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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 109

[봄바람]

[봄바람] 봄바람 현순애 집 나갔던 강생이 지난 계절 어디서 쏘다니다 왔는지 묻지 않기로 하자 한때 광야에서 드넓은 초원에서 갈기 휘날리던 수컷이다 명지바람 꽁지 붓끝에 묶어 탱탱이 부푼 젖가슴 건들건들 희롱하는, 허공에 대고 속살 여는 태어나는 것들의 아비다 봄 물결 출렁이는 목덜미 붉은 어린 사월이 초상 수채화로 완성하고 홀연히 떠나가는 화공이다 싱싱하게 물오르는 오월이년 엉덩짝 그리며 지느러미에 근육 만들고 있다는 풍문, 뜨겁다. 현순애 시인

詩, 좋은 글 ... 2023.10.08

[피아노]

[피아노] 피아노 현순애 나를 연주하는 이 누구인가 쌓인 먼지 털어내고 강하고 부드럽게 나를 조율한다 예민하게 반응하던 감성의 조율기 늘어지고 녹슨 선 앞에서 돌려 감는 손끝에 닿는 이성의 음감 어줍다 곡 하나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까 달려온 세월이 건반 뒤에서 해머처럼 종주먹 쥔 채 주름살로 늘어진 현 앞에 서 있다 헝클어진 우주의 입술 열어 치열 고른 여든여덟 계단 무지개빛 옥타브 자유롭게 발 디뎌보면 세상 아우르는 섬세한 숨결 슬픔도 기쁨도 우울도 환희도 모두가 물결 따라 체득하는 일이다 플랫 되는 감정 올려잡고 깊게 지르는 공명 때론 선율로, 때론 화음으로 하나 되는 하모니 천상으로 오르는 희고 검은 계단에 새겨지는 이름 하나 피아노포르테.

詩, 좋은 글 ... 2023.09.20

[달팽이]

[달팽이] 달팽이 현순애 교과서 밥 말아 먹어 길 어둑한 여자 웅크렸던 어둠 둥글게 말아 지고 촉수 내밀어 온몸 밀어 홍등가 불빛 더듬는다 눅진한 골목 찾아드는 허기진 군상들 술을 마실까, 여자를 마실까 끈적대는 밤 웃음 팔고 사는 홍등 불빛 아래 고단했던 하루 뜨겁게 배설해 놓고 가벼워진 지갑들 휘적휘적 갈지자 그리면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등짐 진 채 이우는 달그림자 베고 새벽 누인다. 시인 현순애 [출처 : 뉴스앤북]

詩, 좋은 글 ... 2023.09.13

[칼로 물 베기]

[칼로 물 베기] 칼로 물 베기 현순애 우리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예보는 빗나가지 않아 냉랭한 공기가 밀어 올린 전선에 천둥 번개 친다 휘모리장단으로 뼛속까지 꽂히는 물방울들 가려운 등 시원하게 긁어주던 당신은 빗발치는 한랭전선의 차가운 소나기 바닥을 알 수 없는 표정 사이 무성하게 자란 가시나무숲에서 당신은 붉으락, 나는 푸르락 읽히지 않는 먹구름 속에서 당신은 각을 세우고 뿔 움켜쥔 나는 빙점에 서 있다 얼음장 밑에서도 물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잡은 손 놓지 않기 때문이리 모래 둔덕에 서로의 허물 하얗게 묻어두고 갈댓잎에 울음 파랗게 매달고 가기 때문이리 비등점 향해 치닫던 세 치 혀의 어둡고 차가웠던 서로의 문장 냇물에 풀어 보면 물감 퍼지듯 서로에게 스미는 당신과 나의 사랑 칼로 다시 물 베어..

詩, 좋은 글 ... 2023.09.12

[주먹]

[주먹] 주먹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ㅡ 미덥지 못함. 아아, 그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ㅡ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 ~ 1912) (손순옥 옮김) 다쿠보쿠의 시에서 내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치밀한 묘사,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눈이다. 친구에게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른 뒤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하는 눈, 현대인의 고독한 눈, 그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시인이 화를 참지 못해 주..

[구멍]

[구멍] 구멍 현순애 구멍은 생의 출발점이지 여자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지 따뜻하고 아늑한 동똑 끝 고요 속에서 여자를 완성하고 한줄기 폭포수로 쏟아질 때 스스로 펼쳐진 낙하산처럼 우주의 기와 접선했다지 작은 빛에도 반응했을 눈구멍부터 농밀한 밤꽃에도 벌렁거렸을 콧구멍 또, 은밀한 그 구멍까지 엄마를 쏙 빼닮은 여자 오십 고개 넘어 찾아온 폐경 고립의 구멍과 관절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목젖 무너져 내린 의식 꺼진 밤이면 입 벌린 채 드르렁드르렁 집 한 채 흔들고 스스로 흔들다 구멍들 헐거워져 집 무너져 내릴 때면 다시 왔던 길 되짚어 돌아갈 터 구멍은 생의 종착점이지. 사진 출처 : NEWS N BOOK

詩, 좋은 글 ... 2023.09.04

[6월의 밤 (June Night)]

[6월의 밤 (June Night)] 6월의 밤 (June Night) 오 대지여, 너는 오늘밤 너무 사랑스러워 비의 향기가 여기저기 떠돌고 멀리 바다의 깊은 목소리가 땅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내 어떻게 잠들 수 있으리오? 오 대지여, 너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 널 사랑해, 사랑해ㅡㅡ 오 나는 무엇을 가졌나? 너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건ㅡ 내가 죽은 뒤 나의 육신밖에 없네. ㅡ 사라 티즈데일 (1884 ~ 1933) 가슴을 찌르는 마지막 행이 없다면 그렇고 그런 밋밋한 시가 되었을 텐데, 역시 사라 티즈테일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아말휘의 밤 노래 (Night Song at Amalfi)' 를 읽은 뒤 그녀의 시에 매료되어 아말휘 바닷가를 찾아갔던 젊은 날이 떠오른다. 사라..

[무화과 숲]

[무화과 숲] 일러스트 = 박상훈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ㅡ 황인찬 (1988 ~)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 신선해 보고 또 보았다. 시인이 젊으니까, 뭘해서 가끔 혼나기도 하는 나이니까 이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지 않아서 혼이 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아침을 먹고 저녁에 저녁을 먹듯 사랑이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젊음의 치기가 느껴지는 시. 젊지만 노련한 '쌀' 로 시작해 '꿈이었다' 로 끝나는 정교한 작품이다. 무화과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겉은 거칠게 생겼지만 안은..

[가는 봄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가는 봄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 일러스트 = 박상훈 가는 봄이여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의 눈에는 눈물 ㅡ 마쓰오 바쇼 (1644 ~ 1694) (김정례 옮김) 하이쿠 (일본의 짧은 정형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바쇼의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 을 다시 읽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헤어져 여행을 떠나는 감회를 적은 '가는 봄이여' 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눈물' 이다. 바쇼의 글에는 '눈물'이 자주 나온다. 눈물이 많아지는 나이 46세에 제자 소라와 함께 에도 (도쿄)를 떠난 바쇼는 2400킬로미터 먼 길을 걸어서 여행했다. '눈물'은 하급무사 출신 방랑시인 바쇼의 서민적 성정을 드러내는 특징일 수도 있다. '새 울고'로 자신의 울음을 감추고 얼마나 슬프면 물고기의 눈에서 눈..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동일한 본질로부터 창조된 아담의 자식들은 서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분이다. 한 구성원이 다치고 아플 때, 다른 사람들은 평화로이 지낼 수 없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ㅡ 사디 시라즈 (1210 ~ 1291 ?)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쓴 '장미정원 (Gulistan)'에 나오는 '바니 아담 (Bani Adam)'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다지 매료되지 않았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시들은 많다. 시의 발상이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 (John Donne)의 문장을 연상시킨다. 존 던보다 350여 년 전, 인류애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13세기에 페르시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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