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02
촉석루 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려 고종 28년 1241 진주 목사 김지대 金之岱, 1190 ~ 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지었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 南將臺 또는 장원루 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 1618 병사 남이흥 南以興, 1576~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에 6 · 25전쟁으로 불렸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 南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 北으로는 평양 부벽루 浮碧樓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 河崙, 1347~1416의 『촉석루기 (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진주 의기사 晉州 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 (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수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 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 (詩板), 다산 정약용의 기문 (記文)이 걸려 있다.
논개의 영정은 처음에는 김은호의 작품이 모셔져 있었으나 화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2007년 표준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의랑 논개의 비
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 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넘는다. 마즈막 그 시간까지 원수와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었고 그를 껴안고 죽어 간 입술이 앵도보담 붉고 서리 맺힌 눈썹이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을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서다. 민족 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서 한 줄기 푸른 물과 한 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 여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 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란 그를 사랑하고 숭모하는 뜻이라.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표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꼭지에 매달려 애기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려진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진 주성터의 풀 거름이 되고 말아도 불로한 처녀 논개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겨 남가람이 천추로 푸르러 구비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의 게드리 곧은 민족의 사랑만은 강물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아 어느 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 밭으로 물 옷 벗어 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여기에 돌 하나 세운다.
지수문
의기사중건기
의기사기
의기사 현판
석류나무
과명 : 석류나무과 (Punicaceae)
학명 : Punica granatum L.
원산지 : 이란, 아프가니스탄
용도 : 약용, 식용, 조경수, 정원수
개화기 : 5 ~ 7월 결실기 : 9 ~ 10월
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달아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더불어 촉석루에 오르다. 슬퍼라 때는 왜적이 짓밟은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지다. 성안은 비어 괴괴하고 강물만 예대로 도도히 흐르는데 멀리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려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 삶이 차라리 요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 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피함을 잊을 뿐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번뿐인 장부의 죽음을 어이 허술히 하랴.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 있는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으니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볼제 뜻 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이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이 길이 남으리라」 이 시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 숙이 현판에 새겨 높이 달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린 바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분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사슴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돌에 옮겨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이는 지금을 거슬러 삼백 예순 아홉해인 임진년의 일이니라.
최재호 새기고 허인 씀
宣祖壬辰五月 鶴峯金文忠公誠一 以嶺南招諭使 來到晋州 與大笑軒趙忠毅公宗道 松巖李貞義公魯 同上矗石樓 時倭亂方棘 官守皆逃 軍民不集 城中寥寥 江水茫茫 擧目山河 不勝悲怨 … 遂把酒吟 詩曰 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진주 여행 안내문과 커피라떼
카페 내부에 매달려 있는 진주성
카페 사장님의 자녀가 그린 그림들
카페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