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분류 전체보기 2132

[산불을 막는 임도 (林道)]

[산불을 막는 임도 (林道)] 그래픽 = 진봉기 숲 사이 도로 많아야 산불 끄는 장비 · 인력 투입 쉬워요 나무 사이 간격 줘 불 확산 막아 한국의 임도 밀도, 독일 12분의 1 너무 많으면 생태계 교란 우려 매섭게 불던 칼바람이 산들산들 부드러워지는 봄이 왔어요. 동시에 대기는 건조해졌고,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8일 경상남도 합천 지역에서 산불 대응 3단계에 달하는 대형 산불이 발생했어요. 산불은 얼마나 크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총 3단계로 구분하는데요. 이 중에서도 3단계는 평균 풍속이 초속 7m 이상, 진화 예상시간 24시간 이상, 피해 면적은 100㏊ (헥타르) 이상으로 예상되는 '재난' 수준의 큰불이 났을 때 내려져요. 이 단계에서는 산불을 끄기 위해 참여하는 소방대..

[(4) 입헌군주제- 혁명전야의 대격돌]

[(4) 입헌군주제- 혁명전야의 대격돌] ▲ [윤치호 일기]와 관복입은 윤치호. (자료사진) "이것이 왕이라니···" 윤치호의 탄식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과 친러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ㅡ5, 1898. 11. 5.)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국왕'ㅡ그는 고종이다. '혁명의 해' 1898년 11월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이런 일기를 쓰기까지 무슨 일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7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7 정전협정과 전쟁의 결과 1951년 7월 10일에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경계선 책정문제,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미동맹 관계를 제도화하였다. 전쟁은 한반도 전역에 인적 · 물적으로 큰 피해를 남겼다. 제85수용동에서 공산포로들이 시위하는 모습 1952. 5. 31. NARA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유엔군 포로의 모습 1953 경향신문 북한군 포로 송환 모습 1953 경향신문 제1집 개성에서 이루어진 유엔군과 공산군 간의 정전회담 과정을 기록하였다. 개성 정전회담은 예비회담과 본회담으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다 중단되..

[(3) 1898년: ‘민주화 혁명’의 불꽃]

[(3) 1898년: ‘민주화 혁명’의 불꽃] ▲ 1898년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단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자료사진) 왕정개혁과 자유민권 투쟁으로 지샌 1년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기회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회를 기회로 알고 실천의지를 펼치는 힘이 나타날 때, 그 기회는 새 역사 창조의 전환점으로 재탄생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마찬가지다. 지금으로부터 124년전 1893년이 그런 해였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기회, 500년 왕권독재의 껍질을 벗고 자유민권과 민주공화제의 새 나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1898년이었다. 유럽에선 프랑스 혁명 100년을 맞은 때, 문호를 개방한 고종의 대한제국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시대적 요구에 열정을 불태우는..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왼쪽에 유럽이 선명··· 뒤집어서 본 프라 마우로의 세계지도 기독교 세계관과 결별하지 않으면서도 객관성과 정확성을 추구한 프라 마우로 지도의 가치는 180도 뒤집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지금의 세계지도와 거의 흡사한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영국 · 스페인 · 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들의 해안선이 비교적 상세하게 보인다. 지중해 · 흑해 · 카스피해 등 주요 바다들의 위치도 지금 세계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은 '심팡구 섬'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돼 있는데, 이는 유럽 지도에 일본이 등장한 첫 사례다. / 위키피디아 "인도로 가는 바닷길 있다" ··· 콜럼버스보다 앞서간 수도사의 지도 이탈리아 베네치아서 제작 3000개 넘는 설명까지 담아 중세 유럽의 여러 편..

[(2)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 '굴복']

[(2)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 '굴복'] ▲ 이승만이 잇따라 창간한 3개 신문. 1898년 1월 1일 주간 협성회회보. 4월 9일 매일신문, 8월 10일 제국신문. 매일신문은 한국 민간인 최초의 일간지. 제국신문도 일간지, 모두 한글전용. ⓒ 뉴데일리DB 고목가 Song of an Old Tree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약한 비바람 이리저리 구비 쳐 몇 백년 큰 남기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맡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굿박여 반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영화 봄 되어 강근이 자란 후 풍우불외.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

[⑴ 스탈린과 40년전쟁]

[⑴ 스탈린과 40년전쟁]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44세 ⓒ 뉴데일리DB ● 연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의 건국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낸 성공이다. 그 선구적 리더가 이승만이었음은 역사적 기록이 증명한다. 김구는 어떠했던가?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의 주역 이승만을 제쳐놓고 '건국을 반대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가장 숭앙하는 역사왜곡의 아이러니에 빠진지 오래다. 왜 그럴까? 1948년 3월,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 총선거 (5 · 10)를 앞두고서 벌어진 건국전쟁의 현장을 보자. '유엔감시 총선을 통한 건국'이란 외교독립론에 마침내 성공한 이승만 박사는 김구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유엔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적극 동조하던 김구가 하루밤새 돌변하여 "김일성과 통일 협..

[구 벨기에 영사관] 02

[구 벨기에 영사관] 02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구 벨기에영사관에 설치되었던 필라스터 (벽식기둥) 장식의 일부다. 목조건축과 달리 조적조 (組積造)에 석고와 회벽으로 마감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장식은 이축 시 온전하게 해체해서 재사용하는데 한계가 있어 원 모습 그대로 복제하여 이축복원이 이루어졌다. 전시된 벽식기둥의 일부는 2층 복도에 위치했던 장식용 필라스터 일부로 사각형의 이오니아 그둥의 특징인 회오리 장식과 세로 홈의 골줄로 구성되어 있다. 조적조 (組積造) : 돌, 벽돌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 남서울미술관 현재 남서울미술관의 건축미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장면을 실내, 디테일, 실외로 구분해 9개의 기둥 위에 표현했다. 하단의 타일들은 이축 공사 후 남겨진 타일의 일부로, ..

근대건축물 등 2023.05.03

[김윤신 : 더하고 나누며, 하나] 02

[김윤신 : 더하고 나누며, 하나] 02 2 우주의 시간 에서는 김윤신이 생애 전반에 걸쳐 작업을 계속한 목조각에 비해 한정된 기간 제작됐지만 가장 힘든 과정을 동반했던 석조각을 소개한다. 1984년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김윤신은, '멕시코 예술궁전미술관' 초대전을 계기로 멕시코를 방문해 새로운 재료인 오닉스 (Onyx)에 매료되었다. 이에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오닉스 산지로 유명한 멕시코 푸에블라 (Puebla) 주의 테칼리 (Tecali) 마을에 작업장을 마련하게 된다. 오닉스는 희소성과 미적 가치, 견고한 정도를 기준으로 보석 다음인 준보석으로 분류되는 경도 7의 단단한 광물이다. 때문에 김윤식은 작품 제작 과정에서 많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외진 마을에서 혹독한 육체 노동과 다..

전시회 2023.05.01

[구 벨기에 영사관] 01

[구 벨기에 영사관] 01      구 벨기에 영사관 지정번호 : 사적 제254호 / 시대 : 1905년 (광무 9)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059ㅡ13번지 이 건물은 1901년 한국과 벨기에 사이에 수호통상조약 (韓 · 白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후 세워진 벨기에 영사관이다. 1903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됐다.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2가 78번지 (현 우리은행 본점 사옥 위치)에 있었는데 1970년 도심재개발 사업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충무로 1가로 이전한 뒤 요코하마 (橫濱)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武官部) 관저 (官邸)로 쓰였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이 건물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