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활박물관] 02
유엽전
화살촉의 모양이 버들잎처럼 생긴 유엽전은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 깃이 작은 전투용 화살로 고려 때부터 사용했다.
고려는 화살의 사거리를 늘리는데 관심이 많았는데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깃이 작은 유엽전은 이에 가장 적합한 화살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무기를 전담하여 생산하는 국가기관인 군기시에서 제작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무과시험의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어 전투용보다는 시험용, 연습용 화살로 사용했다.
박두
박두는 나무로 만든 둥근 촉이 달린 화살로 '목전(木箭)', '고도리'라고도 불린다. 박두는 평상시 화살을 쏠 때에 안전을 도모하고 쇠를 절약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로 무과 시험과 연습용으로 사용했던 박두는 살이 가볍고 깃이 좁기 때문에 매우 멀리까지 날아간다. 무과 시험 때 박두로 쏘아 240보보다 더 멀리 날아갈 때 마다 추가 점수를 줬다. 그러나 박두만 사용하다 보니 무거운 철전에 익숙하지 못한 폐단이 있어 때에 따라서는 철전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명적
명적은 속이 빈 나무, 사슴뿔 같은 것으로 만든 소리통을 달아서 날아갈 때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화살로 '효시'(嚆矢)라고도 한다. 사냥이나 전투를 하며 무리를 모으거나 해산할 때 신호용으로 사용했으며 짐승에게 위협을 가할 때도 사용했다. 명적은 무용총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명적은 흉노나 몽고도 많이 사용하였다.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는 명적으로 1만 기병을 훈련시켰고, 몽고군은 유럽을 침공했을 때 사용했다.
편전과 통아
편전은 '애기살'이라고도 불리는 짧은 화살이다. 편전은 길이가 짧기 때문에 활만으로는 쏠 수가 없고 통아라고 불리는 반으로 쪼갠 나무대롱에 넣어야 발사할 수 있다.
편전은 중량이 가벼운 반면에 속도가 커서 관통력이 강하여 적을 공격하는데 유리하였고, 또한 재료의 절약과 개인 장비의 능력을 배가 시킬 수 있어서 유리하였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편전은 조선의 중요한 비밀 무기로 활용되었으며, 무과 시험에도 사용되었다.
신전
임금이 거둥할 때에, 선전관(宣傳官)을 시켜서 각 부대에 군령을 전하는데 쓰던 화살이다. 살촉에 '令'자를 새기고, 깃 아래 '信'자를 쓴 삼각형의 비단을 달앗다. 평소에는 꽂아 두는 전가(箭架)에 꽂아 두었다.
1795년 정조는 오영이 있다면 오색 신전을 사용해야겠지만, 앞으로는 황색 신전을 각 군영에서 통용하도록 하였다. 1888년 고종은 신전을 파손한 병정을 엄벌해야 하지만 목숨을 보존해 주되 멀고 험한 곳에 귀양을 보냈다.
조선화살
80㎝, 82.7㎝, 86.2㎝, 89.8㎝
연습용이나 무과 시험용으로 사용되었던 무촉전과 박두는 유영기가 제작한 것이고, 유엽전은 실제 사용했던 것이어서 깃이 탈락해 있지만 깃간에 화살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다.
명적
86㎝, 87.4㎝, 92㎝, 95㎝
발굴된 신라 명적, 고구려 명적, 가야 명적 1, 2를 복원한 것이다.
유영기 제작
편전
86㎝, 87.4㎝, 92㎝, 95㎝
작은 화살인 편전과 이를 발사하는 나무대롱인 통아를 복원한 것이다.
유영기 제작
편전
편전은 통전, 변전, 동전, 애기살이라고도 불리는 짧은 화살로 활만으로는 쏠 수가 없고 통아라고 불리는 반으로 쪼갠 나무 대롱에 넣어야 발사할 수 있다.
신전
95㎝
국왕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화살인 신전과 이것을 평소에 꽂아 두는 전가를 복원한 것이다.
유영기 제작
화성능행도 병풍
득중정어사도
고궁박물관 소장
1795년(정조 19) 윤 2월 14일 양로연을 끝내고 어사대가 있는 득중정에서 활을 쏘고 매화포로 불꽃놀이를 즐긴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득중정'의 이름은 현륭원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후 처음 맞이하는 사도세자의 탄일에 정조가 활을 쏘고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1794년 가을에 득중정을 노래당 서쪽으로 옮기고 낙담헌도 지었다.
고풍
옛 풍습[古風]에 따라 활쏘기 대회를 열고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다. 또한 활쏘기 성적과 상품을 기록한 것도 고풍이라고도 한다. 1792년 (정조 16) 검교제학 오재순(吳載純)이 기록한 활쏘기 정조의 활쏘기 성적은 장혁 1순, 유엽전 20순 100발 중 세 발을 빼고 모두 과녁을 맞혔다. 한 발은 과녁에 쏘지 않고 하늘이나 숲으로 쏘아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옛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기록한 오재순에게 꿩 1마리를 상으로 내렸다.
화성능행도 병풍
서장대야조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795년 (정조 19) 윤 2월 15일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돌아온 정조가 화성 서장대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성조식을 관람하고 방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야조식을 진행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화성의 실제로는 이번 행사의 다음해에 완성되었는데, 그림에는 이미 모두 완공된 상태로 그려졌다.
백각궁
흰색의 물소뿔로 만든 활이다. 흰 물소뿔은 구하기가 쉽지 않아 백각궁을 귀하게 여겼다.
김박영 제작
국조오례의
조선 전기의 오례를 중심으로 모든 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 중 군례편으로 국왕이 성균관 문묘에 행차하여 공자에게 향을 올린 뒤 활을 쏘는 대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복제
조선시대 고문서
조선시대, 100㎝ × 190㎝
중국 사신의 비용을 담당하던 칙수고가 있어 평안도나 황해도 지방의 중기로 보인다. '병방색잡물'에 흑각궁 31장, 교자궁 8장, 상각궁 23장, 장전 1,800개, 편전 2,400개, 통아 55개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흑각궁과 상각궁을 교자궁으로 개조했다.
대사례 大射禮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신하와 한자리에 모여 옛 성인에게 제향 (작헌례 酌獻禮)하고 활을 쏘던 의식이다.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덕행을 수양하는 방법이며 심신을 단련하고 국가의 비상시를 대비하는 훈련방법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사례도 (御射禮圖)
국왕이 활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왕의 과녁은 곰이 그려져 있는 붉은 색의 '웅후'였으며, 영조의 경우 총 네 발의 화살 중 세 발을 명중하였다. 악차(幄次)에 세 개의 단을 설치하였는데, 제 1단은 국왕의 어좌, 제 2단은 자주빛 용문석을 깔아 놓은 어사위(御射位), 제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이다. 단의 동쪽은 3개의 탁자가 있는데 붉은 색으로 각각 국왕의 깍지와 팔찌, 어궁(御弓), 어시(御矢)를 놓았으며 단 아래의 동서쪽에는 탁자 위에 상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弓矢)를, 서쪽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두었다.
시사례도(侍射禮圖)
신하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활 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 색의 '미후'로 바뀐 점이다.
왕이 어사례를 마치고 단 뒤의 어좌에 앉아 있고 시사관 두 명이 화살을 장전하는 모습이다. 표적 주위의 핍에는 과녁의 적중 여부를 알리는 각색기를 든 관원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사단 아래 우측에는 시사관들이 쏜 화살 중 맞힌 화살을 꽂아두는 복(福)이 다섯 개가 설치되어 있다.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
시사를 마친 후 시상하고 벌주를 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와 궁시를 상으로 받앗으며,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시사례를 마친 종친과 문무백관이 단 아래 좌우로 줄지어 앉아 잇고 화살을 맞힌 자는 국왕이 하사한 상품을 꿇어 앉아 받는 모습이고, 반대편에는, 화살을 맞히지 못한 자가 국왕이 내린 벌주를 담은 각배를 치에 받아 서쪽을 향하여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웅후(熊候)
미후(麋候)
예궁
247㎝
대궁 또는 현궁으로도 불렸다. 궁중연사나 성균관 대사례, 그리고 향음주례 등에 의장용 무기로 사용되었다.
김박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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