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14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과 지지시위와 신탁통치 반대 시위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 NARA | 1946. 1. 16.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개회사를 읽는 김규식 의장 | NARA | 1946. 12.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합작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 소련 · 영국의 외무장관들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했다. 회의 결정문에는 한국에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즉시 독립국가 수립을 바라던 한국인들은 좌우익을 망라하여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나,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을 총체적 지지하는 노선으로 돌아섰다. 좌익과 우익은 극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두 차례의 미 · 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면서 모두 결렬되었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도 좌절되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서 (1945. 12.)
III -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기간에 걸친 일본 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신속히 청산할 조건들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창설한다. 임시정부는 조선의 산업, 운수, 농촌경제 및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응한 방책들을 예비 작성하기 이하여 남조선 미군 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 대표들로써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들, 사회단체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 · 소 · 영 · 중 각국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된다.
3. 공동위원회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 민주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또는 조선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 (후견)하는 방책들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 통치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 소 · 영 · 중 각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여러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의 행정 ·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 방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 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관련 미 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성명서
미 군정청 총사령관 하지가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발표한 성명서이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각 조문 설명 및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 들이 수록되어 있다.
1946. 4.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관련 하지 성명 보도기사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체에 관련해 신탁통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하지의 성명을 보도하고 있다.
1946. 4.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미 · 소대표 | NARA | 1946. 3. 20.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앞의 신탁통치 반대 시위대 | NARA | 1947. 6. 23.
당신의 의무와 권리!
조선의 인민들!
이제 곳 당신네의 지도자를 통하야 말슴하십시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질문서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의 민주주의림시정부 수립에 중요합니다
즉시 당신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본부를 통하야 당신이 었더한 정부를 원한다고 말슴하십시요
당신의 소속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지도자가 이 질문서의 등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미 · 소공동위원회 관련 홍보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시 남북한 제 정당 · 사회단체에 배포한 정부 수립에 관한 의견 질문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1947년 5월 22일 미 · 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고, 1947년 6월 23일 정부의 형태 · 구조 및 정강에 대한 견해를 청취하고자 질문서를 배포하였다.
1947 NARA
《민성》
광복 직후부터 1950년까지 발간된 종합교양잡지 민성 (民聲)이다. 4월 23일 발행본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미국 아놀드 대표와 소련 시티코프 대표를 표지로 그렸으며, 10월 1일 발행본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화되는 내용을 그림과 기사로 담았다.
1946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 지지선언 전단
조선청년총동맹이 작성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지지선언 전단이다. '막부 (幕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결정을 해설한다'라는 전단지. 좌익계열의 조선청년동맹이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완수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1946. 1.
신탁통치 반대성명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서 제작한 성명서이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요구하며 이를 실현할 때까지 불합작, 비타협, 비폭력 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1946. 1.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기념사진첩
좌우합작을 추진한 인물을 중심으로 미군정 산하에 설치된 임시입법기구였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사진첩이다. 의장 김규식과 부의장 최동오 등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47. 12.
좌우합작7원칙 (1946. 10.)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 · 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며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의,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방법 · 운영을 본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 · 교통 ·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우합작위원회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좌우합작에 대하야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명의의 전단이다. 좌우합작이 되면 공산분자의 파괴공작이 정지되며 민족통일에 한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6. 10. 복제
좌우합작에 대한 성명
한국민주당에서 제작한 좌우합작에 대한 성명이 인쇄된 소책자이다.
1946. 10.
남북협상차 평양에 방문한 김구 · 김규식 |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 1948.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제시한 남북협상 5개 조건 (1948. 4. 21.)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이를 배격할 것.
2.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이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 · 소 양군의 철퇴는 양군 당국이 조건 · 방침 · 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새한민보>
1948년 3월 10일 발행된 새한민보의 3 · 1절 기념호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가 실려 있다.
1948. 3. 10.
남북연석회의 개최논의 서신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 · 김두봉에게 보낸 서신이다. 김구는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북한측에서는 남북 각 사회단체 · 정당이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였다.
1948. 2. 국립중앙박물관 복제
1945 ~ 1948 지도로 보는 국내 주요 사건
1945
8. (경흥) 소련군 한반도 남하
대일선전포고 직후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했다. 광복 이전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1945
9. (원산) 김일성 북한 진입
김일성이 소련군함편으로 원산항을 통해 입북했다.
소련군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 1945.
1946
1 (서울) 조선공산당, 동대문운동장에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 지지 시위
기존에 반탁 입장이었던 좌익은 1월 2일부터 회의 결정을 절대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1. (서울) 국방경비대 창설
국방경비대 사열 모습 | NARA | 1948. 5. 15.
1946
2. (서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설치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28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되면서 실질적으로 기능이 상실되었다.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식에서 연설을 듣는 김구, 이승만, 김규식 | NARA | 1946. 2. 14.
7. (서울)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의 주선 하에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이 이뤄졌다. 그 결과로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12. (서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구성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면서 미군정은 온건한 좌우파 지도자에게 좌우합작 운동을 적극 알선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했다. 광복 후 최초의 대의정치기관이나 제정된 법령은 미군정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효력이 발생해 국회와는 성격상 차이가 있다.
3. (서울) 3 · 1절 행사 이후 좌우익의 충돌
3 · 1절 기념식을 좌익과 우익이 각각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했다. 행사 이후에 양측은 충돌하여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 · 1절 기념행사 | NARA | 1947. 3. 1.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주최한 3 · 1절 기념행사 | NARA | 1947. 3. 1.
1947
7. (서울) 여운형 피살
여운형 (1886 ~ 1947)은 독립운동가로 1944년 일제의 패망 이후를 대비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으며 광복 직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김규식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1947년 괴한의 충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여운형 장례식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1947
12. (서울) 장덕수 피살
장덕수 (1894 ~ 1947)는 일제 강점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물이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 여부를 두고 우익진영의 여론이 나뉘자 적극적 참여를 주장했다. 1947년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장덕수 장례식 | NARA | 1947
1948
1. (서울)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국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유엔총회를 통해 한반도 총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입국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환영행사 | NARA | 1948.
1945
8 (경흥) 소련군 한반도 남하
대일선전포고 직후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했다. 광복 이전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1945
9 (원산) 김일성 북한 진입
김일성이 소련군함편으로 원산항을 통해 입북했다.
소련군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일성 | 1945
1946
8. (평양) 북조선노동당 창당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양당이 합당하여 재조직되었다.
1947
2. (평양0 북조선인민위원회 창설
북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1946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 결과 북한 최고권력기구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창설되었다.
1948
2. (평양) 조선인민군 창설
1945
11. (신의주) 반공 학생의거
신의주에서 6개 중학교 학생들이 중심으로 벌인 반공 학생시위이다. 용암포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 지방대회에서의 좌우익 세력간의 충돌로 시작되어 23명의 학생이 죽고 700여 명이 다쳤고 2천여 명이 검거, 투옥되었다.
1945
10. (서울) 이승만 귀국
10. (서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설립
이승만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대표가 모여 조직되었다.
11. (서울)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귀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귀국 | 독립기념관 | 1945. 12. 3.
12. (서울) 신탁통치 반대운동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 논의된 신탁통치 문제가 국내에 보도되자 초기에는 좌 · 우익 모두 반탁운동에 나섰다.
12. (서울) 송진우 피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1887 ~ 1945)는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 총무에 추대되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신중론을 표명하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피살되었다.
피살 수일 전 자택을 나서는 송진우 | 고하송진우기념사업회 | 1945
1946
10. (대구) 대구 10 · 1사건
9월 총파업에 이은 대대적 노동자, 민중 시위로 식량난 등 사회, 경제적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대구 10 · 1사건 | NARA | 1946. 10.
1948
10. (여수) 여수 · 순천 10 · 19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도로의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다.
여수 진압 직후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혐의자를 선별하는 모습 | 이경모 | 1948. 10.
1946
6. (정읍) 정읍 발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1948
4. (제주도) 제주 4 · 3사건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 · 1절 기념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반발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시위를 강경하게 대응해 사태가 악화되었고 이듬해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군경 진압 과정 속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5 · 10 총선거 당일 입산한 제주도민 | NARA | 1948. 5.
1945
8. (평양)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 설치
8월 말에 북한 지역을 장악한 소련군은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소련군 평양 입성 환영대회 | NARA | 1945
10. (평양)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 개최
11. (평양) 조선민주당 창당
조선민주당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창당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이다. 조만식의 연금 이후 소련의 박해를 받은 우익측 간부들은 월남하여 재헌의원선거에도 출마하였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시절 조만식 |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1946
1. (평양) 조만식 연금
2. (평양)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설
북한 최초의 중앙정권기관으로 위원장은 김일성이었다.
1945
9. (인천) 미군, 인천 상륙
인천에 상륙한 미군 | NARA | 1945. 9. 9.
1946
3. (평양) 토지 개혁에 관한 법령 포고
기존의 토지관계를 부정하고 무상몰수 한 뒤 경작권 만을 농민에게 분배하였다. 법령 1조에서 '토지 개혁의 과업은 일본인 토지 소유와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이용권은 경작하는 농민에게 있다'고 밝혔다.
북한 토지개혁 포스터 | NARA | 1947
8. (평양) 산업 · 교통 · 운수 · 체신 · 은행 등 중요 산업 국유화 법령 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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