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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드무2 2024. 11. 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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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①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젊은 시절 모습. 레이건은 젊었을 때 할리우드 배우로 활동했어요. ②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과 아내 낸시 레이건이 대통령 취임 퍼레이드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어요. ③ 로널드 레이건 (왼쪽)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어요. 이 회담을 포함해 냉전 시기 두 정상은 여러 차례 회담을 했고, 그 결과 양국 긴장이 완화됐어요. / 브리태니커 · 레이건 대통령 기념 도서관

 

 

 

시장 중심 '레이거노믹스' 정책으로 미국 경제 회복시켰죠

 

 

 

영화배우 출신 미국 제40대 대통령

불황과 물가 상승 겹친 80년대 경제

정부 규제 완화 · 세금 감면으로 돌파

 

소련 변화시키려 했던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 열어 양국 냉전 완화시켜

 

 

 

최근 미국 제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1911 ~ 2004)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했어요. 올해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레이건 전 대통령의 영화가 선거 판도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했던 1981 ~ 1989년은 냉전 한복판이었어요. 경제적 위기와 외교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시기였죠. 그가 어떻게 이런 과제들을 헤쳐 나갔는지, 그리고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영화배우에서 정치인으로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기 전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했어요. 1937년 워너브러더스와 계약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주로 B급 영화에서 활동했지만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1947년에는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어요. 그는 원래 진보 성향의 민주당을 지지했었지만, 1950년대 초부터 보수적 성향으로 바뀌면서 공화당을 지지하게 됐다고 해요. 레이건의 배우 경험은 대중이 그를 친숙하게 느끼게 했어요.

그의 뛰어난 연설 능력 역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한몫했답니다. 1964년 레이건은 공화당 대선 후보 골드워터에 대한 지지 연설에서 명연설을 펼쳤어요.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우리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정부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멀고 먼 수도에 자리 잡은 소수의 지적 엘리트들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도록 할 것인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라는 부분이 유명해요. 연설을 통해 신입 정치인으로서 대중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것이죠.

이후 레이건은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됐어요. 197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선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패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됐고,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레이거노믹스

레이거노믹스는 '레이건' 과 '이코노믹스' 를 합친 말이에요. 레이건 정부가 시행한 시장 중심적 경제정책이지요. 레이건 재임 당시 미국은 경제 불황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어요. 레이건은 '큰 정부' 가 문제라고 보고, 민간과 시장 역할을 중시하는 '작은 정부' 를 지향하며 정부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 등의 정책을 시행했어요.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의도였지요.

그 결과, 레이건 정부 초기 7 ~ 10%에 달하던 실업률이 임기 말 5%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경제를 회복 ·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하지만 부유층 위주의 감세 정책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해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아요. 또한 냉전 시기 군비 증강 정책으로 국가 재정 적자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죠. 이처럼 평가는 엇갈리지만 레이거노믹스는 1980년대 미국의 경제적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정책이랍니다.

 

 

타격 입은 레이건 행정부

'이란 · 콘트라 사건' 은 레이건 정부에 큰 타격을 입힌 외교 스캔들입니다. 미 정부가 레바논의 친 (親)이란 무장 단체에 납치된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적대국'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지원하다 들통난 일이에요. 당시 미국 외교와 군사 정책의 비밀이 폭로돼 많은 논란이 있었죠.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미국은 이라크를 지지했으며, 이란과는 적대적 관계였지요. 그런데 레바논에서 친이란계 조직이 미국인 인질을 납치했어요. 1985년 레이건 행정부 내 일부 관료들은 이란에 미국인 인질 석방 주선의 대가로 무기를 판매했어요. 그리고 무기 판매 대금으로 사회주의 혁명 정부가 들어선 중앙아메리카 니카라과의 반혁명 세력 '콘트라' 를 지원합니다. 반군을 통해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서였죠. 미국 의회에서 1984년 콘트라에 대한 군사 지원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도 말이지요.

이 사실은 1986년 레바논의 한 신문을 통해 밝혀졌어요. 이후 미국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큰 압박을 받게 됐습니다.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 얻은 자금이 의회가 금지한 콘트라 지원에 사용됐다는 사실에 미국인들은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이 사건으로 레이건 행정부는 신뢰를 크게 잃게 됩니다. 특히 대통령이 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가 중요했는데요. 레이건은 당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행정부 내에서 벌어진 일을 모를 리 없다고 의심했지요. 이 사건은 이후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서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해요.

 

 

냉전을 종식시키다

냉전 종식은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 이라 부르며, 소련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어요. 그는 미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레이건이 1983년 3월에 발표한 전략방위구상 (SDI)이 있어요. 소련의 핵미사일을 비행 도중에 격추시키는 방법에 관한 연구 계획이에요.

이런 레이건의 군사적 강경 기조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련을 더욱 압박했어요. 당시 소련은 군비 경쟁을 계속하기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레이건의 군사적 압박으로 소련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미국과 소련 관계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개혁 등을 통해 소련을 변화시키려 했고, 냉전 완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지요.

이에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열었고 이 과정에서 양국의 긴장이 완화됐습니다. 특히 1987년 워싱턴에서 열린 회담에서 두 정상은 중거리핵전력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미사일 총 2692기를 폐기했고, 이를 통해 핵전쟁 발발 위험성이 크게 줄어들었어요. 냉전 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약인 것이지요. 결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습니다. 레이건의 외교 정책과 리더십이 냉전 종식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 · 구성 = 오주비 기자 (jubi@chosun.com)

 

[출처 :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2024년 9월 1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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