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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60년 91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㊴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북한 공군기가 1950년 6월 28일 김포공항에 계류해 있던 미 공군 수송기를 폭격해 화염이 일고 있다. 국군은 한강 남쪽 시흥 지역에서 지연작전을 펼쳤다. [백선엽 장군 제공]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 전쟁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부대가 도시에 오래 머물면 전투력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도시는 평안함의 유혹을 풍기는 곳이다. 향락도 그 안에 숨어 있어 장병의 마음을 잡아끈다. 북한군 서울서 사흘 지체 … 김일성 “뼈아픈 패착” 훗날 토로 평안함에 묻혀 안일(安逸)함을 생각하다 보면 병사들은 탈선하기 쉽다. 전선의 살벌함과 피곤함이 싫어지면서 전투력이 크게 깎인다. 6월 28일 서울..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㊳ 한강 남쪽 방어선 지연작전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㊳ 한강 남쪽 방어선 지연작전 미국 최대의 박물관 운영 단체인 스미스소니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스미스소니언’의 2003년 7월 호표지. 6·25 휴전 50주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내면서 표지에 당시 사진을 실었다. 후방으로 피신하는 피란민과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임진강 전선에서 밀린 나는 1950년 6월 29일 먼동이 트는 무렵 시흥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낯설지 않은 미군 장교가 서 있었다. 전쟁 전 광주의 5사단장을 맡고 있을 때 미 고문단장을 따라 함께 왔었던 메이 중위였다. 시흥서 만난 미군 장교 “곧 VIP 온다” … 그는 맥아더였다 그는 전 단락에서도 자주 언급했던 인물이다. 내가..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㊲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㊲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미군과 연합군의 지원군 본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 미군은 공중 공격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단 힘을 기울였다. 1950년 7월 3일부터 이틀간 북한군을 맹렬히 공격했던 팬더 제트기가 일본에서 발진한 항공모함 갑판 위에서 날개를 펼치며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생각해 보면 6·25 전쟁은 준비가 충실한 적 앞에서 준비가 없던 대한민국이 경황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밑으로는 일반 사병, 위로는 최고 지휘관과 대통령까지 모두 적을 막기 위해 나섰지만 준비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치밀했던 남침계획서 … 북, 남한 깨알까지 세고 쳐들어왔다 나중의 일이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㊱ 봉일천의 비장한 후퇴 명령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㊱ 봉일천의 비장한 후퇴 명령 미 공군기가 1950년 7월 3일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에 그해 6월 28일 육본 명령에 따라 폭파돼 끊어진 한강 인도교 모습이 보인다. [미 육군성 전사 자료]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산으로 키가 작은 몽골말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정오를 넘겨 오후로 접어 들어가던 무렵이었다. 파주 봉일천초등학교에 차려진 1사단 전방지휘소(CP)에서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적군이었다. 기관총과 박격포를 말 등에 실어 나르는 기마대(騎馬隊)였다. 바로 눈앞에 적이 나타난 것이다. 곧이어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사단사령부에는 참모와 지휘소 요원 30여 명이 전부였다. 우리는 CP를..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㉟ 이상한 ‘사수 명령서’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㉟ 이상한 ‘사수 명령서’ 경기도 문산 돌출부와 파평산을 잇는 우리 1사단의 주 저항선을 뚫고 온 적의 병력은 예상보다 많았다. 적어도 2개 사단 이상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적의 병력은 전차연대를 포함해 2만1000명이었다. 9000명의 국군 1사단 병력을 훨씬 넘어섰다.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탱크에다 사거리가 우리 것에 비해 2배 정도 되는 중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밀고 내려오는 것으로 봐서 훈련이 잘된 군대였다. “전선 사수하라” 명령한 육본, 한강 다리 끊고 수원으로 철수 파주 봉일천 저항선에 각 부대가 대부분 도착해 방어에 들어갔다. 26일 밤에는 임진강 다리 폭파에 실패했던 공병대대가 결의에 찬 준비를 했다. 21명의 자원 특..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㉞ 끈질긴 저항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㉞ 끈질긴 저항 6 · 25전쟁은 개전 초기 북한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병력과 무기에서 밀린 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개전 초 북한군과 힘겹게 일전을 치렀던 국군 장병이 지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 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찍은 사진이어서 화면이 흐릿하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0년 6월 25일 적을 맞이한 뒤 첫 밤을 맞았다. 파주 국민학교에 차려진 사단 전진지휘소(CP)에 도착했다. 참모와 부관을 비롯해 사단 직할부대와 보급부대 등이 그곳에 함께 있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戰況)은 역시 암울했다. 전선 쪽에서는 총성과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 오후 늦게 증원(增援) 병력이 도착했다. 유해준 대령과 김동빈 중령이 지휘하는 육군사관학교 교..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㉝ 길고 긴 고난의 시작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㉝ 길고 긴 고난의 시작 6 · 25 전쟁 발발 뒤 미국 군사고문단의 일부는 철수 명령에 따라 한국을 떠났다. 고문단 일부 병력이 1950년 6월 27일께 선박 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행군하고 있다. [중앙포토] 임진강 철교, 저 다리를 언제 끊어야 할까. 우선 상황부터 점검했다. “적이 온다, 임진강 철교 폭파하라” … 하지만 폭발은 없었다 장치은 공병대대장을 불렀다. “유사시에 다리를 폭파할 준비는 했나”라는 물음에 그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임진강 북쪽으로는 아직 12연대 병력 3000명이 남아 있다.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내게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건네줬던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 그때 느닷없이 작별인사를 해왔다. “미 군사고문..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㉜ 50년 6월 25일의 38선

[6 · 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㉜ 50년 6월 25일의 38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격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민족의 대참극을 빚었던 6 · 25전쟁의 시작이다. 북한군 부대원들이 인공기를 세워 든 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중앙포토]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났다. 내 옆에 서 있던 국군 1사단의 미군 수석고문관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 담배를 건네줬다. 미제 ‘럭키스트라이크’였다. 연기를 가슴 속으로 가득 빨아들였다. 낯선 두려움이 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쯤 임진강 철교 앞이었다. 신발도 못 신은 미 고문관 “적들 이미 기차 타고 개성역 도착” 이날 아침 전화를 받고 서울 신당동 집을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㉛ 전쟁통의 가족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㉛ 전쟁통의 가족 백선엽 신임 국군 1군단장(오른쪽)이 부산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마친 뒤인 1951년 4월 15일 저녁김활란 공보장관과 신성모 국방장관(왼쪽부터)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기억은 지금 내게 없다. 부관이 그 집을 미리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산 시내 어느 한 주택이었다. 전쟁통이라 여러 가족이 그 작은 집에 함께 섞여서 살고 있었다. 지프에서 내려 집 문으로 들어섰다. 부관이 먼저 기별을 했던가 보다. 방 한 칸에 살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던 아내가 기척과 함께 방문을 나왔다. 6월 25일 그 아침 이후, 열 달간 가족의 안부도 몰랐다 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현대그룹을 창설한 고(故)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내게 들려준 일화다. 그가 감격스러운 첫 방북을 마치고 난 뒤였다. 강원도 통천에 있는 고향을 다녀왔던 정 회장은 헤어졌던 누나와 해후했다. 누나가 그를 만나자 대뜸 “주영아, 우리는 장군님 덕분에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하더란다. 그러나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밤이 되자 그 누나가 슬그머니 오더란다. “주영아, 사실은 배고파 죽겠어….” 늘그막에 만난 누이의 처량한 호소에 정 회장의 감회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작전대로였다면, 휴전선은 금강산 이북에 그어졌다 정 회장이 찾았던 고향 통천군에는 고저(庫底)라는 곳이 있다. 그가 자랐던 고향이자,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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