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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96

[장마]

[장마]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 (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ㅡ 천상병 (1930 ~ 1993) 천상병 시인이 서른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 어이하여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용서를 알게 되었나. 그의 인생 역정을 내가 다 알까마는, 내려치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용서’ 를 빌 만큼 시인이 부모나 가족,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가난이 죄였겠지. 우리 몸의 아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시는 우리를 치유하고, 순진무구한 어떤 시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기도..

[우산]

[우산]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흰 척추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ㅡ 박연준 (1980 ~)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

[꿈같은 이야기]

[꿈같은 이야기] 일러스트=박상훈 꿈같은 이야기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ㅡ 김시종 (1929 ~) (곽형덕 옮김) 나도 내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해서 홀로 쩔쩔매고 있다. 버릴 수 있다면 꿈이 아니겠지. 꿈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 라는 묵직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시집 ‘지평선’..

[명태]

[명태] 명태 현순애 난전에 펼친 어전 허공에 둔 눈 소금기 절은 손등으로 훔친 이마에 바다 슬쩍 걸터앉는다 앞치마로 비린내 두른 여자가 도마 앞에서 종일 칼춤 춘다 여자의 노곤한 청춘 껍질째 벗겨져 낱장낱장 살 비늘오 저녀지는 하얀 속살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몸통 두서넛 토막 종일 품삯은 병든 노모의 약이었다 까치발로도 닿을 수 없는 세상 자식 딛고 서는 무동이었다 식구의 허름한 식사였다. 시인 현순애

詩, 좋은 글 ... 2023.10.25

[하늘 나는 물고기]

[하늘 나는 물고기] 하늘 나는 물고기 현순애 잔잔한 척, 시침 떼고 있는 저수지 연신 물의 혀 굴리며 허리까지 수장된 버들개지 핥고 있다 둘레길에 좌대 펼친 저수지와 한통속인 강태공들 밑밥 던져놓고 기다리고 있다 입맛 다시며 찌 노려보다 순간 챔질, 오르가슴 손맛으로 탐닉하는 순간 물고기와 하늘은 팽팽한 줄다리기 젠장, 짜릿한 비행 동경하던 물 밖 파란 하늘 아니다 나 그렇게 날아 본 적 있다 살랑대는 세 치 혀 속에 숨긴 바늘에 낚여 삶의 날개 찢겨 천 길 아래로 추락하던 날 하늘은 분명 흙빛이었다 강태공의 살림망 세상 물정 어두운 여린 입술들의 아우성 하늘을 찌른다. 현순애 시인

詩, 좋은 글 ... 2023.10.18

[때밀이 하나님]

[때밀이 하나님] 때밀이 하나님 현순애 주일 아침 목욕탕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활보하는 사람들 순한 양 머리 하고 지은 죄 불린다 삼삼오오 건식 습식 오가며 묵상하다 찬물 바가지 세례받고 탕 속에 들어앉은 저 하얀 발목들 시계추 같은 믿음 생활 회개하며 온몸 담가 보지만 금세 턱턱 막히는 숨통 세신 탁자에 죄 펼쳐 놓으면 은밀한 곳의 묵은 죄까지 닦아 세상 시원하게 긁어주시는 손길 지나간 자리마다 새겨지는 하나님, 하나님 음성 탕자야 너는 내 아들이라.

詩, 좋은 글 ... 2023.10.12

[봄바람]

[봄바람] 봄바람 현순애 집 나갔던 강생이 지난 계절 어디서 쏘다니다 왔는지 묻지 않기로 하자 한때 광야에서 드넓은 초원에서 갈기 휘날리던 수컷이다 명지바람 꽁지 붓끝에 묶어 탱탱이 부푼 젖가슴 건들건들 희롱하는, 허공에 대고 속살 여는 태어나는 것들의 아비다 봄 물결 출렁이는 목덜미 붉은 어린 사월이 초상 수채화로 완성하고 홀연히 떠나가는 화공이다 싱싱하게 물오르는 오월이년 엉덩짝 그리며 지느러미에 근육 만들고 있다는 풍문, 뜨겁다. 현순애 시인

詩, 좋은 글 ... 2023.10.08

[피아노]

[피아노] 피아노 현순애 나를 연주하는 이 누구인가 쌓인 먼지 털어내고 강하고 부드럽게 나를 조율한다 예민하게 반응하던 감성의 조율기 늘어지고 녹슨 선 앞에서 돌려 감는 손끝에 닿는 이성의 음감 어줍다 곡 하나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까 달려온 세월이 건반 뒤에서 해머처럼 종주먹 쥔 채 주름살로 늘어진 현 앞에 서 있다 헝클어진 우주의 입술 열어 치열 고른 여든여덟 계단 무지개빛 옥타브 자유롭게 발 디뎌보면 세상 아우르는 섬세한 숨결 슬픔도 기쁨도 우울도 환희도 모두가 물결 따라 체득하는 일이다 플랫 되는 감정 올려잡고 깊게 지르는 공명 때론 선율로, 때론 화음으로 하나 되는 하모니 천상으로 오르는 희고 검은 계단에 새겨지는 이름 하나 피아노포르테.

詩, 좋은 글 ... 2023.09.20

[달팽이]

[달팽이] 달팽이 현순애 교과서 밥 말아 먹어 길 어둑한 여자 웅크렸던 어둠 둥글게 말아 지고 촉수 내밀어 온몸 밀어 홍등가 불빛 더듬는다 눅진한 골목 찾아드는 허기진 군상들 술을 마실까, 여자를 마실까 끈적대는 밤 웃음 팔고 사는 홍등 불빛 아래 고단했던 하루 뜨겁게 배설해 놓고 가벼워진 지갑들 휘적휘적 갈지자 그리면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등짐 진 채 이우는 달그림자 베고 새벽 누인다. 시인 현순애 [출처 : 뉴스앤북]

詩, 좋은 글 ...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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