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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4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기적의 역사 경부고속도로 1970년 7월 7일, 대한민국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1960년대 정부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최대 당면과제였던 산업화를 위한 육로수송체계의 전면적 개혁의 일환으로 시작된 '국토 중단의 대동맥'이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대 속에 불가능하게 보였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통령과 건설노동자들의 끈질긴 집념과 노력으로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였고, 이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성공적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개통 당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까지 총 428km로 완공되었으나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노선체제에 따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이르는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철강산업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국가 건설에 가장 토대가 되는 산업을 철강산업으로 판단하고 종합제철소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한국은 아직 종합제철소를 세울 여건이 안된다는 국제사회의 회의적인 시각으로 인해 자금과 기술지원이 거절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 결과 포항종합제철이 1970년 4월 1일에 착공되어 1973년 7월 조강 연산 103만 2천톤 규모로 완성되었다. 포항종합제철 건설로 인해 우리나라는 철강제품의 자체공급이 가능해졌고, 조선 · 자동차 · 군수품 등 중공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SHIPBUILDING INDUSTRY 현대미포조선(울산) 확장대우옥포조선(거제) 건설삼성죽도조선(거제) 건설 ※ 100만 톤 급..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수출 1억 달러에서100억 달러까지 우리나라는 1964년 1억 달러를 수출한 후 불과 13년 만인 1977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했고, 외신들은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것이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라고 극찬햇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출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관계 공무원 그리고 기업과 근로자들이 밤낮없이 땀 흘려 일한 결과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1973년 전 세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중동전쟁을 빌미로 중..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수출지원정책 우리나라 수출은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경제를 고도성장시킨 주요 원동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정권 초 "불타고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한 것 같다"라고 말하며 나라를 꾸려갈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인재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에서 '수출만이 살길'임을 확신하고 국력을 집중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수출증진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여 경제발전을 위한 수출지원정책들을 수립 및 실현해 나갔다.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62년부터 대통령 주관하에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수출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풀고, 금융 및 세제 혜택과 수출 우수기업들을 우대하는 등 수출지원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1964년 1..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세종로 지하도 개통기념 가위 / 태평로 지하도 준공기념 가위 /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삼각지 입체로 개통기념 가위 남산 제1호 터널 및 고가도로 개통기념 가위 /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기념 가위 / 북악터널 개통기념 가위 남해대교 개통기념 가위 / 호남-남해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서울-강릉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어린이대공원 개원기념 가위 천호대교 개통기념 가위 / 남산 제3호터널 준공기념 가위 /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사업 준공기념 가위 종합영상관 수출진흥확대회의 Expanded Meetings for Export Promotion 수출은 원대한 안목을 가지고 착실히 계획하고, 줄기차게 실천해야 한다. 목전의 조그만 이익보다는 내일에 얻을 수..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세계 리더들이 말한 한강의 기적 "내 아버지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1960년대 초반에는 케냐의 GDP가 한국보다 높았고, 내가 태어나던 때도 케냐가 한국보다 훨씬 부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 나라 경제 규모가 전혀 비슷하지 않다. 사람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 게 케냐가 한국처럼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사우스코리아"라고 말하고 싶다." 피터 드러커 경영학자 (아래)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생을 바친 리더였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위) "내가 본 대한민국의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간호사 서독 파견 간호사는 독일 마인츠 대학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만 226명의 간호인력이 파견되었다.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간호원 중심제'로 간호사들은 의료인으로서의 업무 외에도 환자 옷 갈아입히기, 병실 청소, 식사 보조 등의 일을 하였다. 이러한 고된 일과에도 연장근무와 주말근무까지 자청해 가며 모은 돈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이들의 성실과 친절함에 독일 언론은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등의 내용으로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근로자들이 송금한 돈은 당시 우리나라 연간 총 수출액의 2%에 가까웠으며 국제수지 개선 및 국민소득 향상, 나아가 한국경제성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후 서독파견 근로자..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서독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 2 박정희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와 단독회담에서 독일의 경제지원을 당부하였다. 이에 에르하르트 총리는 "각하,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42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총리가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면서 이웃나라끼리 손을 잡았지요.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 우리는 일본과 단 한 번도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 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개요) 1962년 1월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계획 수립 단계부터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중점과제로는 식량자급, 산림녹화, 수산개발과 화학 · 철강 · 기계공업 등을 건설하여 공업고도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용을 증대하며, 가족계획의 추진으로 인구팽창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와 영농다각화를 통한 농가소득 향상에 주력하며,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을 배양하여 기술수준과 생산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원래 계획의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6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6 5월 혁명은 단순한 변혁도, 외형적 질서정비도, 새로운 계층형성도 아닙니다. 상극相剋과 파쟁派箏, 낭비와 혼란, 무위無爲와 부실의 유산을 조상과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우리 불운의 세대가 이 오염된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고 자주와 자립으로 번영된 내일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우리 혁명의 궁극적 지표인 것입니다. 1963년 8월 30일 전역사 민족중흥의 길에 나서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주의, 사상, 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맞추어서 우리에게알맞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서양사람들이 입는 양복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다. 저고리 소매도 잘라내고 품도 줄여야 입을 수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도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실정에 맞추어야 한다. 196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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