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은행들]
▲ / 그래픽=진봉기
탈모 막아줄 모낭, 미생물 연구용 대변 5000건 저축
시드 뱅크, 전 세계 종자 110만종 보관
우라늄 은행은 원자력 발전 원료 모아
핵무기 개발하는 기술의 확산 막아요
은행은 내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든든한 기관이죠. 과학계에도 은행이 있습니다. 다만 '과학 은행' 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저장하죠. 대표적인 과학 은행은 종자를 보관하는 '시드 뱅크 (seed bank)' 입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가장 유명하죠. 전 세계에서 모인 종자 약 110만 종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멸종 사태가 벌어질 것에 대비해 만들었죠. 지난 3월에는 온라인으로 종자 보관소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가상 체험 홈페이지 <QR코드> 를 공개했습니다.
전 세계 '똥' 모아 장내 미생물 확보해요
스위스 취리히대에는 똥을 모으는 은행이 있습니다. 스위스 바젤대 · 로잔대 · 취리히대와 미국 럿거스대 연구진이 만든 '미생물 저장고' 죠. 세계 각지에서 모은 똥에서 장내 미생물을 추출해 영하 80도 저장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장내 미생물을 보관하는 이유는 뭘까요? 사람 몸 안에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류를 '마이크로바이옴 (microbiome)' 이라고 부르는데, 최근 특히 주목받는 마이크로바이옴은 장에 있는 미생물이에요. 장내 미생물은 소화와 배변 기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최근에는 우울증이나 자폐, 치매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장 내 장내 미생물이 정상적으로 분포하지 않아 질병이 생기는 환자에게 장내 미생물을 이식하는 치료법도 등장했습니다. '대변 이식술' 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이죠. 2012년 호주에서 위막성 대장염 환자에게 처음 시도했습니다. 건강한 장내 미생물 분포를 가진 사람에게 받은 대변에서 유익한 장내 미생물을 정제해 이식해 주는 거죠.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똥 은행 (미생물 저장고)' 을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똥 은행에 대한 아이디어는 2018년 과학 전문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에서 처음 제안됐습니다. 현재는 시범 운영 중으로 지난해 11월 에티오피아 어린이 대변을 비롯해 라오스 · 푸에르토리코 · 페루 등에서 똥 표본 3000여 개를 모았습니다. 2024년까지 2000개를 추가해 총 5000개를 모으는 것이 목표입니다. 아드리안 에글리 취리히대 교수는 "20분마다 분열할 정도로 변화가 빠른 미생물도 있다" 며 "최대한 빠르게 얼리면서 미생물에 손상이 가지 않을 조건을 찾는 것이 시범 운영 기간의 목표" 라고 말했어요.
우리나라에도 한국인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를 위한 '한국인 장내 미생물 은행 (Korean Gut Microbiome Bank · KGMB)' 이 있습니다. 다양한 장내 미생물을 수집하는 동시에 연구를 위해 장내 미생물을 분양하기도 한답니다.
탈모를 막기 위해 모낭을 저장해요.
탈모는 전 세계 어디서나 관심이 많은 질환입니다. 영국 맨체스터에는 2019년 탈모 치료를 위해 설립한 은행이 있습니다. 탈모 치료 업체 '헤어클론 (hairclone)' 이 운영하는 곳으로, 현재 미국 · 캐나다 · 호주 · 뉴질랜드에서 보내온 모낭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탈모 치료 방법 중 가장 흔한 건 모발 이식입니다. 본래 자기가 갖고 있는 모발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는 수술이죠. 머리카락은 피부 속 털을 만드는 기관인 모낭에서 자랍니다. 모발 이식은 이 모낭을 떼어내 탈모가 발생한 부분에 넣어주는 겁니다. 모낭이 건강할수록 잘 빠지지 않으면서 건강한 털이 자라죠. 모낭에서 털을 만드는 핵심 요소는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모유두세포' 입니다.
헤어클론은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탈모가 시작된 뒤 채집한 모낭은 이미 노화나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건강한 모낭이 아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탈모가 시작되기 전, 건강한 상태일 때 모낭을 미리 채취합니다. 약 120개 정도 채취한 뒤 영하 180도에서 급속 냉각해 보관하다 탈모 증세가 나타나면 보관해 뒀던 건강한 모낭에서 모유두세포를 추출합니다. 그 뒤 이 세포를 증식해 탈모 부위에 이식하는 방법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운영 위한 '우라늄 은행'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자 전 세계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인 원자력 발전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발전 방식입니다.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 원료는 저농축 우라늄입니다. 우라늄은 전 세계 50여 국에 풍부하게 매장된 원료입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채굴한 우라늄은 농도가 옅어 원자력 발전소용 연료로 쓸 수 없습니다. 농축 기술을 이용해 핵연료 비율을 높여야 하죠. 문제는 우라늄 농축 기술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저농축 우라늄은 발전 원료지만, 고농축 우라늄은 핵무기 원료가 되기 때문이죠. 우라늄 농축은 미국 · 러시아 · 중국 · 프랑스 · 영국 등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곳과 극소수 국가만 가능합니다. 그중 러시아는 농축 우라늄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죠.
그런데 지금처럼 러시아가 전쟁 중일 때는 우라늄 연료 확보가 어렵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저농축 우라늄 은행'을 2017년 카자흐스탄에 설립했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국가 간 분쟁이나 세계 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원자력 발전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거죠. 이곳은 저농축 우라늄을 최대 90t까지 저장할 수 있어요. 이는 대도시 한 곳에 3년 동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랍니다.
저농축 우라늄 은행은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란처럼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나라는 원자력 발전소에 쓸 우라늄을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체적으로 농축 시설을 설립하겠다고 주장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저농축 우라늄을 제공하는 은행이 있으면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잃겠죠.
오가희 어린이조선일보 편집장
기획 · 구성 =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3년 5월 30일 자]
스발바르 저장고 입구. / 위키백과
씨앗 은행에 보관된 씨앗.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