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드무2 2023. 12. 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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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일러스트 = 이철원

 

 

 

사랑 5

ㅡ 결혼식의 사랑

 

 

성체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든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ㅡ 김승희 (1962 ~)

 

 

 

‘사랑’ 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있으나 실은 섬뜩하고 차가운 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정원 을 다녀온 날 밤에 김승희 시인은 이 시를 썼다. 그날 일본 정원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흰 장갑에서 불현듯 차가운 파시즘의 냄새를 맡았다” 고 시인은 설명한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을 결혼과 식민주의 담론과 연결시켜본 시. 남녀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혼식을 정치적 시선으로 분석해보고 있다.” (김승희, ‘남자들은 모른다’ 169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1행의 ‘신부’ (神父)와 4행의 ‘신부’ (新婦)는 한글 발음은 같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다.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 고 하는 절묘한 대응도 재미있다.

 

 

 

최영미 시인 · 이미출판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9월 1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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