 사철나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따라 자신의 풍경 속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고 있다. 이미 겨울이 되었음에도 초록이 왕성한 것은 남국의 정취라고 말없이 설명하는 듯하다. 밭담의 왼쪽 길에 쏟아지는 광선의 양을 사철나무가 가로막으면서 극적인 공간감이 그림자에 의해 발생되었다. 그러면서 두 세대 이상은 되었음직한 집들이 낡은 지붕과 함께 중경에서 향토성을 보여주고 단산과 집 사이에 듬성듬성 솟아난 나무들이 멀리 단산과 이격 작용과 견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모든 것이 빛의 산물인 듯, 그렇게 풍경이 보유한 거리에 따라 광선의 미세한 차이는 악보에 그려진 그대로 연주하듯 마을 분위기를 노래한다. 단산이 지닌 형태 못지않게 그 내부의 색들이 이 계절을 뿜어내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 나지막하면서도 병풍처럼 펼쳐진 저런 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포근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인가! 저 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모든 물상이 해시계가 돼서 보여주고 있다. 바람 한 점 없을 것 같은 이 고요한 평화, 눈부신 시간. 마을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삶의 영역을 그리는 일이다. 돌담 구멍 하나도 나뭇가지 하나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일부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절절함으로 그리는 것이다. 저 소박한 삶이 있어 그렇다.

 

<출처 : 한라일보>

 

 

 

방사탑과 비양도

수채화 79 × 35㎝ 옹포리

 

 

 

바닷가에 방사탑이 있다. 백중 때에는 밀물에 기단부가 잠길 것 같다. 어떤 불길한 것을 막으려는 소박한 민간신앙.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한 어떤 요소로부터 막아주는 심리적 성벽이기도 하다. 저 방사탑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구체적인 형태. 비양도와 함께 그렸다. 둘이 만나면 어떤 메시지가 발생되게 될 것인가 궁금하여. 연필선이 그대로 일부분 드러나는 느낌을 통하여 방사탑의 형태적 본질과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근경 방사탑과 원경 비양도. 하나는 작으나 가깝고, 하나는 크지만 멀다. 그 사이에 광선이 있다. 하얀 여백광선. 빛을 그리는 방식은 수없이 많으나 채색의 방식 차이에 의하여 그 강렬함은 결과를 달리한다. 간결 담백함을 지녀야 두 개의 존재가 만나서 발생시키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옹포리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비양도는 그 거리보다 중요한 광선 속에 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수평선이 있고 그 수평선 위에 섬이 있다. 하늘과 바다가 여백이니 수평선은 섬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확인 할 수 없는 상항을 만들어 방사탑의 배경으로 삼았다. 묘한 여운이 일어난다. 수없이 많은 교감을 나눴을 것 같은 둘. 바다를 그리지 아니하고서 바다를 느끼게 하고 하늘을 그리지 아니하고서도 하늘을 느끼게 하는 여백의 미에 방사탑과 비양도라는 섬을 투입하였다. 방사탑 위에 조각된 새는 날개를 힘차게 펼쳐서 어떤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듯 하고. 비양도까지 날아갈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출처 : 한라일보>

 

 

 

 

 

 

방앗돌이 있는 휴게공간

수채화 79 × 35㎝ 옹포리

 

 

 

일주도로에서 포구로 걸어내려 가는 길에 너른 공간을 만났다. 골목들은 옛 모습 그대로 좁은 반면 이런 넓은 공간을 둔 것이 경이롭다. 그 중심에 등나무를 올린 그늘쉼터를 만들었다. 정겹게 눈에 들어온 것은 돌방아.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굴려서 여기에다가 놓은 것인지 모르되 오후 햇살을 받은 화면 속 모든 물상이 강력한 시각적 요소를 가진 것들이다. 슬레이트 지붕은 색상으로, 그 아래 시멘트 바른 돌담은 점구성으로, 등나무 줄기는 카오스적 불확정성으로 모든 직선들을 물리치고 있다. 거기에 돌방아는 자신이 가진 무게로 전체를 압도한다. 앞에 굵은 전봇대는 키를 가지고 다른 존재들을 겁박하는 듯하다. 가히 규중칠우쟁론기라고 하는 조선시대 규방문학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여 그렸다. 모두가 자신이 최고라고 한들 화면 속에 들어오면 서로 구도 속에서 상대방을 살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까불고 있었던 것이다. 실용적 쓰임을 다한 돌방아가 마을 안길 쉼터 옆에 놓여 있는 것은 회고와 반추의 시간을 저 쉼터에 앉아 있는 분들에게 제공하기 위함일 것이다.

점과 선, 면들이 눈부신 광선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지 그 회화적 궁금증을 그릴 수 있는 독특한 만남이었다. 서로 싸우는 것으로 보이나 실은 상보적인 아름다움이다. 공간감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명암 원근법에 의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물상과 물상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례.

 

<출처 : 한라일보>

 

 

 

 

 

 

학교운동장에서

수채화 79 × 35㎝ 난산리

 

 

 

연필선 느낌이 나는 담채화를 통해 필통소리 들리던 그 시절 모습을 연상하고 싶었다. 46년을 이어오던 난산초등학교가 1995년 문을 닫았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 운동장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올 졸업생들을 위하여 그대로 살아 있다. 배움은 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풍경으로 그리고 싶은 존재들이 얼마나 많으랴마는 유독 이 운동장의 한 부분을 그리려 한 것은 마을공동체의 뚜렷한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마을. 텅 빈 운동장을 그린다손 무엇을 찾겠냐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그렸다. 이 풍경화가 완성돼갈 무렵, 문득 상상화를 그리고 싶어졌다. 이 그림은 배경이고 중심에 전통한옥을 크게 그려서 편액에는 '예절서당'이라고 쓰면 좋겠다. 마을 어르신 중에 유가의 기본 소양을 교육하실 수 있는 분들이 많다고 하니, 방학이나 휴일에 천자문과 예절을 교육하는 그런 서당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는 환쟁이의 소박한 마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체험학습의 공간으로 만들어져서 전통적인 양반고을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마을공동체 입장에서는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 그런 모습으로 탈바꿈 된 이 운동장에 와서 다시 화판을 펼치고 기와집과 저 햇살 반사된 나무들을 함께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적 가치와 같은 엄청난 담론을 내가 거론할 바 아니나 이 공간이 지닌 소중함을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건의하는 마음으로 한 장의 담채화를 그렸다.

 

<출처 : 한라일보>

 

 

 

비석 그림자가 있는 풍경

수채화 79 × 35㎝ 난산리

 

 

 

마을회관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건진료소 앞에서 멈춰 섰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낮은 오르막, 입동이 지난 초겨울 강렬한 햇살을 받은 모든 물상들이 그림으로 치환돼 들어왔다. 그 중에서 가슴 저미게 파고들어오는 것은 그 분들의 그림자였다. 비석이라는 돌의 의미보다 길바닥에 해시계처럼 자리 잡은 그림자. 마을엔 비석들이 많다. 유교적 선비정신이 깊이 뿌리 내린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았던 조상들의 정신이 마을공동체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서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비석 하나하나에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소중한 마음과 뜻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존재감이 햇살과 만나 후손들에게 그림자로 연결되고 있다. 내리막 경사에서 다시 오른쪽 오르막이 있는 야릇한 변화 속에 빛과 그림자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분주하다. 왼쪽에 배치된 삶의 공간 집과 오른쪽의 살았던 기록 비석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뭔가 시간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 조금 멀리 나무들은 자신의 나이테에 그 대화를 쉬지 않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을의 분위기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보람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그리는 내내 할 수 있었다. 청홍대비의 지붕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감을 뽐낸들 짙은 회색 위에 다섯 개의 비석 무개를 이기지 못한다. 길이라고 하는 양팔저울의 눈금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산리의 마음을 그리려했다.

 

<출처 : 한라일보>

 

 

 

알바메기와 월동무밭

수채화 79 × 35㎝ 선흘1리

 

 

 

알바메기오름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형태적 표정이 오묘하다. 섬 제주의 모든 오름이 그러겠지만 북서쪽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는 자애로움이 있다. 선흘1리를 너무 동백동산 중심으로 바라보는 경향에 대하여 반발심리랄까, 알바메기오름의 가치를 이 계절에 그렸다. 화면 구성은 상투적이다. 너무도 흔하게 접하는 풍경이다. 구도 또한 그러하다. 문제는 그 평이함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다양한 원근법 요소를 망라해야 가능하다. 하늘을 흰색 여백으로 하여 땅을 그려야 하늘과 땅 사이에 알바메기오름 그 자연능선을 그릴 수 있다, 11월이면 부지런한 농부가 월동무를 이정도로 푸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시기다. 앞에 돌담은 포자번식이 왕성하여 이끼의 흔적이 표면에 많이 느껴진다. 구름의 영향으로 땅의 명암은 변화무쌍하다. 그 구름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버리니 깔끔하기는 하지만 중경 정도의 어두운 구름그림자는 허구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 화면의 법칙이려니와 둘을 모두 얻으려면 둘을 모두 잃어야 하는 형국이 있어서 하나를 얻으려 하였다. 이 섬의 농촌 풍경 중에서 하늘과 잇닿은 선들의 멜로디. 평온을 연주하고 있는 저 악보를 그리려 하였다. 밭과 들, 그리고 오름이 하모니를 이루는 지금 여기는 파라다이스를 노래하고 있다. 저 초록은 이 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컬러다. 제주농업경관의 가치를 그리는 것은 풍경화 작업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보람이라 생각하며 그렸다.

 

<출처 : 한라일보>

 

 

 

 

 

 

속산밭 옆 새물질의 가을풍경

수채화 79 × 35㎝ 선흘1리

 

 

 

신비의 분지다. 이 지점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모두 오르막이다. 보통 다른 지역이었으면 이런 위치에 자연 상태로 큰 연못이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집이 지어져 있는 주거 공간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이 대대로 주민들이 살아오고 있다. 지역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시간 당 300㎜이상의 폭우가 내릴 때 잠시 나무토막이 뜰 정도의 물이 고이긴 하지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모두 어디론가 빠져나가 버린다고 한다. 동백동산 서쪽 입구와 잇닿은 길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런 것. 당연히 그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과 정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신비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접시의 중심부와 같은 위치에 늦가을 오후 햇살이 강렬하게 들어오면 사철 초록을 유지하는 나무들과 낙엽이 지는 나무들이 절묘하게 태양광선을 색채차별성 있게 반사하고 있다. 나무들이 감싸고 있는 집들. 이 마을 주민들이 추구하는 환경이념을 그리려 하였다. 필자는 가끔 폭우가 내리는 날 여기에 와보곤 한다. 어떤 숨골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비를 흡수해버리는 것일까? 화산섬이 만들어낸 놀라운 메커니즘이 여기 숨어 있는 것이다. 동백동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숲이 그 많은 물들을 순식간에 빨아먹어버리는 것이라는 동화적 상상력과 함께. 그렇다면 어딘가 빨대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서 그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전문가들이 나서서 이 신비의 분지를 연구하여 발표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렸다.

 

<출처 : 한라일보>

 

 

 

 

 

 

대록산 남쪽에서 바라본 시월풍경

수채화 79 × 35㎝ 가시리

 

 

 

놀라움은 시간의 충돌에서 발생하곤 한다. 상강이 지난 가을 들녘에 쏟아지는 태양, 그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 누가 봐도 가을을 느끼게 하는 그 억새밭 앞에 연두색이 깔려 있다. 그림으로는 단순 색채대비일지 모르나, 가을이 다른 계절과 만나고 있으니 경이로운 것. 겨울을 건너뛰고 내년 봄과 마주하는 모습이 여기 큰사슴이오름(대록산)에 펼쳐지고 있다. 필경 내년 봄 일찍 피어난 유채꽃을 위하여 파종한 것이리라. 이른 봄에 피어있는 유채꽃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게 이 가을 땅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겨울을 이겨낸 과정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 그렸다. 중산간이라 겨울 추위가 더 심할 것이거늘, 이겨낼 것이다. 짙은 언덕 뒤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강렬한 햇살의 두께에 밀려나 멀리서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산이 보유한 삼각형에 근접한 능선을 보여주기에 그러하다. 박공지붕의 물매 각도를 오차범위 내에서 형상화 한 모습이다. 하여, 집이다. 한라산은 집이다. 안식을 주는 삶의 공간. 누가 저기 사는가? 숨 쉬는 모든 것들을 품어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공간. 잔디운동장을 만든 너른 평지에 돌담처럼 서쪽이 언덕으로 가려진 곳. 가시리 목장지대라고 하는 환경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다. 땅바닥이 단순한 평평함을 미세한 대각으로 분할하는 것은 의도되지 않은 화면상의 쾌감이다. 마을마다 보유한 한라산의 모습은 다르다. 가시리 한라산을 그렸다. 수직의 현실 속에 수평의 위안을 찾아.

 

<출처 : 한라일보>

 

 

 

동카름 오르막길에서

수채화 79 × 35㎝ 가시리

 

 

 

눈부신 가을날, 북쪽 하늘에 옅은 구름이 지나니 파란 하늘을 대신하여 오르막길 양쪽 지붕이 파랗다. 평면에서의 길은 화면의 중심에서 끊어져 한쪽 귀퉁이가 하늘과 잇닿아 있다. 구도로 생각하면 그 지점을 그리려 하였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 경험 속에서 다양하고 방대하다. 여기 가시리에서 땅이 하늘과 만나는 방법은 집과 집 사이에 난 길 속에서 찾는다. 삶의 소중한 가치가 길과 하늘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그 존귀함을 양옆에서 협시하는 분위기를 걸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오르막 길 저 편에 지붕만 보이는 집들로 하여 공간적 '다음'은 완결되었다. 농촌마을의 소박한 일상이 풍경 속에 자기 위치를 차지하며 드러나 있다. 시월 하순이라는 시간성은 누렇게 변해가는 잎사귀들이 초록색과 오버랩되는 듯하다. 미세한 변화를 색으로 잡아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차선이 그려진 아스팔트길. 광선이 너무 강하여 짙은 회색의 길조차 담백한 반사광의 포로가 되었다. 길 오른쪽 근경의 자갈들이 매끈한 포장도로와 질감 대비를 이룬다. 그저 스쳐 지나가기 딱 좋은 너무도 평범한 농촌마을 안길의 모습에서 실존의 일상성은 이다지도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오르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르게 되는 길. 여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공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의미들을 담으려 하였다. 돌담 시절 또한 아주 절묘하게 함께 공존하는 메시지가 되어 화면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가을이라서 그린 길이다.

 

<출처 : 한라일보>

 

 

 

곰솔과 한라산의 만남

수채화 79 × 35㎝ 수산리

 

 

 

이런 만남도 있다. 화면이 줄 수 있는 우매함이 있다. 사각 틀 안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화면 안에 등장하는 모습들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 여기에 보여지는 소나무는 수산리 곰솔을 몰랐을 경우 몇 개의 소나무로 짐작하여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으로만 봐서 누가 한 개의 소나무 윗부분만 그린 것으로 볼 것인가? 하지만 분명 400년 넘는 수령의 곰솔이다. 하루하루를 살아 이 모습이 되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의 몇 배를 살았기에 저리도 한라산과 어울리게 되는가 싶어서 그렸다. 서쪽으로 기운 햇살을 가까이서는 곰솔이 받고 멀리서는 한라산이 받는다. 딱 두 개의 주제가 한 화면에서 만나게 하려니 이런 파격적인 구도가 만들어졌다. 가로세로 비례의 딜레마는 곰솔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형국으로 몰고 갔으나 한라산의 정적인 공간에 대비하여 소나무가 지닌 엄청난 공간 짜임은 오히려 동적인 역동성으로 보인다. 소나무 가지와 솔잎들 사이사이 뒤로 수산저수지 물빛이 살짝살짝 드러난다.

산과 물, 그리고 소나무.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중에 솔잎에 들어와 반사하는 해까지 포함하여 네 개가 그림 속에 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라산의 능선과 기상이 수산봉 아래 곰솔과 만나면 그 느껴지는 시간성이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빛 중심의 주제의식을 강조하다보니 다양한 생략법을 추구하였다. 아이와 같은 궁금증이 그리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400년 살면 어떻게 되나?' 세상은 정해진 수명의 결합체이거늘.

 

<출처 : 한라일보>

 

 

 

 

 

 

예원동 가을 길

수채화 79 × 35㎝ 수산리

 

 

 

청명한 시월의 태양광선이 오묘한 공간적 갈림길에 부서진다. 아스팔트길은 내리막이고 농로는 오르막이다. 각도는 15도 정도. 길의 갈래로 생각하면 네거리다. 시점의 오른쪽 언덕을 감아 돌아가는 곡선길과 차도가 아주 살짝 겹쳐서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구조다. 멀리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두 개의 오름에서부터 풍경은 여기 길바닥 그림자까지 달려왔다. 시선이란 물상과 물상이라는 진주를 구멍을 뚫어서 꿰매는 감성적 기능이라는 것을 이 농촌마을 풍경에서 입증하고 싶었다. 맑음은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최적화되고 특별한 기능이다. 그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저 맑음에 녹아들어 밝을 것이다. 수채화로 표현 할 수 있는 거리감의 단계들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시험대를 제공하고 있는 풍경이다. 시험이라면 합격하고 싶은 욕구로 그렸다. 거친 암반들은 동양화 필법을 준용해 돌 자체에 생기를 느끼도록 했다. 농촌마을의 평화로운 오후. 언덕 그림자 속에서 바라보는 밝은 세상은 살아있다는 희열이며 찬란한 환희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싶었던 두 갈래 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아주 미세해 자연스러운 발걸음의 선택 공간. 무리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안타까움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지는 이런 길을 걸으며 어떻게 살든 차이가 그리 크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되새김 했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 이 풍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이 가을 햇살 속에 그렇게 산다.

 

<출처 : 한라일보>

 

 

 

 

 

 

섭섬에 대하여

수채화 79 × 35㎝ 보목마을

 

 

 

모습 자체로 하나의 山이다. 뫼 山이라는 한문이 공간 확대돼 세상에 놓여 있다. 하늘과 바다의 여집합. 그러면서도 하늘과 바다를 포함하는 산을 바라본다. 사각이라는 화면, 그 가로 세로 비례 속에 등장하는 저 산은 오직 화면과 비례관계를 요구했다. 어디에 위치하겠다는 것 또한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나머지는 모두 군더더기이기에 빼라는 당당한 고집까지. 심벌리즘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보목리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를 스스로 밝히겠다는 것. 해가 뜨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능선들은 명암을 잡아들여 존재감을 키운다. 바닷가 조간대에서 그렸다. 준령들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될 수 있는 한 가까이에서 화면 비례에 합당하도록. 보목마을이라는 공간의 입장에서 앞산이다. 바다밭 가운데 산이 솟아 있으니 그럴 법도 하거니와 바다를 막아선 생동감만큼 마을에 안온함을 부여하는 역할모델이다. 회화적 표현의 방식은 동서양 화법이 뒤엉켜 있다. 섬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을 그리려 했으니 불가피한 선택이려니. 그리는 과정에서 얻은 엉뚱한 발상이 있다. 섭섬의 섭은 혹시 攝(다스리다, 거느리다)이라는 글자가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력이라고 하더라도 저 강력한 존재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뜻이 아니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한문을 보니 귀가 셋이나 달렸다. 듣고 또 듣고, 하염없이 들어서 그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로 다스리고 거느리는 힘. 저 옹골찬 기상이 품고 있는 구체적인 메시지다.

 

<출처 : 한라일보>

 

 

 

 

 

 

정술내 옆으로 포구 가는 길

수채화 79 × 35㎝ 보목마을

 

 

 

이틀을 퍼붓던 비가 방금 전 갰다. 모든 물상이 젖어 있는 상태는 물을 가지고 그리는 수채화의 입장에서 표현 욕구를 증폭하는 소재다. 아직도 하늘은 젖어 있다. 멀리 바다 수평선 쪽에는 환한 햇살이 비치는 것 같지만 비를 품은 먹구름은 아직도 마을 하늘을 모두 떠난 상황이 아니다. 하여, 아스팔트에 듬뿍 뿌려진 빗물은 멀리서 날아오는 광선을 반사하고, 젖은 돌담과 건물 벽은 오랜 세월을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확연하게 보여준다. 시월임에도 얇고 넓은 잎사귀를 가진 나무가 수분을 머금고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열대 식물 파초일엽이 자랄 수 있는 기후 공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포구 가는 길이라는 좁으나마 한쪽에 인도의 역할을 하기 위한 조치가 정겹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지붕 색들이 우연하게도 보색 대비를 이루며 화면에 탄력을 생성시킨다. 비가 개인 오후, 우산을 접고 바라보는 풍경. 그냥 무심코 지나가게 되는 우리의 일상성을 저기 급커브 지역에 서있는 반사경에 비춰본다. 그림으로 마주하는 이야기에 출연한 물상들에게 비라고 하는 날씨 변수를 부여해 더욱 찰진 이미지를 얻으려 했다. 저 집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집이다. 또한 저 집들은 누군가의 마을 안에 있다. 길과 길로 이어진 어떤 결속의 공동체 공간 안에 있다는 생각을 그리는 동안에 거듭 되새김했다. 숱한 사연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평화로운 시간, 이 소박한 공간이 입증하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 아닐까?

 

<출처 : 한라일보>

 

 

 

 

 

 

광해를 생각하며 그린 어등포

수채화 79 × 35㎝ 행원리

 

 

 

인조반정으로 폐위돼 강화도에서 십 여 년 귀양을 살다가 다시 이 곳 섬 제주로 유배돼 온 광해. 처음 당도한 곳이 여기다.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의 입장에서 행원리에 가면 포구를 서성이는 버릇이 있다. '어디일까,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드디어 찾았다. 여기다. 지극히 개인적인 확신이다. 용암이 흘러가다가 용의 모습으로 굳은 듯한 저 모습. 용의 머리가 물속에 반은 잠겨 있다. 광해를 마중 나온 용이려니. 상상 또한 예술의 아주 작은 영역이거니와 그렇게 상상을 하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상상력이니 저 바위 위에 광해와 함께 온 일행들이 군상의 형태로 조각돼 용의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가는 모습이 있으면 그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이보다 알토란같은 소재가 있을까?

해는 방금 전에 지고 은은한 노을의 잔광이 포구에 내려앉았다. 고깃배 한 척이 광해처럼 외롭게 굵은 밧줄로 묶여서 선창에 기대어 있으니 애처롭기까지 하다. 용머리와 고깃배의 일대일 대비. 하나는 흑이요 또 하나는 백이다. 밝음과 어둠. 해가 진 바닷가에 조금 있으면 어스름 내리고, 밝음은 사라져 어둠이 되는 시간. 그 시간적 교차점을 비운의 군주 광해의 유배와 접목하려 억지를 부렸다. 화면 구도 또한 파격적이다. 선창 위에 좁은 면적의 원경에는 한라산의 능선을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려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어등포에서 저녁에 바라보는 한라산은 일품이다.

 

<출처 : 한라일보>

 

 

 

가을 햇살 빚어 내는 모습들

수채화 79 × 35㎝ 행원리

 

 

 

눈금이 있다. 600년 마을의 역사가 흐르면서 터득한 눈금이다. 정확한 길이는 측정하기 어려우나 바닷물이 몇 백 미터를 뭍 깊숙한 곳, 안소라고 하는 곳까지 들어와 뱀장어가 살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되는 마을, 햇살이 비치지 않는 돌담에 농도 차이는 바닷물이 차오를 수 있는 최고 지점이다. 바로 그 위에까지는 집을 짓고 살 수 있다는 경험치를 그리려 했다. 그 노하우는 행원리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역사의 눈금이기 때문이다. 섬 제주의 마을 중에 이렇게 바닷물 가까이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 지점까지 들어온 바닷물은 파도가 없는 그냥 호수요 냇물과 같은 존재다. 밀물과 썰물이라는 2박자 리듬만이 있을 뿐. 잔솔들이 들어찬 언덕은 오후 햇살을 받아서 눈부시게 빛나고, 돌담과 집들이 서로서로 광선과 그림자로 오래된 이웃의 정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파스텔톤 지붕들이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는 정겨운 가을날. 수채화로 담백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집과 밝은 표정을 연상하며 그렸다. 햇살을 받은 돌담과 그늘 속에 있는 돌담이 너무도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시간, 건물 벽은 색칠을 한 모습이기에 태양광선과 만나면 그 찬연한 차이가 명암으로 하여금 잇닿은 다른 물상들에게 존재감을 선물한다. 하늘과 바다의 면적은 지극히 최소화된 의도 속에 가옥과 가옥 사이 공간감이 더욱 크다. 화면이라는 사각구조 속에서 가구처럼 짜들어간 우리 이웃들의 모습은 정교한 공예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출처 : 한라일보>

 

 

 

 

수월이는 어디에 있나

수채화 79 × 35㎝ 고산1리

 

 

 

그리는 내내 전설 속 수월이를 생각했다. 동생을 구하려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는 누나 수월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고산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대신해 부르기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그 수월이를 잊지 않기 위해 오름의 이름까지 바꿔 불렀을까? 전설은 전설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절절함이 가슴 저민다. 가을날의 수월봉은 풀과 나무가 확연하게 판화적 대비를 보여준다. 그걸 그리려 했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지질학적 가치에도 식물들이 옷을 입는다. 질감과 색이 다른 풀과 나무를 천으로 삼아 암반 굴곡들을 덮는 것이다. 기상대와 팔각정은 저 거대한 자연의 예술행위에 구경꾼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늘에 얇은 구름이 낀 날 그렸다. 그래야 기상대의 흰색 구의 형태가 하늘과 버무려져 존재감에 타격을 줄 테니까. 누렇게 변해가는 급경사에서 절벽으로 흐르는 흐름을 오직 작은 나무들에 의지해 표현하는 것은 매력적이면서도 단순화된 구성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수채화의 특성에는 겹쳐져 밑에 은은하게 깔리는 기법이 있거니와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여려 겹을 바르고 또 바르며 흐르는 기운을 투입시켰다. 어떤 두께를 묘사가 아니라 자체의 느낌으로 형상화 시킨다는 것은 화법의 방식을 떠나 수월봉과 같은 자연적인 상황에서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잘게 쪼개진 것을 큰 흐름 속에서 묶어내는 일이 그림 속에서는 가능하다. 제주의 서쪽 끝, 맑은 날이면 늘 수평선 일몰을 감상하는 수월봉.

 

<출처 : 한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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