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07
식민지 공업화와 노동자의 성장
일본 대기업 주도로 저임금을 활용한 섬유공업과 광업, 수력을 이용한 전기화학공업이 성장하였다. 특히 1937년 이후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위해 정책적으로 군수산업을 팽창시켰다. 한국인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과 차별 속에서 힘겹게 일하였다. 노동쟁의로 저항하였으나 경찰의 지원을 받는 기업은 노동자의 요구조건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전소와 송전계통도
전국의 발전소와 송전선을 표시하고, 그 위에 금광 개발을 위해 건설 예정인 송전선을 제1기와 제2, 3기로 구분해 보여주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금광 개발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위해 1938년부터 직접 송전선을 건설하였다.
수풍댐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 / 눈빛아카이브
<조선산 무연탄 분석시험표>
조선총독부 식산국 연료선광연구소가 각 지역 무연탄에 대한 조사 분석 결과를 1941년에 엮은 자료집이다. 연료선광연구소는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인 식민지 지하자원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1923년에 설립한 기관이다.
<일본질소비료 사업 대관>
일본질소주식회사가 사업내용을 정리해 1937년 발간한 책이다. 회사는 한국에서 최대기업으로 수력발전소와 중화학공업단지를 운영하며 성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산업공해와 재난의 피해는 지역민에게 전가되었다.
長津江第一發電所 (長津江水電)
조선은행권
조선은행이 발행한 10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 지폐이다. 당시 화폐 단위는 엔이나 원으로 불렸다. 조선은행은 일제하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였고,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과 교환이 법적으로 가능하였다.
약속어음
이석해가 이석찬 앞으로 발행한 조선식산은행 약속어음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은 일반은행 업무도 취급하였으나 채권을 발행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장기산업금융을 주로 담당하였다. 해방 후 한국산업은행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방직주식회사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동양목 포장지
동양목은 동양염직주식회사의 면포 상품명이다. 동양염직주식회사는 김덕창이 1897년 서울에 설립한 김덕창 염직 공소를 1919년에 주식회사 형태로 개편한 회사이다.
광창특저 포장지
광창특저는 광창염직공장의 옷감 상품명이다. 목화 실을 모시와 같이 특수가공해 모시나 비단과 같이 모양이 좋으나 경제적이라는 설명문이 포장지 안쪽에 있다.
을밀대 위로 올라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 왔습니다.
강주룡의 인터뷰 중에서, <동광> (1931)
충남제사주식회사 영업보고서
1920년대 일본은 비단실, 곧 견사의 세계 최대 수출국이었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위한 제사공장 설립과 원료 확보를 지원하였다. 충남제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충남 예산의 한국인 지주들이 1926년 설립한 회사이다.
월급 통지서
호서은행이 직원 이명세에게 1923년 7월부터 월급으로 62원을 지급한단는 내용이다. 호서은행은 1913년 충남 예산의 한국인 지주들이 설립한 은행이다. 당시 한국인이 설립한 은행은 직원과 고객도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인호 기증
일급 통지서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가 기산준웅에게 1945년 1월 1일부터는 일급으로 1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생산직 노동자는 일급을, 사무직 노동자는 월급을 기준으로 급여를 받았다. 기산중응은 최준웅의 창씨명이다.
신교육과 신문화
한국인은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문화와 교육을 폭넓게 경험하였다. 젊은이는 학교에 들어가 더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하는 한편 민족적 자각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총독부의 대중매체 검열과 민족 차별적인 교육 정책 속에서 진해되었다. 생활 수준 차이에 따른 문화 향유와 교육 기회의 격차도 컸다.
1920
미국 헌법 수정으로 여성 참정권 인정
1923
영국 라디오 수신료 징수 시작
1924
국제 연맹의 아동의 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 채택
1927
미국 유성영화 시대 시작
1930
미국 나일론 스타킹 상품화로 선풍적인 인기
1940
미국 페니실린을 치료용 주사제로 제조
신교육과 학생
조선총독부는 식민 지배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한국인에게는 중등 이상의 교육을 제한하고,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한국인은 학교 설립 운동을 펼쳤다. 학생은 일자리와 출세를 위해 학업과 상급학교 진학에 전력을 다하면서도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회 주체로 등장하였다.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사진
1908년 설림된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중등교육기관을 한국인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남녀가 다니는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로 각각 구분하였다.
이영희 기증
부산부민공립국민학교 통지부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을 본격화하는 1940년대에 교육을 통해 황국신민의 정신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수신, 국어, 영어, 지리를 통합한 국민과가 만들어졌고 조선어는 교과목에서 제외되었다.
한득추 기증
오정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현재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오정초등학교의 전신으로 1932년에 개교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초등교육기관을 조선인이 다니는 보통학교와 일본인이 다니는 심상소학교로 구분하고, 수업연한을 각각 4년과 6년으로 차별을 두었다.
송백진 기증
대구공립상업학교 단체 사진
1923년 개교시 본교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각각 50명 입학했다. 1920년대 중등교육과정으로서 실업계 학교는 일반계와 달리 민족공학제로 운영되었다. 민족별 인구와 자원자수를 무시해 한국인은 극심한 경쟁을 겪어야 했다.
정읍제1공립심상소학교 개근상
창씨개명한 박판술의 1년 개근 상장이다. 원래 심상소학교는 일본인 초등학교이었으나,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한국인 초등학교도 심상소학교로 불렸다. 1941년에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兩普校 (양보교)를 六年制 (육년제)로 하라
普通學校 (보통학교)를 增設 (증설)하라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남녀 취학률 / 오성철, <식민지 초등학교의 형성> (2000)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 독립기념관
민립대학 설립 총회 출석 통지서
3 · 1운동 이후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통지서는 1923년 3월 29일 총회 개최에 앞서 출석여부를 알려줄 것과 숙소는 준비회에서 부담한다는 내용이다.
<보통학교 조선어 및 한문독본>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초등 2학년 교과서이다. 일제강점기 초 한국인 학생은 정규교육 과정에서 한글을 배웠다. 다만 이는 모국어 습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 습득을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신편 고등국어독본>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국어'는 일본어였다. 3 · 1운동 이후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등교육 과정은 4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본서는 4학년 국어교과서이다.
<초등지리>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초등 6학년 교과서이다. 한국은 일본의 한 지방으로 서술되어 있다. 삽화에서 한반도는 일본의 산맥으로 그려졌고,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되었다.
<보통학교수신서 아동용>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초등 1학년 도덕 교과서이다. 학교 적응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가르치면서 일본의 가치관을 주입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5과에 일장기와 일왕의 행차 모습이 실려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파급 학교 분포도
조선헌병대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확산을 초등, 중등, 전문학교로 구분해 표시하였다. 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해 다음해 3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전국적 확산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피고들
광주학생항일운동 피고들
광주학생항일운동 조직도
조선헌병대가 1930년 2월 제작한 내용이다. 신간회, 근우회, 고려공산청년회, 조산공산청년회와 그 각각의 연계 조직이 곳곳에서 발행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이면에서 지휘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제적 예정 안내문
학교는 동맹휴학에 참여한 학생 김영규의 보증인에게 1월 20일까지 등교하지 않으면 제적처분한다고 경고하였다. 함께 보낸 글에서 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서울지역 학교에서 전개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人生關門 인생관문?
試驗地獄 시험지옥?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증서
조선변호사 시험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매년 1회 실시되었다. 시험에 합격한 한국인은 총 134명이다. 특별한 자격조건이 없었기 때문에 독학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경성제국대학교 예과 수료증서
경성제국대학은 입하하기 전에 2년 과정의 예과를 졸업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막고자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을 설치하였다. 이공학부는 1941년에 설치하였다.
욱의학전문학교 졸업증서
194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개칭한 교명이다. 전문학교 졸업생은 한국인 사회에서 소수의 엘리트로서 자부심을 가졌으나, 식민지인으로서 만성적인 취업난을 겪었다. 의학전문학교는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워 경쟁률이 높았다.
입학시험 수험번호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06년 설립된 명신여학교의 후신이다. 입시과목은 일본어와 산술이었고, 입학경쟁률은 1929년에는 3.3 대 1이고, 1939년에는 6.1 대 1이었다.
김효숙 기증
<입학시험문제집>
조선총독부의 소극적인 학교 설립과 학력에 따른 취업, 임금, 사회적 보상의 차이는 한국인의 교육열과 함께 입학난을 초래하였다. 이에 상급학교 진학준비를 위한 시험문제집과 잡지가 다수 판매되었다.
고등전문학교 입학시험사항 일람표
일본의 고등교육은 제국대학 ㅡ 일반대학 ㅡ 전문학교의 위계 구조를 갖지만, 식민지 한국에는 일반대학이 없고 경성제국대학과 20개 전문학교만이 존재하였다. 관립학교의 입학시험은 모두 일본어라서 한국인에게 불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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