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는 감춰져 있는 고종의 反근대적 친일 행각]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돼 있는 동학 관련 공문서들. 맨 왼쪽은 주한일본공사관에서 보관 중이던 '일본군 철군에 반대한다'는 고종의 문서. 가운데와 오른쪽은 조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이 '동학 민란 토벌에 일본군이 필요하다'고 적은 편지.
① 옆 나라 군사로 요상한 기운을 일소하고 새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중도에서 철수한다면 [若中途調回] 망할 위험이 곧 다가오게 될 터이니 [危亡立至]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1894년 12월 4일 조선 국왕 고종이 일본 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② 10만 일본 육군이 개선하는 날 [陸兵十萬凱旋之日] 도적 떼도 두려워 흩어지리라 [匪徒亦當望風消散]
<1894년 10월 7일 조선 총리 김홍집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
③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공사가 신중하여 많이 파병하지 않았다. 일청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위 김홍집, 같은 편지>
철수하려는 일본군을 고종은 "동학 농민들 진압해달라"며 붙잡았다
근대화 경쟁 격심한 19세기
500년 조선왕조 모순을
그나마 해결할 수 있던 기회
고종은 무엇을 했나
동학 발발 청 군사 불러
일본군까지 출병
교과서는
"고종은 일본 철수 요구"
"일본은 이를 거부"라고 적어
그러나 고종은
관군이 일본군과 연합해
동학 토벌 성공하자
"일본군 철수하겠다"는
일본 공사 선언에
"철수하면 나라 위험하다"며
철수하지 말라 부탁
교과서가 숨긴 역사의 진실
고종을 버린다
'왜 조선은 근대화가 지체됐는가' 라는 질문에 답은 명확하다. 학문과 지성은 교조적인 성리학에 질식되고 상공업과 통상은 억압돼 그저 생존 가능한 만큼 경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각종 외국인 견문록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부터 망국 때까지 가난과 쇄국과 학문 통제에 대한 기록이 넘쳐난다. 지식과 정보 통제는 가난을 증폭시켰다. 증폭된 가난은 부를 창출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할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그렇게 조선은 전 지구대적인 근대화 시대, 19세기를 맞았다.
거기에 고종 (高宗 · 재위 1864 ~ 1907)이 있다. 고종 시대는 지구 동쪽과 서쪽이 서로 고립돼 있던 지난 시대와 달랐다. 전 지구에 관한 정보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유입 중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불세출의 자질을 가진 군왕' (황현, '매천야록' 1, 1894년 이전 11 조헌과 김집의 문묘배향, 국사편찬위)이었다 할지라도 조선 근대화는 쉽지 않았다. 400년 이상 쌓인 모순은 고종이 책임지기에는 너무 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은 방치하기에는 중증이었다. 시대는 엄혹했다. 도처에서 민란이 벌어지고 있었고 세계는 경쟁을 넘어 서로를 집어삼키는 제국주의적 야수로 탈바꿈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불세출'까지는 아니어도 정상적인 국가 경영인이라면 외세에 잡아먹힐 위기를 기회로 바꿀 시도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고종은 그러지 않았다. 백성에게는 모진 지도자였다. 세계에는 무지했다. 국가 경영에는 무능력했다.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보여준 모습은 처가 여흥 민씨 세력과 연합한 이기적인 권력가였다. 백성과 세계와 국가는 상관하지 않고 민씨 척족 세력과 함께 '권력 유지'라는 단일 방향으로 조선을 경영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젊은 밀사 이위종은 만국 가지들 앞에서 그 정권을 이렇게 말했다.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쳤던 우리 조선인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이위종, 'A Plea for Korea', 1907년 8월 22일 'The Independent')
서기 2023년, 21세기다. 근대 공화국 대한민국을 재설계할 시점이다. 그 고종을 버려야 한다. 고종이 자주독립을 염원한 비운의 개명군주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맥락과 맞지 않는다. 고종을 버려야 19세기 말 근대화 경쟁에서 100대0으로 패배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고종 정권이 근대화 과정을 어떤 경로로 저지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를 마지막으로 살펴본다. 국사 교과서가 감춰놓은 고종 마지막 이야기 첫 장을 연다.
고종 (재위 1864 ~ 1907)
은폐된 진실, '고종이 막은 일본군 철군'
20세기를 6년 앞둔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고종 · 민씨 척족 연합 정권 탐학이 낳은 사건이었다. 1893년 어전회의에서 "민란은 외국군을 불러서 진압하자"고 제안했던 고종은 격렬한 관료들 저항에 부딪혀 이를 철회했다. (1893년 음3월 25일 '고종실록') 이듬해 동학이 터졌다. 고종은 여흥 민씨 영준 (민영휘)과 함께 청나라 군사를 불렀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국사 교과서들은 대부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청나라 군사가 출병하자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군이 동시 출병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이 죽창을 내리고 해산했다. 청일 양국 군사가 필요 없어진 조선 정부는 양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군은 철군을 거부했다. 그해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난입해 고종을 협박하고 친일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아산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후 동학은 일본군과 관군 (정부군)에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고등학교 한국사', 미래엔, 2020, p 112 등)
그런데 교과서들이 은폐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해 12월 한 유력 인사가 일본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이 중도에서 철수한다면 망할 위험이 곧 다가오게 될 터이니 [若中途調回危亡立至 · 약중도조회위망립지]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철군하려는 일본군을 가지 말라고 소매를 붙잡는 발언이다. 위 사진 맨 왼쪽이 이 말이 기록된 문서다. 이 문서는 당시 조선국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협판 김윤식이 1894년 12월 4일 (음력 11월 초8일)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공문이다. 문서는 현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영인돼 있다. 문서 이름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6. 내정리혁 (內政釐革)의 건1, (6) 조선 정황 보고에 관한 건>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고종이다.
그러니까 우금치에서 동학군이 궤멸되고 청일전쟁 전선도 대륙으로 넘어가고 일본 승리가 확실시되던 그 겨울,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공사에게 "남아서 민란을 진압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는 고종 육성이다. 공사 이노우에는 며칠 줄다리기 끝에 고종 청을 수용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은 이후 조선 식민지화 작업에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고종은 일본에 시달린 비운의 군주라기보다는 떠나겠다는 외국군을 눌러앉힌 반 (反) 시대적 지도자로 행동했다. 그 어느 교과서에도 이 발언과 주인공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종이 일본군 철병을 거부했던 경위와 이로 인해 급속도로 붕괴된 근대화 순간들을 뜯어보자.
동학토벌대 '양호도순무영'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그해 10월 초 동학군이 재봉기했다. 동학에 대한 고종 시각은 확고했다. '모든 법을 활용해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말라.' (1893년 음2월 26일 '승정원일기') 10월 24일 고종은 수도권 잔여 병력을 모아 동학 토벌대를 창설했다. 토벌대 이름은 '양호도순무영 (兩湖都巡撫營)'이다. 사령관인 순무사는 신정희 (申正熙)다. 신정희는 강화도조약 (1876) 조선 측 대표 신헌의 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무장이다. 수도권 병력인 경군 (京軍)에서 투입된 순무영 병력은 526명이었다. 여기에 토벌에 투입된 지방군까지 합하면 양호도순무영 병력은 2000명이 넘었다. (신영우, '양호도순무영과갑오군정실기', 동학과 청일전쟁 120주년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동북아역사재단, 2014)
화승총으로 무장한 이 병력은 '주술과 죽창'이 전부인 동학군은 충분히 토벌 가능한 병력이다. 그런데 사령관인 신정희가 문제였다. 신정희는 토벌 과정에서 동학군 목적이 '지방정치 개량이지 세상 사람들 말처럼 요상한 술법이 아니며' 따라서 '풍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동학당을 진멸해도 소용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 군인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3. 제방기밀신1, (22) 東學黨에 관한 두 大將의 직접 대화) 고종이 원했던 '비적 대토벌'은 신정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민란 원인 박멸은 일본 측이 원하던 바였다.
일본과 손잡은 개혁 정부 또한 근대적 개혁 작업을 위해 동학 진압을 원했다. 개혁 정부 총리대신 김홍집은 양호도순무영 공식 창설 직전인 10월 24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군의 동학 진압을 희망했다.
'일본군을 많이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가 신중하여 많이 파병하지 않았다. 일청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10만 일본 육군이 개선하는 날 도적 떼도 두려워 흩어지리라.' (위 사진 ②③ · 김홍집, '금영래찰' 1894년 10월 7일) 일본군 기세에 눌려 민란이 자동으로 해산된다고 했지만, 결국 조선 정부 수장이 원한 것은 일본군 투입이었다. 국내 개혁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군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 눈을 감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을 추구한 갑오 정부의 외세 의존성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일본군을 택한 고종
10월 26일 일본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다. 명목상 임무는 조선 내정개혁이었다. 11월 4일 이노우에는 고종과 왕비 민씨를 알현하고 입헌군주제를 제안햇다. 이노우에가 내놓은 내정개혁안 20개 조는 대부분 군주권 제한과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고종 부부는 "군주가 백성을 군주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탈여하는 권한이 바로 군주권"이라며 납득하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5. 기밀제방왕2 (12) 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그런데 11월 20일 공주 우금치에서 2000여 순무영 병력과 일본군 200여 병력이 동학군을 궤멸시켰다. 일본군이 합세하고 지휘하면서 미진하던 토벌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병참부대로 전락한 순무영 지휘부와 일본군 지휘부는 끝없이 갈등을 일으키며 작전 혼란을 초래했다. (신영우, '양호도순무영 지휘부와 일본군 간의 갈등', 군사 81, 군사편찬연구소, 2011)
고종이 앓던 이 하나를 제거해준 이노우에가 이제 갑 (甲)이 되었고 고종은 을 (乙)이 되었다. 고종이 군주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티자 이노우에는 12월 3일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동학 토벌을 위해 파견한 일본군을 즉각 철수하겠다.' 이노우에는 말미에 "나머지는 귀 정부에서 알아서 하라"고 토를 달았다.
고종이 단 하루 만에 총리대신과 외부협판을 통해 답을 보내왔다.
'개혁안은 어제 각 관아에 반포했다. 그리고 이웃 나라 병력을 빌어 난을 일소하고 새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만일 중도에서 (일본군이) 철수한다면 망할 위험이 곧 닥치지 않겠는가. 일본공사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짐의 간곡한 뜻을 공사에게 알려 충직한 도리를 다하기 바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6. 내정리혁 (內政釐革)의 건1, (6) 조선 정황 보고에 관한 건)
이게 바로 위쪽 맨 왼쪽 사진이다. 4개월 전 청 황실에 "일본을 쫓아달라"고 애걸하던 고종에게 왜 일본군 철군이 '협박'이 됐는지는 자명하다. 우월한 화력과 전투경험, 작전능력을 가진 일본군이 양호도순무영보다 본인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했고, 군주권을 법적으로 제한받아도 이는 곧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는 '임무 완수'라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고 이듬해 1월 22일 양호도순무영은 고종 명에 의해 해체됐다. 일본군이 지휘한 조선 관군은 동학 잔당을 소탕했다. 자, 근대화 길목에서 고종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 것인가. 고종을 개명 군주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선임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2월 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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