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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109

[아침 식사]

[아침 식사] 일러스트 = 이철원 아침 식사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 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ㅡ 자크 프레베르 (1900 ~ 1977) (김화영 옮김) 때는 아침, 장소는 카페인가 가정집인가? 적당히 붐비는 카페는 헤어지기 좋은 장소이다. 짧게 끊긴 문장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시나리오 같은 시. 한 행의 길이가 아주 짧다. 커피를 마시고 빗속으로 떠난 남자의 몇 분간을 카메라처럼 담담하게 묘사했다. 자크 프레베르 (1900..

[하이힐]

[하이힐] [출처 : 서울경제] 하이힐 현순애 여자라고 지각하던 아찔한 스무 살은 몇 센티 높아진 자신감으로 당당히 세상과 마주했지 밋밋한 옷도 미니스커트로 둔갑시키는 에스라인, 무척이나 도도했지 코쟁이보다 코가 더 높고 성깔 뾰족한 내가 거리를 콕콕 쪼고 다니면 씰룩한 걸음걸이에 뭇 사내들 쓰러지기도 했지 순진한 발가락 옥죄고 발꿈치 물어뜯겨 피 보고 나서야 내 실체 알았으니, 내 스무 살 그녀와의 동거는 참으로 애증 관계였지 그럼에도 늘씬하게 착시 일으키는 곡선 포기하기란 우리 아버지 담배 끊기보다 더 힘든 일이어서 나는 늘 중독된 채 살았지 하염없이 비 쏟아지던 어느 날 결국 내 위선 보내기로 했지 버스 승강장 옆, 스무 살을 벗어 빗물에 실려 보내며 한없이 서러웠지 10센티는 더 가식적이었던 젊은..

詩, 좋은 글 ... 2023.11.05

[행복 2]

[행복 2] 일러스트 = 이지원 행복 2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ㅡ 나태주 (1945~)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집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삶의 질은 너무 다르다. 집은 쉬는 곳이다. 쉬어야 인간은 산다. 내 집이 있다면,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도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를 언제 쓰셨을까? ‘행복 1′ 보다 나중에 썼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행복 1′ 을 찾아보았다.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 잠시 나는 행복하다 / (…) /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 딸아이를 바라볼 때 / 나는 잠시 더 행..

[장마]

[장마]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 (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ㅡ 천상병 (1930 ~ 1993) 천상병 시인이 서른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 어이하여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용서를 알게 되었나. 그의 인생 역정을 내가 다 알까마는, 내려치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용서’ 를 빌 만큼 시인이 부모나 가족,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가난이 죄였겠지. 우리 몸의 아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시는 우리를 치유하고, 순진무구한 어떤 시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기도..

[우산]

[우산]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흰 척추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ㅡ 박연준 (1980 ~)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

[꿈같은 이야기]

[꿈같은 이야기] 일러스트=박상훈 꿈같은 이야기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ㅡ 김시종 (1929 ~) (곽형덕 옮김) 나도 내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해서 홀로 쩔쩔매고 있다. 버릴 수 있다면 꿈이 아니겠지. 꿈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 라는 묵직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시집 ‘지평선’..

[명태]

[명태] 명태 현순애 난전에 펼친 어전 허공에 둔 눈 소금기 절은 손등으로 훔친 이마에 바다 슬쩍 걸터앉는다 앞치마로 비린내 두른 여자가 도마 앞에서 종일 칼춤 춘다 여자의 노곤한 청춘 껍질째 벗겨져 낱장낱장 살 비늘오 저녀지는 하얀 속살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몸통 두서넛 토막 종일 품삯은 병든 노모의 약이었다 까치발로도 닿을 수 없는 세상 자식 딛고 서는 무동이었다 식구의 허름한 식사였다. 시인 현순애

詩, 좋은 글 ... 2023.10.25

[하늘 나는 물고기]

[하늘 나는 물고기] 하늘 나는 물고기 현순애 잔잔한 척, 시침 떼고 있는 저수지 연신 물의 혀 굴리며 허리까지 수장된 버들개지 핥고 있다 둘레길에 좌대 펼친 저수지와 한통속인 강태공들 밑밥 던져놓고 기다리고 있다 입맛 다시며 찌 노려보다 순간 챔질, 오르가슴 손맛으로 탐닉하는 순간 물고기와 하늘은 팽팽한 줄다리기 젠장, 짜릿한 비행 동경하던 물 밖 파란 하늘 아니다 나 그렇게 날아 본 적 있다 살랑대는 세 치 혀 속에 숨긴 바늘에 낚여 삶의 날개 찢겨 천 길 아래로 추락하던 날 하늘은 분명 흙빛이었다 강태공의 살림망 세상 물정 어두운 여린 입술들의 아우성 하늘을 찌른다. 현순애 시인

詩, 좋은 글 ... 2023.10.18

[때밀이 하나님]

[때밀이 하나님] 때밀이 하나님 현순애 주일 아침 목욕탕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활보하는 사람들 순한 양 머리 하고 지은 죄 불린다 삼삼오오 건식 습식 오가며 묵상하다 찬물 바가지 세례받고 탕 속에 들어앉은 저 하얀 발목들 시계추 같은 믿음 생활 회개하며 온몸 담가 보지만 금세 턱턱 막히는 숨통 세신 탁자에 죄 펼쳐 놓으면 은밀한 곳의 묵은 죄까지 닦아 세상 시원하게 긁어주시는 손길 지나간 자리마다 새겨지는 하나님, 하나님 음성 탕자야 너는 내 아들이라.

詩, 좋은 글 ...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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